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릿소 / 김성한
갈수록 눈발이 굵어진다.
산 초입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서럭서럭 내리던 싸락눈이 산골짜기에 이르자 함박눈으로 변한다. 산 오름길 섶에는 물기 빠진 겨울나무가 맨살을 드러내 놓은 채 떨고 있다. 하얀 솜털같은 눈송이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으려다 기댈 소이 없어 오히려 무안해 한다.
눈이 발목까지 차오른다. 뒤따라오던 아내가 느닷없이 "워, 워"하더니 깔깔거린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하얀 발자국이 마치 늙수그레한 황소가 쟁기질해 놓은 밭고랑 같다며 웃는다. 의성 첩첩 산골 마을에서 자란 티를 낸다.
산등성이 너럭바위에 앉아 김밥 한 줄과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어설프게 먹은 아침 식사를 보충한다. 눈송이도 뜨끈뜨끈한 커피가 생각나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주위로 모여든다.
저 멀리 하얀 고깔모자를 쓴 용문산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눈은 참 겸손하다.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 없이 내린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오두방정을 떠는 여름철 소나기와는 다르다. 눈은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을 몰고 오는 모양이다. 때묻지 않은 순백의 동심으로 빠져들게 하는 걸 보면.
유년 시절,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이면 동네 앞 빈터에서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소맷자락에 콧물 자국이 뻔질뻔질하던 코흘리개들이 편을 갈라 눈싸움을 벌였다. 기운 양말이 눈에 젖은 줄도 모른 채 해종일 놀았다. 집집마다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해거름녘 어머니가 "야야, 저녁 묵어러 온나."라며 부를 때까지 눈싸움을 했다. 그 코찔찔이 친구들, 다들 어디에서 정붙이며 살고 있는지?
머리숱 허연 노부부가 산에서 내려온다. 손을 맞잡고 조심조심 내려온다. 다정히 내려오는 노부부, 일평생 살아오면서 저 눈길처럼 미끄러운 길도 많았을 게다. 때로는 눈 속에 파묻혀 길을 잃어버릴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서로 손을 잡고 험한 길을 잘도 헤쳐 나갔으리라. 노부부의 은빛 머리숱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눈송이도 노부부 인생의 발효된 내음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손을 내민다. 길이 미끄럽다며 손을 잡아 달라고 한다.
"올라가는 길은 미끄럽지 않은데….“
주춤하다 슬며시 손을 내밀자 아내 얼굴이 환해진다. 새색시 시절 홍조 띤 얼굴은 다 어디가고 빗살무늬 같은 잔주름이 많이도 그어져 있다. 눈길에 넘어지고 미끄러져 가며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눈이 그쳤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 그냥 있으래도. 아이고! 저놈의 고집을 누가 말려" 라고 구시렁대며 뒤따라오던 아내의 잔소리도 그쳤다.
산골 외딴 집이 보인다. 두툼한 눈 이불을 덮고 있는 지붕 뒤 굴뚝에는 회색 연기가 하늘에 제를 올리듯 피어오르고 있다. 집 앞에는 벌써 작은 길이 나 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길을 터준 노부부의 눈꽃 같은 마음이 길 위에 일렁거린다.
사립문 앞에서 어름거리니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와 몸 좀 녹이고 가란다. 주름진 얼굴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종일토록 있어 봐야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산골이다 보니 외로운 모양이다. 마루 위 흙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할머니 칠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잘 생긴 아들딸 내외에다 손자손녀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아래채 가마솥 아궁이 앞에는 할아버지가 후후 불면서 장작불을 지피고 있다. 조금 전까지 내린 눈에 물기 가시지 않은 장작인지라 퍼뜩 불이 붙지 않는다. 장작 사이로 바싹 마른 불쏘시개를 집어넣고 입을 동그랗게 말고 불어 보지만 생 연기만 폴폴 낼 뿐 퍼뜩 불이 붙지 않는다. 쪼그랑 노인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갑자기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라는 모 가수가 부른 노랫말이 떠오른다. 장작개비도 불에 타고나면 회색의 재나 검정 숯덩이로 변하니까 불에 타기를 거부하는 걸까?
이윽고 불이 붙었다. 할아버지 얼굴이 환해 온다. 마구간에 엎드려서 주인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황소도 안심이 되는지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린다.
"이 황소 나이가 몇살이에요?"
"나이, 스무 살이 넘었지만 사람 나이로 치면 칠순이 넘은 셈이지"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들려준다. 한 스무 해 전에 우시장에서 엉덩이 촐랑대던 하릅송아지를 사왔다고 한다. 그런 애송아지가 세습 소로 멀쑥 커버린 어느 해 봄날, 목덜미에 멍에를 메우고 처음으로 쟁기를 끌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앞에서 코뚜레를 잡은 채 끌고, 할아버지는 뒤에서 '이랴 이랴' 하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뭉툭한 앞발로 버티던 그 소가 이렇게 늙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집에 와서 참 고생도 많이 했다며 굳은 살 박힌 소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신다. 코뚜레 하지 않은 비육우肥肉牛처럼 맨날 먹고 자는 소가 아닌 일평생 쟁기와 써레를 달고 살아온 소라고 한다. 소잔등에는 덕석이 업혀져 있다. 할머니가 쌀 씻은 뜨물 한 양동이를 구유에 부어주자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주둥이를 구유에 박고 물을 먹는다. 숨이 막히는지 먹다 말고 투루루 투레질까지 하면서. 노부부가 웃음기 가득 머금은 얼굴로 소를 쳐다보고 있다. 마치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표정이다.
구유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노부부를 보니 문득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매고 쟁기를 끈다는 겨리질이 생각난다. 함께 끌면 혼자보다 힘이 덜 든다는 겨리질. 일평생 한 멍에를 메고 서로를 보듬어 주며 살아온 노부부의 삶이 눈 덮인 안마당에 일렁거린다.
오늘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눈이 그치는가 싶더니 금세 햇살 한 자락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잘 쉬었다 간다며 사립문을 나서는 우리를 향해 "산나물 날 때 또 와요!"라며 삶은 고구마 하나를 쥐여준다.
몇 걸음 가다 뒤돌아보니 "조심해서 가요."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노부부의 겹 주름진 얼굴에는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던 겨릿소가 내려앉아 있다.
(수필미학 2016.봄호)
첫댓글 나는 이 작품의 현제시제 문장을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시제에 관한 문제는 전에 강의 한 바 있습니다.
원고지 5매 내외의 짧은 글이라면 현재시제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작에세이는 본질상 시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길이는 창작에세이의 다른 한 면인 서사구성법의 문학 입장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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