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들이 남는다면
임 그리는 여인은 그리움으로 기다림을 참아낸다. 요즈음 같으면 전화도 하고 영상 메시지도 보낼 수 있으련만 조선 여심(女心)은 시대적인 상황과 제도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본부인이 아니고 첩이나 기생의 신분이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전제군주정치하의 관습이었다. 혼자만이 보고픈 마음을 달랬다. 꿈길에서나마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했다. 조선 3대 여류 시객의 한 사람이 이런 마음을 담아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夢魂(몽혼) / 숙원 이옥봉
안부를 묻네요, 당신은 잘 계신지요
달 비친 비단 창가 슬픔만 깊어가고
반쯤은 모래 되었어, 꿈속 걷던 앞돌길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근래안부문여하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약사몽혼행유적 문전석로반성사
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들이 남는다면(夢魂)으로 번역되는 칠언절구다. 작자는 숙원(淑媛) 이옥봉(李玉峰)으로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요즘도 늘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은 잘 계신지요 / 달 비친 비단 창가에 제 슬픔 또한 깊습니다 // 꿈속에서 오고 간 길에 흔적들이 남는다면 / 그대 문앞 돌길의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꿈속에 오고간 흔적]으로 번역된다. 시인은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시문에 총명했다. 부친은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아껴,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사대부 가문 문과에 급제한 조원(趙瑗:1544~1595)의 소실로 들여보낸다. 그는 여염집 아녀자가 시를 짓는 건 정숙한 일이 못 된다며 시 짓지 않는단 약속을 한다.
단란하게 살던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이를테면 필화사건이었다. 소박을 맞아 쫓겨난 시인은 뚝섬 근처에서 방을 얻어 살았는데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쓴 시다. 요즘도 늘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은 잘 계신지요 / 달 비친 비단 창가에 제 슬픔 또한 깊습니다라고 했다.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겠거니.
화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시상 주머니를 털어낸다. 차분히 안부를 묻고 난 후, 달 비친 창가에 깊었던 슬픔을 하소연하고 꿈속에서 몇 번이고 임의 대문 앞을 서성인다. 서성인 발길 흔적이 땅 위에 남았다고 하면 아마 문 앞에 깔려있는 돌길 반절쯤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적인 상상력이다. 화자의 기막힌 자기 한을 쏟아 내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당신은 잘 계신지요. 비단 창가 슬픔 깊어, 행여 꿈 속 흔적 남는다면 돌길 흔적 모래일걸’이라는 상상력이다.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