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1일 수요일. 7월의 생활을 매듭짓는 일기.
밤에 소변을 보는 횟수가 4, 5회로 늘어나 귀찮아서 혹 치료 방법이 있을가 하고 18일에 생애 처음으로 비뇨기과에 갔다. 18만여 원을 주고 혈액검사와 초음파 검사 등을 하면서 비뇨기과 종합 검사를 받고 일주일분 약을 처방 받아 왔다. 아침과 저녁에 먹는 약과 잠들기 직전에 먹으라는 약이었다. 그런데 잠들기 직전에 먹는 약은 어지러움증이 동반될 수 있다고 했다. 저녁 9시경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경에 일어나 한 차례 소변을 보았다. 조금 어지러운 기가 있었으나 다시 잠이 들었다. 7월 19일 새벽 3시경에 소변이 마려워 다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가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못하고 졸도하여 쓰러졌다. 옆 방에서 잠을 자던 아내가 쓰러지면서 낸 소리를 듣고 나와보고 발견하여 흔들어 깨우기를 어느 정도 했을 때, 눈을 뜨고 곧 의식이 돌아와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거실로 나왔다.
화장실 바로 앞 거실로 나오니 온몸에서 땀이 비오 듯 나오기 시작했다. 옷이 다 젖었고 수건 두 개로 몸을 닦는데 모두 젖을 정도였다. 차츰 땀이 잦아들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있어서 침대로 옮겼고 잠을 청했다. 땀이 많이 난 것이 치유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선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정상적으로 세수를 하고 죽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넘어진 탓인지 몸의 여기저기가 통증이 있어서 오전에 정형외과에 가서 X레이를 찍고 진찰을 하니 우측 갈비뼈 8, 9번에 금이 갔다고 했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주사를 두 번 더 맞아야 된다고 했다. 아내가 동행했지만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잘 걸어 다녔다. 정형외과 치료는 10일 동안에 3회 다니면서 비싼 주사 2회 맞았고 물리치료 3회 하고 17일분의 약 복용으로 치료가 끝났다. 약간의 불편이 있으나 앞으로 2주 정도 지나면 정상 생활이 될거라 했다.
19일에 정형외과에서 나와 전날 치료를 받았던 비뇨기과에 가서 상담을 하고 약을 바꾸어 처방받아 왔다. 비뇨기과 의사의 잘못된 처방이 사고의 원인일 것 같아 의료사고로 항의를 할가 했는데 정형외과에서 치료받으면서 의견을 말했더니 그런 것이 의료사고라 하면 의사할 수 없다고 부질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서 비뇨기과에서의 항의는 하지 않고 사고 경위만 이야기하고 부드럽게 대하고 왔다. 사고 내용을 들은 의사의 표정이 오히려 굳어 있었고 당일 진료비는 받지 않았다. 의사가 사고를 당하라고 약을 처방한 것이 아니고 환자의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해서 한 것이기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문제 삼지 않은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 후 25일에 다시 비뇨기과에 갔다. 혈액검사 결과를 봐야 되어서 갔다. 혈액검사 설명을 듣고 1개월분의 약을 처방해 주기에 받아가지고 나오면서, 의사에게 정형외과 치료가 많이 고통스럽다고 하면서 위로의 말 한마디 듣고 싶다고 했더니,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밖에 환자가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가라고 했다. 그냥 나오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의사들의 생리가 엿보였다. 앞으로 비뇨기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넘어지면 대게 사망사고가 되는데 큰 이상 없이 살아난 이유는 쓰러질 때 천천히 의식을 잃은 것 같고 머리를 전혀 다치지 않고 고개를 욕조 턱에 얌전히 올려 놓고 있는 탓인 것 같았다. 아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라 했다. 의식을 잃은 시간이 20분 정도 된 것 같다고 아내가 이야기했다. 아주 좋은 죽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넘어져서 그대로 죽었으면 고통 받지 않고 죽었을 것이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 같았는데 약간은 아쉬웠다. 살만큼 살아 온 나이가 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이땅위에서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수원으로 이사 와서 손주들을 보살피는 일이 있었고 귀여운 손주들을 보살피면서 많이 행복했었다. 그런데 손주들이 모두 자랄만 큼 자라서 이제는 할아버지의 보살핌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오히려 사춘기 증상을 보이며 할아버지를 기피 하는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서 손주들 때문에 좋았던 시절도 다 지나고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손주들을 더 이상 보살피지 않아도 될 때까지 건강하게 해주시라고 평상시에 기도했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잘 응답해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하나님이 불러주신다면 감사하며 갈 수 있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7월 한 달은 우리 부부에게 시련을 많이 주었다. 시련은 아내에게 먼저 왔다. 다리가 절리고 밤에 쥐가 나는 것이 조금씩 있었는데 심해진 것 같아 11일에 교회에서 잘한다는 의사 소개를 받고 찾아가서 MRI 촬영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평상시에 허리가 자주 아파 어려움이 있는데,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며느리가 그런 것을 알고 허리 치료를 잘한다는 의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환자가 많은 병원이기에 사전 의논 없이 23일에 미리서 예약을 해놓고 있다가, 예약날짜가 가까워 이야기하고, 23일에 아내를 데리고 가서 당일에 시술까지 받게 했다. 며느리가 모처럼 효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며 치료받게 해주었다. 그런데 시술 후, 허리가 아닌 허벅지와 다리가 아파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2일 간격으로 소독을 해야 된다고 해서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에 다니는데 무척 힘들어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야된다고 의사는 이야기 하는데 우선 고통이 심하다. 8월까지 기다려 봐야 될 것 같다. 다리 아픔이 정상화 되고 아내의 허리 아픔이 치료가 되어 앞으로 아프지 않고 살게 된다면 며느리는 큰 효도를 한 것이 될 것 같지만 우선은 어렵다. 며느리와 손녀 유민이는 그동안 6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우리 집에 있었고, 6월 18일과 7월 4일, 20일, 28일에 잠간씩 우리 집에 다녀갔고, 그 외의 시간은 친정 식구들과 지내다가 30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친정의 부모 형제들과의 생활이 행복하기에 두 달 동안 남편을 혼자 있게도 하는가를 생각하면 내 아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7월에 아내와 내가 번갈아 가면서 의료비를 많이 지출했다. 다행인 것은 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의 생활이다. 아무리 의료비가 많이 들어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별거 아니라고 아내와 이야기 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얼마 전부터는 고향인 광주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손주들을 보살피는 일을 잘했고, 광주에 가면 몇 안되는 친구들이 있고 무엇보다 계림교회에서 남은 여생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다. 어머니가 세 분의 설립교인 중의 한 분으로 개척한 교회이고 수십년간 신앙생활을 함께한 교인들이 아직도 상당 수 생존해 있는 교회이기에 많이 그립고 가고 싶다. 그런데 아내가 반대를 한다. 자식 옆에 살아야된다고 하고 광주도 계림교회도 싫다고 한다. 혼자서라도 가고 싶어 자꾸 머리로 여러 궁리를 하고 있다. 쓰러졌다가 깨어나면서 첫말이 광주에 가서 죽고 싶다고 했다.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광주로 가고 싶어 하기에 얼마 동안이라도 광주에 가서 살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일 가 하는 생각도 했다.
광주로 가려면 수원의 집을 팔든지 아내가 수원에서 살려고 하면 광주에서의 나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받든지 해야겠기에 재산권 행사에 걸림돌이 될 며느리와 손녀의 주민등록이 우리 집에 있는 것을 친정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가 며느리가 거절하며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결국 이해가 된 것인지 억지인지 모르나 주민등록을 옮겨 가서 걸림돌이 제거 되었다. 아들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 국적을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며느리만 우리 집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것은 법에도 위배 될 것 같아 더 신경이 쓰였다. 미국인이 되어 버린 아들은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부모자식 관계이지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남인 외국인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이라는 전제로 가족이 함께 미국의 국적으로 통일하고 미국인으로 살라고,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며느리에게 이야기했고, 아들에게도 메일로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 하며 권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 생활이 온라인 예배로 바뀌면서 집에서 영상예배를 드린 기간이 3년여 되었었다. 2023년이 되면서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시작되고, 아내는 나보다 먼저 코로나 이전에 다니던 교회 출석을 시작했고, 나는 2023년 10월 22일에 다니던 교회가 아닌 보배로운교회로 가서 등록하고 교회 출석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길게는 4년여이었고, 대개는 1년여 다니다가 교회를 옮기고 했다. 광주의 모교회인 계림교회를 떠나와서 교회 옮기는 것이 어렵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음을 많이 경험해야 했다. 아내는 내가 교회를 바꾸어 가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옮겨 가면 따라다녔는데, 교회를 다시 출석 하면서 다니던 교회를 계속 다니겠다고 해서 서로 다른 교회로 출석하며 교회 생활을 했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의 인맥 관계가 더 끈끈하게 이루어지는 경향이어서 나와는 달리 아내는 다니던 교회에 인맥이 제법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그동안 교회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지난 19일 새벽 내가 화장실에서 졸도하는 사고를 당하면서 내 모습이 눈에띄게 약해진 것 같았고, 이를 지켜본 아내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 21일 주일부터 나와 같은 교회 출석을 결심하고 등록을 해서 같은 교회에서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첫 출발을 했다. 2010년 5월 수원으로 이사해 와서 여러 교회를 다니며 방황하는 내 모습에 아내의 불만이 많았지만, 어설픈 내 지식으로 갈등을 많이 겪었으나, 나도 더 이상의 방황을 끝내고 정착할 결심을 했고, 드디어 아내와도 합하게 되어 사고를 당한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아내와 생각과 견해가 다른 것으로 인하여 아내를 많이 불편하게 한 것이 항상 미안했기에, 이제 수원에 거주하는 동안은 교회를 옮기지 않는다는 다짐을 아내에게 해주며 함께 새출발을 했다.
첫댓글 많이 안 다치셔서 정말 감사하고 다행입니다 *^^*
아버님 어머님이 계셔서 민채 은채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