[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9. 한국불상의 원류
베일에 가린 불상역사 한국엔 3C경 첫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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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투라 불상> |
사진설명: 인도 마투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전형적인 초중기의 마투라불.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
사찰의 중심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있기에 사찰이 세워지고, 사찰은 예배대상이 된다.
탑이 사찰의 중심인 적은 있었지만, 불상(佛像)이 탄생된 뒤, 탑(塔)은 부차적 존재로 변하고 부처님은 사찰의 핵심이 됐다. 아니 불교의 한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천진하게, 때로는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을 보노라면 모든 근심은 저절로 사라진다. 부처님이 갖는 위신력 때문이리라.
불교가 탄생된 초기에도 불상은 존재했을까.
불상은 언제부터 조성됐고, 우리나라엔 언제 전래됐을까. 인도의 부처님, 중국의 부처님과 우리나라 부처님은 다를까.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 다를까.
통상 불상은 기원 후 1세기경 현재 파키스탄 령인 간다라지방과 인도 땅인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불교도들은 부처님이 살아 있을 당시에도 불상은 있었다고 믿었다.
<증일아함경〉권28에 불상조상(佛像彫像)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증일아함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33천에 올라가 그곳에 있던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고 3개월 동안 머물렀다.
당연히 지상에선 오랫동안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었다. 부처님을 너무 사모한 교삼미국(현재의 코삼비)의 우진왕은 근심 끝에 병에 걸리고 말았다. 여러 신하들이 건의를 했다. “나라 안의 뛰어난 장인을 모아 부처님을 닮은 상을 조성하면 되지 않느냐”고. 왕은 즉시 최 상질의 전단향나무로 부처님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장인들은 높이 5척의 부처님 상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소식을 접한 코살라국(현재의 쉬라바스티 부근에 있었던 나라)의 파사익왕(프라세나지트)도 황금 불상을 만들게 했다.
인도에서 2구의 불상이 처음으로 출현한 것. 천상에 있던 부처님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삼연(三連)의 계단으로 여러 천신들을 거느리고 지상’(三道寶階)에 내려왔다. 그 때 우진왕은 자신이 만들게 했던 전단향의 부처님 상을 모시고 나아갔다. 이를 본 부처님은 “불상을 조성하면 공덕 복보(福報)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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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있는 역사민족박물관에 보관중인 삼존불. 간다라불의 영향이 보인다. |
5세기 초 인도 여러 지역을 방문한 법현스님과 7세기 중반 인도 불적을 답사한 현장스님에 의하면, 조상전설(彫像傳說)에 등장하는 파사익왕과 우진왕이 만든 불상이 사위성과 교삼미국에 각각 남아 있었다 한다.
특히 여러 나라 왕들은 예배하기 위해 우진왕의 전단향 불상을 모각(模刻)하기까지 했다.
최초에 조성된 불상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신앙은 중국에서도 매우 성행했다. 중국 측 문헌에 의하면 심지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우진왕이 만든 전단상이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의 전란기에 이 곳 저 곳에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다 북송 초 개봉에 모셔졌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진왕 조성’을 전설로만 간주한다. 남방불교권엔 아예 우진왕 조성이 전해지지 않았다.
“1C경 인도.간다라불 첫 탄생” 주장
어찌됐던, 일본의 미술사학자 다카다 오사무(高田修)가 〈불상의 탄생〉에서 지적한 것처럼 “불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느냐 하는 문제는 누구나 관심 갖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불상의 탄생을 계기로 불교도들의 신행(信行)은 엄청나게 변했고, 불교 역시 세계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불상은 불교가 전파된 곳이면 어디든지 전해졌고, 불상이 없는 불교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불상 탄생을 계기로 불교사상도 발전했고, 불교는 보다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상 탄생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단순할 것 같은 ‘불상 탄생의 시기’가 인도미술사나 고고학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때문에 더욱 해결이 요망되는 중요한 과제다.
학자들에 따르면 불상은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상이 없는 ‘무불상(無佛像)시대’가 있었다. 초기엔 불교도들도 절대로 부처님 모습을 형상화하지 않았다. 부처님을 형상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불경(不敬)으로 간주됐다. 이 시기엔 보리수나 불족적(佛足跡), 윤보(輪寶) 등으로 부처님 존재가 표현됐다.
영생불사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말씀은 편의적이고 유한한 문자로 옮겨져서는 안 되고, 그 얼굴도 유한한 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인도인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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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운강석굴 대불. 인도적인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중국적인 상호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다 어느 시기에 불상에 태어났다. 대체로 기원 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이뤄진 일로, 본거지는 간다라(파키스탄)와 마투라(인도)였다.
이들 지역은 모두 독자적 조형미술의 전통을 간직한 채 불교중심지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쿠샨왕조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가 드물다는 점.
인도인들은 자료를 남기지 않는 민족으로 유명한데, 인도 역사에서도 가장 불분명한 시대 중 하나가 바로 쿠샨왕조. 간다라파 미술과 마투라파 미술 역시 편년(編年)이 확립돼 있지 않기에, 어느 지역에서 불상이 먼저 태어났느냐를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불상의 탄생’은 결국 “불상이 간다라 기원인가 마투라 기원인가 하는 문제”(다카다 오사무)에 다름 아니다.
설사 불상의 기원이 간다라 혹은 마투라라 하더라도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간다라미술은 그리스.로마계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발생.전개된 것, 인도에서는 이질적인 미술. 간다라 불상도 그리스풍의 사실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하지만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
마투라 미술도 마찬가지다. 마투라 불상은 인도 고유의 전통적 수법으로 된 순인도적인 양식으로 간다라불상과는 확연히 구별되지만 그것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를 파악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불상이 태어나도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조성되지는 않았다. 다른 인물과 똑같은 크기로 조성되다, 점차 독립된 불상으로 발전했다.
한편, 중부 인도의 마투라는 종교도시이자 미술공예의 전통을 키워 온 도시였다. 불상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약사.약시상 등 신상(神像)들이 많이 만들어지던 중심지가 바로 마투라였다.
마투라엔 설일체유부 계통의 교단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인도불교의 한 중심지가 돼 있었다. 불상은 이런 전통 속에서 자연스레 조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일단 금기가 깨지자, 마투라엔 조상(彫像)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마투라 불상은 게다가 사르나트를 비롯한 갠지즈강 중류 유역의 각지로 전파돼 전 인도로 퍼져 나갔다. 초기 마투라 불상은 눈에 힘이 넘치는 등 전체적인 포즈에서 역동성이 역력했다. 후기로 갈수록 고요하고 숙연한 상태로 변해갔다.
알렉산더의 침략 이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침투돼 있던 간다라 지역에서도 마투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한 관계로 간다라는 예부터 여러 민족과 부족의 문화가 융합되던 곳, 따라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간다라에서 불상이 조성됐다.
간다라 지역의 불교는 쿠샨왕조 성립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중국 하서주랑 일대에 살던 대월지족이 흉노에 쫓겨 카이버 고개 너머에 세운 왕조가 바로 쿠샨왕조. 3대왕 카니쉬카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는 북서인도에서 갠지즈와 야무나강 상류.중류 유역, 중부 인도에서 바라나시까지 포함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불교 비호와 전파에도 힘썼다.
인도형상, 중국식 거쳐 한국적 불상으로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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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석굴암 본존불. 토착화 과정을 거쳐 한국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비호에 힘입어 불교는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전래됐고, 불상 또한 전해졌다.
물론 중국에 전해진 초기의 불교는 인도풍이 강했다. 병령사 석굴 169굴에 있는 서진 건홍 원년(420)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불상은 간다라풍의 불상이 중국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불상은 이후 한화(漢化) 과정을 거쳐 완전히 중국적인 불상으로 바뀌게 된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후한 명제 영평 10년(67). 후한.삼국시대를 거치며 발전의 토대를 구축한 중국불교는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전래됐다.
당시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전진. 전래된 불교는 대승불교를 주로 하는 중국 북방불교였다.
뚝섬 등에서 발견된 불상을 볼 때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상도 북위 불상과 비슷한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 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처음으로 탄생된 불상이 우리나라에 전래되기까지 200년 정도 걸린 셈이다. 전래 초기엔 인도식, 중국식 상호였던 불상은 토착화 과정을 거쳐 한국인의 얼굴을 한 불상으로 바뀌고 불교도 그에 따라 한국불교로 발전하게 됐다.
인도.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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