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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회 잠언서 10장-17장
잠언 10장 1절-22장 16절은 잠언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이 잠언집을 내용에 따라 세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잠언들은 단순히 외적인 특징에 따라 함께 배열되어 있다. 예로 11장 9-12절은 히브리 말의 둘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하는 네 개의 잠언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잠언집에는 모두 375개의 잠언이 들어 있으며 일상생활의 중심 주제들이 언급된다. 개개의 잠언들은 제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며 단순하고 명백한 언어로 고유한 지혜 사상을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잠언들을 외워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그렇게 하여 계속 후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 잠언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잠언 10-15장에서는 대조 병행구가 자주 등장하는 반면 16-22장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대조 병해구의 목적은 어떤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예로, 11장 23절의 “의인들의 희망은 좋은 것만 가져오지만/ 악인들의 소망은 분노를 가져올 뿐이다.”를 들 수 있다.
잠언 10,1-2 지혜와 우둔 그리고 죽음에 관한 가르침
“1 솔로몬의 잠언.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우둔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된다. 2 불의하게 모은 보화는 소용이 없지만 정의는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준다”(1-2).
이스라엘 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고대 근동인들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지하에 있는 죽음의 나라(저승), “돌아오지 못하는 곳”(욥 10,21)으로 간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음의 나라에서 맥이 빠진 상태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로 누워 있다(이사14,9-11 참조). 물론 개인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곁에서 더 나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에녹과 엘리야가 이 생명을 얻었다고 믿었으며(창세 5,21-24; 2열왕 2,1-3),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우트나피쉬팀이 이러한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인이 에녹이나 엘리야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죽음의 나라는 이미 이승에서 병, 불행, 노예 생활 등의 형태로 살아 있는 사람을 지배한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이러한 죽음에서 인간을 구하시어 새로운 생명을 선사하실 수 있다(시편 30,1-4). 열왕기 하권 20장 1-6절은 주님께서 병든 유다의 임금 히즈키야를 죽게 내버려 두시려던 결정을 바꾸시어 이 의로운 임금의 수명을 정하실 수 있지만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지는 않으신다. 잠언집에서 말하는 죽음은 일반적으로 갑작스러운, 이른 죽음을 뜻하거나 아니면 병이나 불행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매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내는 일이다.”(잠언 23,13-14)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이른 죽음이나 다른 불행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나쁜 사람, 어리석은 사람만이 지속적인 죽음의 위험 속에 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이 세상에서 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종종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인들의 관념으로는 지극히 어려운 물음 가운데 하나였다. “의롭지만 죽어 가는 의인이 있고/ 사악하지만 오래 사는 악인이 있다.”(코헬 7,15) 하느님께서는 나쁜 사람들의 소행을 보시고도 침묵만 지키시는 것 같다(하바 1,13).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인과응보의 원칙만으로는 답을 제시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기원전 2세기경부터 부활 사상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곧,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가는 각각 다른 내세, 부활, 마지막 심판, 영원한 생명 등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념을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가 보수적인 사두가이에 맞서 바리사이의 부활 신앙을 지지했음을 볼 수 있다(루카 20,34-38; 사도 23,6-8). 그래서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어렵지 않아 잠언 10장 2절, 15장 24절 등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읽을 수 있었다.
잠언 10,11 말에 관한 가르침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지만 악인의 입은 폭력을 감추고 있다”(11).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 생활은 주로 구두 수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자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기에 오늘날처럼 대중적인 중요성을 띠지 않았다. 그래서 말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하였다. 잠언 10장 1절–22장 16절에 있는 375개의 잠언 가운데서 70여 개가 ‘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말에 관한 잠언의 가르침은 크게 세 자리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바른 말을 하라.’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 특리 법정에서 말은 이중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바른 말을 함으로써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거짓을 말함으로써 그 생명을 앗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바른 것을 말하는 이는 진실을 밝히지만/ 거짓 증인은 허위만 퍼뜨린다.”(12,17)
“진실한 증인은 여러 목숨을 구하지만/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는 속임수만 일삼는다.”(14,25)
바른 말, 또는 거짓말은 행복이나 불행을가져다주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친교를 맺어 주거나 파괴하기도 한다.
“의인의 입술은 많은 이를 먹여 살리지만/ 미련한 자들은 지각이 없어 죽어 간다.”(10,21)
“성읍은 의인들의 축복으로 일어서고/ 악인들의 입으로 허물어진다.”(11,11)
바른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만, 거짓말은 그 사람에게 해가 된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지만/ 악인의 입은 폭력을 감추고 있다.”(10,11)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18,21)
거짓말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진실한 입술은 길이 남지만/ 거짓된 혀는 한순간뿐이다.”(12,19)
한마디로, 말의 지혜는 능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이루는 능력이다.
둘째는 ‘말을 아껴라.’는 것이다. 말의 지혜가 지향하는 바 가운데 하나는 말을 아끼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면 좋은 것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데에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10,19)
따라서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상하고 다니는 자는 비밀을 누설하지만/ 마음이 신실한 이는 말을 덮어 둔다.”(11,13)
할 일 없이 입만 놀리는 것은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이지만/ 입술만 놀리면 궁핍해질 뿐이다.”(14,23)
그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리한 판단을 자제하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일이다.
“지각없는 자는 이웃을 비웃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11,12)
“미련한 자는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만/ 영리한 이는 모욕을 덮어 둔다.”(12,16)
“네 마음속으로라도 임금을 저주하지 말고 네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마라./ 하늘의 새가 소리를 옮기고 날짐승이 말을 전한다.”(코헬 10,20)
“말을 삼가는 이는 지식을 갖춘 사람이고 정신이 냉철한 이는 슬기를 지닌 사람이다.”(17,27)
셋째는 ‘말 할 때를 잘 가려라.’는 것이다. 언제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참아야 할 것인지를 잘 분별하는 것 역시 지혜에 속한다.
“사람은 자기의 올바른 대답으로 기쁨을 얻으니/ 알맞은 때에 나오는 말이 얼마나 좋으냐!”(15,23)
말에 대한 이론보다 실제는 한층 어렵다. 신약 성경의 야고보서 3장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잠언 10,15 “부유한 자의 재산은 그에게 견고한 성읍이 되고 빈곤한 자의 가난은 그에게 몰락을 가져온다”
현인들의 기본 관념은, 지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이는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부와 영예가 있고/ 오래고 존귀한 재산과 번영도 있다.”(8,18)
“그리하여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그들의 보물 곳간을 채워 준다.”(8,21)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께 분명 복을 얻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복은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부에 대해 일반화된 종교적 관념이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부는 근면을 통해서 얻어진다.
“잠을 좋아하지 마라. 가난해진다.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20,13)
일반적으로 부는 존중되지만, 불의한 재산은 이롭지 못하다.
“정의로 가진 적은 것이 불의로 얻은 많은 소득보다 낫다.”(16,8)
부는 안전과 많은 벗을 보장해 준다.
“부유한 자의 재산은 그에게 견고한 성읍이 되고/ 빈곤한 자의 가난은 그에게 몰락을 가져온다.”(10,15)
“부유하면 친구가 많아지고/ 궁핍하면 있던 벗도 떨어져 나간다.”(19,4)
지혜로운 부자는 사회적으로 의롭게 처신한다.
“거만 불손한 자의 이름은 ‘빈정꾼’/ 그는 교만 방자하게 행동한다.”(21,24)
“그는 언제나 욕심을 부리지만 의인은/ 베풀고서 아까워하지 않는다.”(21,26)
“의인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알지만/악인은 그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29,7)
물론 이상에서 본 것이 부에 관하여 잠언이 가르치는 전부는 아니다. 잠언은 부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부 자체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화목한 가정의 따뜻한 식탁 분위기가 부자의 냉랭한 식탁 분위기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사랑 어린 푸성귀 음식이/ 미움 섞인 살진 황소 고기보다 낫다.”(15,17)
또한 명예가 재산보다 소중하다.
“이름은 큰 재산보다 값지고/ 명성은 은보다 금보다 낫다.”(22,1)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은 결국 재산이 아니라 정의, 착한 행위이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소용이 없지만/ 의로움은 죽음에서 구해 준다.”(11,4)
둘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종교적 관심’이다. 여기서 지혜의 사고가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부는 지혜로운 생활 자세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잠언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가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이의 날은 언제나 불행하지만 흥겨운 마음은 늘 잔치와 같다. 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15,15-16)
여기서 “가난한 이”라는 말은 경제적인 부족함과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인들은 가난과 부가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믿었다.
“서로 마주치는 부자와 가난한 이/ 이들을 모두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22,2; 참조: 집회 11,14)
그러나 가난한 이는 내버려진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의인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알지만/ 악인은 그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29,7)
가난한 이를 억누르는 자는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약한 이를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불쌍한 이를 동정함은 그분을 공경하는 것이다.”(14,31)
가난한 이에게 꾸어 주는 사람은 하느님께 꾸어 주는 것이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19,17)
고아들의 소유지를 침범하는 자를 주님께서 재판하실 것이다.
“옛 경계선을 밀어내지 말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마라.”(23,10)
잠언 10,28과 11,7
“의인들의 희망은 기쁨을 가져오지만 악인의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 (10,28)
“죽음과 함께 악인의 기대는 사라지고 사악한 희망도 사라진다” (11,7)
이 두 절은 수미쌍관을 이루며 10,1에서 시작한 단락의 결론을 부각시킨다. 이 단락 전체는 거짓과 기만을 저지르면서까지 탐욕스럽게 모은 부와 권력에 희망을 두는 악인의 헛된 신뢰를 중심으로 한다. 그것은 10,2ㄴ과 11,4ㄴ에서 반복되는 주장과 대비된다.
핵심만을 소개한 이러한 연구를 기초로 한스 빈프리트 윙글링(Hans-Winfried Jüngling)은 1999년에 결론 부분의 내부 구조를 분석했다. 그는 이 부분을 10,29-32과 11,1-6로 나누었다. 두 부분 모두 주님(야훼)의 이름은 언급하는 잠언으로 시작된다.
“주님의 길은 흠 없는 이에게는 요새가 되지만
나쁜 짓 하는 자에게는 몰락이 된다” (10,29)
“속임수 저울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정확한 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11,7)
첫 부분에는 의인에 관한 잠언이 세 개 이어진다.
“의인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지만
악인은 이 땅에서 살지 못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놓지만
사악한 혀는 잘려 나간다.
의인의 입술은 남이 찬성할 말을 알지만
악인의 입은 사악함을 알 뿐이다” (10,30-32)
둘째 부분은 먼저 흠 없음(10,29)과 지혜(10,31)라는 두 주제를 반복한다.
“오만이 오면 수치도 오지만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른다.
올곧은 이들의 흠 없음은 그들을 잘 이끌어 주지만
배신자들의 패륜은 그들을 멸망시킨다” (11,2-3).
이어서 첫째 부분처럼 의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정의에 대해 말하는 잠언이 세 개 나온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소용이 없지만
의로움은 죽음에서 구해 준다.
흠 없는 이의 의로움은 그의 앞길을 고르게 해 주지만
악인은 자기의 악함으로 넘어지고 만다.
올곧은 이들의 의로움은 그들을 구해 주지만
배신자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걸려들고 만다.” (11,4-6)
단락 전체에서 중심 주제를 되풀이하는 여러 잠언을 계속 관찰하는 일은 독자에게 맡긴다. 여기서는 이렇게 해석하는 시도의 기본 주장만을 소개했지만, 그런 시도에는 설득력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잠언들의 연대를 추정하자면, 의인과 악인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고대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락들을 어떻게 묶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 일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주석가들은 계속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제시한 예는 단지 이와 같은 연구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보여 주려는 것뿐이다.
잠언 12장 의인과 악인의 특성
내용상 10장과 유사한 면이 많은 부분이다. 즉, 11장에서 공동체 내에서의 지혜로운 삶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던 저자는, 이제 의인과 악인의 특성 및 그들의 대조적인 결말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주제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도 10장에서처럼 인간의 언어생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교훈을 사랑하는 이는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훈계를 싫어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1). 교훈이란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집중하면 삶의 지식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된다. 과거의 실패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고 미래에 대해서 큰 포부를 품지 않는 것은 들판의 짐승과 같고(참조 2베드 2,12), 거기에서는 품성을 계발할 수도 없고 구원할 영혼도 없다.
“17 바른 것을 말하는 이는 진실을 밝히지만 거짓 증인은 허위만 퍼뜨린다. 18 난도질하듯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도 있지만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아픔을 낫게 한다. 19진실한 입술은 길이 남지만 거짓된 혀는 한순간뿐이다.”(17-19).
17절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고정된 습관, 즉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말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그런 품성의 특성을 가진 자는 정의의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법정 선서를 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고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실을 부분적으로 숨기거나 거짓이라는 표가 날 때까지 각색하는 그의 습관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듣는 자가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곧 보여 줄 것이다.
18절에서 “난도질하듯”이란 이는 칼의 날이 그 입으로 불려지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조급한 입은 친구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큰 고통과 슬픔을 일으킬 말을 한다. 분별없는 말은 슬퍼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자들의 약한 마음을 때때로 찌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슬픈 자들을 위로하고 화난 자들을 진정시키고 낙심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안다.
19절에서 “한순간뿐이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마도 “내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악의 지배는 순간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진리는 무너질 수 없다. 심지어 인간적인 사실도, 온갖 종류의 조사에 두려움 없이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거짓은 오래지 않아 발각되고 이생에서가 아니면 장차 올 심판 때에 폭로된다.
“의로움의 길에는 생명이 있지만 악인의 행로는 죽음에 이른다”(28). 솔로몬이 이 말을 할 때와 이스라엘이 축복을 위하여 그리심산과 저주를 위하여 에발산에서 선택을 앞에 두었을 때와 똑같이 오늘날도 거룩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다(참조 신명 27,12-13).
잠언 13장 의인과 악인의 길
전반적으로는 12장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의인과 악인에 관한 대조적인 묘사가 그러하고 말의 중요성에 관한 언급이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의 내용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조점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13장에서 가장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바로 듣는 자세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의 권면 그리고 부모의 훈계 등이 모두 경청해야 할 대상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의 권면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간다. 반면에 우둔한 자는 그러한 권면을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다가 마침내 파멸 당하고 만다.
“지혜로운 아들은 교훈을 사랑하지만 빈정꾼은 꾸지람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1).
1절에서 어버이의 훈계는 꾸지람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꾸지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로부터 잘못한 대가에 대해 적당한 꾸지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 부끄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 덕에 좋은 것을 먹게 되지만 배신자들의 욕망은 폭행으로 치닫는다”(2). 사람이 입의 열매로 인하여,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자신의 입의 열매를 자신이 거둔다는 의미도 있지만,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훈계를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축복을 누린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어른들의 말씀과 하느님의 말씀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지혜로운 아이로 자라도록 어려서부터 훈육(訓育-말씀으로 가르치는 것)하는 것은 부모의 마땅한 책임이다.
“아무리 바랄지라도 게으름뱅이의 갈망은 헛되지만 부지런한 이의 갈망은 충족된다”(4). 마음으로 원하나,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는 자들을 게으른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아무리 결단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망상(妄想-delusion), 혹은 허황된 생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뜻을 정해놓고, 부지런히 뜻을 이루기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복된 열매를 거두게 된다.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씨앗이 땅에 심겨졌다면, 그 속에서 자신을 쪼개고 발아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짐승들에게 먹히고, 짓밟힐 위험이 있어도 땅을 뚫고 나와야 한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내야 한다. 세월이 흘러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법이지, 하루아침에 마음먹은 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땀 흘림의 노동이 필요하고,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하다.
“의인은 거짓된 말을 미워하지만 악인은 역겹고 파렴치하게 행동한다”(5). 거짓된 말은 우리 안에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을 더 감추려고 나오는 행동이다. 어느때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데 이 역시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낳게 하는 경우가 있다. 거짓말은 사람을 홀리게 하기에 마귀의 장난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가 될 자격을 받게 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미움을 받고, 저주를 받는 자들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의인들은 당연히 거짓말을 미워한다. 거짓말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런 말이 있다. “거짓말로 자기를 과장합니다. 거짓말로 남을 깍아 내립니다. 거짓말로 위기를 넘깁니다. 거짓말로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거짓말로 충성을 약속합니다. 거짓말을 퍼뜨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해악을 끼칩니다. 거짓말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는 지옥입니다.”
“정의는 사람의 길을 흠 없이 지켜 주지만 불의는 죄악으로 빠져 든다”(6).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사회에서는 정직한 사람이 보호받고, 잘 되는 사회이다. 대신 정직한 사람이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를 받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가 되고 만다. 정직한 자가 고통을 받고, 불의한 자들이 판을 치는 사회에는 심판과 패망이 따르게 마련이다. 공공질서와 도덕이 무너지고, 모두가 불안한 속에서, 자기 이권을 찾기에 혈안이 된다. 결국, 모든 사람이 불안한 가운데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정의뿐 아니라, 사회의 정의를 책임지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가 사라진 사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회에서는 물질이 우상이 된다. 물질 숭배 사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허례허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식적인 삶을 살아간다. 당장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명품만을 찾고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잊은 채, 거짓 인생을 산다. 그런 인생을 우리는 짝퉁인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실력자들은 허황되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고 겸손함 속에서 참 자유를 얻는다. 거짓 위에 인생을 건설한 사람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부끄러운 열매를 거두게 되고 말 것이다.
“의인들의 빛은 흥겹게 빛나지만 악인들의 등불은 사위어 간다”(9). 의로운 사람의 빛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다. 소망의 등불이며, 위로의 등불이다. 악인도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는 환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이든 악이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난다.
악인의 형통이 때로는 진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악인들의 형통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한다. 단편적인 눈으로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인내하며, 하느님께만 기준을 두고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만은 싸움만 일으키지만 충고를 듣는 이들에게는 지혜가 있다”(10). 교만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지어 부모님이나, 스승의 말도 무시한다. 오직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모든 사람들과 다툼을 일으키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경청한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경청(傾聽)이란 단어는 재미있는 단어다. 경(傾)이라는 단어는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인데, 풀어보면 세 가지 단어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사람 인(人) + 비수 비(匕) + 머리 혈(頁) = 사람의 정수리에 비수를 꼽는 것이다.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과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청(聽)이라는 단어는 “듣는다”라는 뜻인데, 무려 6개 단어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귀 이(耳) + 임금 왕(王) + 열 십(十) + 눈 목(目) + 한 일(一) + 마음 심(心)이다. 임금의 귀와 열 개의 눈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온 마음을 다하여) 듣는 것이다. 그러니 경청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스승, 친구,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습관을 들인 사람들은 뛰어난 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자기 혼자 잘난 사람들은 결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 그런 사람들은 망하고 만다.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은 생명의 나무가 된다. ”(12).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희망이 늦게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만 하지 않고, 인내를 가지고 희망을 굳게 잡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에 귀기우리자.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야고 1,2-5).
어떻게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 먼저 지혜로운 사람들과 동행해야 한다 “지혜로운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지혜로워지고 우둔한 자들과 사귀는 자는 해를 입는다”(20). 그리고 지혜는 밭을 경작하듯 지혜를 구하며 경작해야 한다. “높은 자들의 개간지는 많은 양식을 거두지만 불의에 휩쓸려 사라질 수 있다”(24). 24절에서 높은 자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머리들의’라는 말로 ‘가난한 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매를 아끼는 이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벌로 다스린다”(24).
잠언 14장 지혜로운 여인이 자기 집을 세움
잠언 14장은 지혜로운 여인이 자기 집을 세운다는 것이 주제이다. 집은 오이코스, 우주라는 개념도 있고 공동체의 개념도 있고 가정이라는 의미도 있다. 남자는 능력으로 집을 세우고 여자는 현숙함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집을 세운다. 남자, 여자라고 하는 성적인 의미 보다 동양적으로 보면 음과 양의 합일을 통해서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남자의 능력과 여자의 영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공동체이다. 남자는 생명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기능적으로 남자가 하는 일과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14장은 현숙한 여인이 어떻게 집을 보전하고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집을 지어본 사람들이 집을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것처럼 순서가 있다. 일의 순서가 굉장히 중요하고 순서를 통해서 생명을 어떻게 보전할 수 있을까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고독의 자리에서 홀로 있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어 주셨는데 하와는 남자의 심장을 감싸는 갈비 뼈로 만들어진 돕는 베필이다.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인데 한 몸에서 나오는 하나의 기능이 돕는 베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돕는 자를 통해서 어떻게 생명이 보전될 수 있을까? 하는 지혜로운 여인이 집을 세우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자녀교육이 이루어진다. 현숙한 여인이 어떻게 집을 세울 것인가?
“지혜로운 여자는 집을 짓고 미련한 여자는 제 손으로 집을 허문다”(1). 지혜로운 여자가 집을 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14장에서 찾아보도록 한다.
첫 번째, 주님을 경외함이다. “바른길을 걷는 이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릇된 길을 걷는 자는 주님을 업신여긴다”(2). 현숙한 여인의 첫 번째 태도는 신앙이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모든 생활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가족이 모여서 밥을 먹을 때는 어른들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반찬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나니까 아이가 원하는 반찬을 준비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부인이 원하는 반찬을 만들어먹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옛날에는 아무 능력도 없고 별 볼일 없고 무능력해도 아버지가 집안에서 우선순위였다. 그런 것처럼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 경외함이다. 하느님 앞에서 경외함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물질이든 관계든 여러 가지 속에서 자기중심적인 모습들이 있다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을 우선순위에 둔다든지, 물질을 우선순위에 둔다든지, 자존심을 우선순위에 둔다든지, 자신의 감정을 우선순위에 두다보니까 하느님도 자신이 기쁘고 좋을 때 하느님이지 기분 나쁘고 열 받으면 하느님이 없는 것이다. 또는 자식이 잘 되면 하느님이 있고 자식이 안 되면 하느님이 없다.
그리고 삼가 조심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른들의 눈치를 본다고 얘기하는데 너무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너무 눈치가 없는 사람도 있다. 너무 눈치가 없을 때 버릇없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의미에서의 눈치가 아니라 삼가 조심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한다할지라도 그것이 혹시 하느님의 어긋남이 없지는 않을까 늘 묻는 것이다. 삼가 조심한다는 것이 묻는 것이다.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옳은 것 같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해야 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경외함은 정직함이다. 정직함이라는 것은 나를 보는 눈이다. 내가 하느님 안에서 연약한 사람이고 주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내가 온전한 것을 세울 수 없다고 하는 이 정직함이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게 한다.
“미련한 자의 입에서는 교만이 싹트지만 지혜로운 이의 입술은 그를 지켜 준다”(3). 정직하게 얘기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교만은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거짓의 태도가 교만으로 나타난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말끔하지만 황소의 힘을 빌려야 소출이 많아진다”(4). 주님을 경외함으로 정직해지면 내가 찌질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 찌질함이 하느님 앞에 다가갈 수 있는 생명의 힘이 된다. 그런데 그 찌질함을 없애려고 자꾸 노력하고 노력하는데 소가 없어야 구유가 깨끗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가 살아있으면 늘 밥통이 더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은 늘 불결하고 생명은 늘 갈등이고 생명은 늘 문제투성이다.
교회 공동체가 평화롭다면 어쩌면 죽었다는 것이다. 가정이 마냥 평화롭다고 하면 죽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 안에서 늘 문제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평화로움은 있다. 그 평화로움이 내면의 평화이지 외적인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외부의 문제는 늘 있을 수 있다. 잠잠함이 내면의 잠잠함이면 괜찮은 것이고 외적인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은혜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정직함에 있다. 그런데 교만한 자는 문제가 없는 척하고 살든지 아니면 문제에 눌려서 죽을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둔한 사람 앞에서 떠나가라. 거기에서는 지식의 말을 배우지 못한다”(7). 경외함은 터이고 말은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터는 잘 닦아 놨는데 기둥이 없으면 지붕을 올리지 못한다. 지붕을 올리기 위해서는 기둥이 있어야 되고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진다. 기둥이 말이다. 우리는 말부터 바꿔야 한다. 누가 은혜 받은 사람이냐? 누가 능력 있는 사람이냐? 누가 현숙한 사람이냐? 하면 말이 바뀐 사람이다. 말로 다 까먹는 사람이 있다. 기둥을 세워야 되는데 기둥을 못 세우니까 지붕을 올릴 수가 없다. 지붕이 안 올라가니까 매일 터만 닦고서 비 맞고 눈 맞고 있다.
집은 안식의 의미가 있다.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자리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씨를 주셨는데 그 씨가 자라나서 나무가 되고 나무가 생명을 보전해서 열매를 맺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씨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무가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무가 맺는 열매가 반드시 좋은 열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집은 생명이 자라나는 곳, 생명을 보전하는 곳, 생명이 안식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기둥이 없거나 지붕이 없으면 비나 눈이나 바람, 모든 것을 겪어야 한다.
“마음만이 제 자신의 아픔을 알고 그 기쁨도 다른 사람은 나누지 못한다”(10). 우리의 관계는 마음의 문제에 있다. 말의 근원이 마음이다. 말이 마음의 밀고자이다. 말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말 자체가 마음이다. 말과 마음이 다른 것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A와 B가 대화를 하는데 A가 a’를 B에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b’라고 얘기한다. B는 그것을 c’로 듣고 d’로 말을 한다. 완전히 동문서답이다. A는 B에게 왜 a‘를 모르느냐고 따진다. 중요한 것은 잘 말하고 잘 듣는 것인데 a’를, 사실을 정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들킬까봐 사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기 싫은 것인데 그렇다고 말하기 두려워서 여러 가지 다른 얘기를 한다. 듣는 사람은 하고 싶은데 여러 가지 다른 문제로 못하는 것인 줄 알고 해결해 주려고 한다.
남자들은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하면 해결방법을 제시해주려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 어떤 심리학자가 남자와 여자의 대화방식의 다른 점에 대해 강의를 했다. 여자가 신도림역에서 영숙이를 만났다고 남자친구에게 얘기를 하면 남자는 대뜸 그래서? 라고 반문을 한다. 그런데 똑같은 얘기를 여자 친구에게 하면 그랬어? 어머나! 신도림에서 영숙이를 만났구나! 하면서 바로 공감해주는 반응들을 한다고 한다. 남자들은 왜 만났는지 만나서 어쨌다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고 여자들은 만났다는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남, 녀의 성향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계속 다른 얘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마음이 빗나간 자도 제 행실의 결과로 채워지고 착한 사람도 제 행동의 결과로 채워진다”(14). 마음이 굽으니까 말도 비뚤어지게 나온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어떤 것을 바라볼 때 마다 시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것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어수룩한 자는 아무 말이나 믿지만 영리한 이는 제 발걸음을 살핀다”(15). 마음이 굽으니까 듣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 본당에 있을 때 행사를 마치고 교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준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맛있게 먹어놓고 본당신부가 돈이 많아서 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의를 베풀어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말 자체가 다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서 진실한 말을 찾아내고 분별해야 되는 것이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 사람이고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악을 꾸미는 자들은 반드시 길을 잃게 되지만 선을 꾸미는 이들에게는 자애와 진실이 따른다”(21).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 교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기준을 공동선이라는 기준을 갖고 살도록 한다. 혼자만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선의 가치를 갖고 살아가도록 한다. 그래서 이웃을 업신여기는 행위는 죄를 짓는 것이며,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보이는 것이 서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자애는 용서함이다. 진실은 기준이다. 자비와 기준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무조건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받아주면서도 정의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무조건 받아주는 것도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물질이 많고 적고, 물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을 공동선의 관계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잠언 15장 말의 절제, 말의 조절 등 말에 대해 이야기
말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에서 잘 드러낸다. 다른 종교에서는 말이 아닌 행위에 대해서 소위 정성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하고 침묵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 말씀의 종교이다.
요한복음서를 말씀이란 영이라고 한다. 그 당시 헬라인들에게 이해되어지는 로고스라는 진리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만 히브리적인 사고에서는 말씀 그 자체가 사람인 것처럼 말씀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생명의 본질이다. 소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말씀으로 보이는 것이다. 본질과 가까운 것이 아니라 말씀이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입니다.
마음의 말이 있다. 드러난 7%의 말만이 아니라 93%의 표정의 말을 비롯한 영혼의 말이 있다. 그 말이 본질이다. 그리고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말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가 같은 것이지만 말씀은 원리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라면 기도는 현실 속에서의 실재이다. 지혜와 명석함과 교훈이 있다면 지혜는 본질이고 명석함은 그 때 그 때 사건과 상황과 사람 속에서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경험되어졌던 축적된 지식이 교훈이다.
그리고 말씀이 적용이라는 실재로 우리에게 온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몸으로 경험되어지는 교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말은 말씀, 기도, 적용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를 말한다. 기도는 변화를 갖도록 하는 것으로 진리가 우리 가운데에서 변화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적용, 실재이다. 이것을 하나로 본다면 말씀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쾌한 말은 화를 돋운다”(1).
우리가 무엇을 말할 때 그 반응이 있다. 자극을 주면 반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상태이다. 죽은 사람은 자극을 줘도 반응하지 않는데 산 사람은 자극을 줄 때 마다 반응한다. 어떤 사건과 상황을 들이 댔을 때 욱하고 반응이 나온다면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상태이고 수준이다. 어떤 소리에 반응하고 어떤 사건에 반응하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사건에 반응을 한다면 그 사람이 그런 것이다. 아이들은 1차적인 반응을 한다. 편하고 쉬운 것을 찾고 몸이 가진 자극에 민감하다. 그런데 어른일수록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 신앙의 성숙, 인생의 성숙에 있어서도 내가 어떤 것에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 상태를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지식을 베풀지만 우둔한 자들의 입은 미련함을 내뱉는다”(2).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다. 사람은 다 미련하다. 그런데 내 마음에 살리신 영이 있으면 그 영이 내 마음을 자극해서 내가 지혜롭게 되는 것이다. 그 살리신 영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을 따라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살리신 영이 없거나 살리신 영에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사건과 상황과 사람의 얘기만 듣는다. 그래서 거기에 바로바로 반응하면 미련한 상태가 된다. 바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이 말씀인지, 또는 살리신 영에 맡기고 사는 것인지를 봐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다고 인정하는 자이다. 어리석음이 지혜이다. 누가 미련한자냐 하면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하느님 안에서 지혜를 가질 수 있는 자는 살리신 영에게 마음을 드린 자이다. 우리는 마음이 악의 경향으로 이우어져 있기 때문에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내 몸을 따라 살려고 하는 소욕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으로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미련한 자이고 어리석은 자이고 죄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자이다. 살리신 영에게 ‘제발,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하는 자이다. 이런 행동이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와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다르다. 하느님 앞에서의 지혜는 어리석은 마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고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을 위임하고 위탁해야 한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말, 육의 말을 한다. 그런데 내 안에 살리신 영에게 위임하고 위탁하면 영의 말을 하게 된다. 영에게 위임하고 위탁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위임하고 위탁하면 당연히 육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는 영적인 존재이다.’ 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 존재 자체가 영적이다. 내 몸이 원래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수 있는 몸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몸으로 영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영으로 육을 지배해야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3). 하느님의 전지전능 교리에 대한 훌륭한 증거분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은 선과 악 그리고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신다. 만약 당신이 선하다면 당신은 이 사실에 위안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악하다면 반드시 이 사실에 위험을 느낄 것이다. 주님의 눈은 항상 어디든지 살피신다.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혀는 생명의 나무지만 사악한 혀는 정신을 파탄시킨다”(4).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의 의도와 목적은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떤 때는 장성한 어른처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태가 아니라 의도,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은 항상 사랑의 의미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사랑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생명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아주 분명하다. 하느님은 인격적이라는 것은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4절에서 ‘사악한 혀’는 구약에서 단지 2번 나오는 드문용어이다. ‘파탄시키다’라는 동사는 잠언에서 4번 그리고 다른 곳에서 3번 나타난다. 이 구절은 타인을 치료하가 상처주는 현의 영향력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성경은 아첨 혹은 부정직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잔인하지 않아야 하고 친절해야 함을 이 구절은 말한다.
“미련한 자는 아버지의 교훈을 업신여기지만 그 훈계를 지키는 이는 영리해진다”(5).
5절은 성국한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훈계를 포함하는 앞선 장들의 잠언들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잠언은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다. 즉 아버지는 연장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가 그의 아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가치있는 훈계이다. 오직 미련한 자만이 그것을 무시한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부모의 훈계를 따른 것이 좋은 생각이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쌓이지만 악인의 소득에는 불행만 따른다”(6).
관계 속에서 생기는 보물은 풍성함이지만 관계가 없이 자기 혼자 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소득 자체가 고통이다. 신약에서 말한 불의한 청지기가 그런 것이다. 실적 없는 종에게 주인이 청산하려하자 불의한 청지기가 사람들에게 가서 빚을 탕감해준다. 그랬더니 주인이 잘했다고 칭찬했다. 왜냐하면 빚을 탕감해주니까 주인의 평판이 좋아졌고 불의한 청지기에게는 사람이 생겼다. 미련한 자는 관계를 다 끊는다. 그런데 슬기로운 자는 관계를 가능하면 끊지 않으려고 열어놓는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것이다. 어느 한 랍비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지에게 열려지지 않는 문은 의사에게 열려질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만약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질병이나 재난으로 의사에게 치료비를 지불할 일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이들의 입술은 지식을 전하지만 우둔한 자들의 마음은 바르지 않다”(7).
지식은 기준인데 정함이 없다는 것은 기준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사람한테 이 말 하고 저 사람한테 저 말을 한다. 사람이 어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 거짓말을 다른 사람에게 또 얘기하려고 하니까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거짓말이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진짜라고 자기 스스로 인정한다. 이것이 망상이다. 사막에서 보는 신기루처럼 사실이 아닌데 자기가 사실을 만든다. 그래서 물이 아니라 모래를 먹게 된다. 망상이 굉장히 무서운 것인데 자기가 한 거짓말을 진짜로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간다. 망상이 지나쳐서 진짜로 아니까 호르몬이 바뀐다. 마음이 바뀌니까 몸도 바뀌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식을 전파한다. 미련한 사람들은 다른 것, 횃불이나 화살 또는 미련한 것을 쏟아놓는다.
“악인들의 제물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꺼워하신다”(8).
제사를 아무리 잘 드려도 본질이 잘못되어 있으면 소용이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얘기를 해도 마음이 흐트러져있으면 다 사람 죽이는 말이다. 그것이 ‘천사의 말’이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즉 주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을 살리는 말, 생명의 관계를 하는 말을 해야 한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갔던 교회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생일축하 한다고 노래를 불려주는 사람은 많은데 아무도 전도연의 삶에 대해서,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송강호만 전도연 에게 관심 있다. 교회도 전도연 때문에 다니고 주차봉사도 전도연 때문에 한다. 형식은 없지만 그 안에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있다. 정신병원에도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거짓말도 안 하는데 사실은 자기 밖에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기가 얼마나 슬픈지, 왜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못 받고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누가 나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나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자기 에게 나쁜 짓을 하면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상처받고 다시 또 작아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에게 잘해주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정상적인 관계를 할 수 없다고 결정한다.
사람들이 상처받았다고 하는 말은 다 어렸을 때 받은 것이다. 단지 어른이 돼서 같은 일을 겪으면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가정 안에서 자란 아이는 상처를 다 받지만 그래도 그 가정 안에서 기본적인 사랑을 받았다면 나중에 펌프질 할 수 있는 힘은 생긴다. 이것이 기본적인 신뢰감이다. 힘들고 어렵고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집에 가면 널브러질 수 있는 신뢰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 올곧은 기도는 서로의 관계 회복을 위한 에너지이며 주님께서는 이것을 사랑하신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13). 말이 마음이고 말이 정직하고 정의로워야 마음도 그렇게 되고 얼굴도 예뻐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서 얼굴에 빛이 난다. 따라서 얼굴은 감정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얼굴 표정에 대한 민감성은 신부, 교사, 상담가 등에 의해 추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던지간에, 그의 내면에 있는 것이 자신의 얼굴에 나타날 것이다.
“사랑 어린 푸성귀 음식이 미움 섞인 살진 황소 고기보다 낫다”(17). 가장 좋은 고기는 부자의 식탁에 오르는 반면, 채소는 가난한 이들에게 일상적인 음식이다. 메뉴는 당연한 것이라고 잠언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와 함께 먹느냐이다. 당신이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던지 혹은 당신을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던지의 문제가 중요하다. 당연히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음식과 그것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들을 갖는 것이다.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고 분노에 더딘 이는 다툼을 가라앉힌다”(18).
18절은 인내 혹은 성급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툼’을 가리키는 단어는 거의 잠언에서 독점적인 단어이다(18번에서 15번이 나옴). 분을 쉽게 내는 자는 급한 성미를 가졌고, 쉽게 화내고, 싸우지 않고는 못 견딘다. 한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참을성이 있고, 인내심이 강하고, 평온함을 지닌다. 긴장을 풀어주는 자가 긴장을 더하는 자보다 낫다.
“게으름뱅이의 길은 가시밭 같지만 올곧은 이들의 앞길은 잘 닦여 있다”(19).
‘가시밭’은 게으른 자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들을 묘사한다. 성경에는 이 단어들이 단지 2번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의 정확한 뜻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19절이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을 가르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우, 적절한 길을 떠남으로써 처음부터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게으른 자들은 계속해서 일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발견한다. 즉, 가시밭이 그의 길을 방해한다. 대조적으로 정직한 자는 열심히 일함으로써 준비를 잘 해왔다. 그가 여행하는 길에서 그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길에는 장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길은 앞길이 잘 닦여져 있다.
“사람은 자기의 올바른 대답으로 기쁨을 얻으니 알맞은 때에 나오는 말이 얼마나 좋으냐!”(23).
지혜자들의 때에 맞는 말은 가치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23절과 함께 하는 절들은 잠언 23,16; 25,11이다. 여기에서 잠언은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 올바른 말과 올바른 때는 중요하다. 올바른 말이라도 적절치 않을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남편이 죽은 후 미망인에게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때이다. 그녀를 배려하긴 커녕, 시기적절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은 감정적인 상처를 줄 것이다.
반면, 알맞은 때의 잘못된 말은 또한 비참할 수 있다. 당신이 뭔가를 말해야만 하지만 적당한 말을 차지 못한 적은 없는가? 혹은 당신이 말해야만 할 때, 부적절한 말이라도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알맞은 때에 정확히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려 깊은 이는 위로 난 생명의 길을 걸어 아래에 있는 저승을 벗어난다”(24).
위로 향하는 것은 아래로 향하는 것과, 생명은 저승(스올)과 비교된다. 우리는 삶의 두 길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친숙한 주제로 돌아간다. 하나는 생명을 향하여 위로 가는 반면, 다른 하나는 저승(스올)으로 내려간다. 위로 향한 생명길이 저승을 떠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시편에 있는 말씀에 보면 눈을 들어서 산을 보라고 한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눈을 발 아래에 두니까 그것 때문에 계속 힘들고 죽을 맛이다. 정확하게 땅을 딛고 있는 것이지만 위를 향한 생명의 길을 보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고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영원한 시간 속에서 보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가끔 하늘의 별을 봐야 한다.
“반짝이는 눈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좋은 소식은 뼈마디에 생기를 준다”(30). 30절은 히브리 관용구 ‘빛나는 얼굴’을 포함하는 잠언 15,13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꺽인다”와 비슷하게 들린다. 30절은 ‘밝은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모습은 좋은 소식을 듣고 하느님과 사이가 좋은 사람에게 따르는 것이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그의 뼈를 윤택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이 절의 후반부는 말한다.
히브리 관용구는 그의 뼈가 지방으로 기름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우리가 솔로몬 왕국의 가뭄 상태를 떠올릴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된다. 땅의 메마름은 저주인 반면, 촉촉한 것은 축복이다. 생기를 주는 뼈, 즉 기름진 뼈는 그의 마음의 행복과 연결되지만 병과 가난은 건조한 뼈를 수반한다. 좋은 소식을 가져온 오랫동안 기다린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이 절이 묘사하는 행복의 일종이다.
“지혜의 교훈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33).
지혜는 주님을 드러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겸손이 하느님 앞에서 영광이 되는 길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온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겸손은 내가 인격적으로 대우 받고 대우해 주는 것이다.
잠언 16장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가르침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혀의 대답은 주님에게서 온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결백해 보여도 영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2).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이 원칙을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어떤 일이 어떤 결과를 낼지 사람이 결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첫째 해석은 전통적인 지혜에 속하는 것으로서 11장 19-21절이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상과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른바 인과응보 또는 상선벌악의 원칙이다. 따라서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를 안다.
둘째 해석은 첫째 해석과 다르다. 이것은 요셉 설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요셉 설화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나쁜 계획을 좋게 이끄시는지 묘사한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20). 요셉은 형제들이 세운 나쁜 계획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지만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의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그의 가족이 죽음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4-8). 이를 볼 때 하느님의 이끄심은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현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인과응보, 상선벌악의 원칙이 배제된다(욥 42,1-6 참조).
하느님은 자유로운 분이시며 따라서 그분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은 어디로 이끌려 가는지조차 모른다. 마치 농부가 마음대로 농작물에 물을 대주듯, 주님께서는 임금의 뜻을 마음대로 좌우하신다. 즉, 사람은 단순히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9). 사람의 계획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주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진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준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부족하게 계획했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우리들의 걸음을 이끄시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 놓는다.
구약 성경에서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군주나 정치가들의 마음을 좌우하신다는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파라오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기도 하시고(탈출 10,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정책이 그가 통치하던 유다인들의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다(이사 44,24-26). 주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할 계획을 심어 주시고(느헤 2,12) 다리우스 임금의 마음을 돌려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을 가능하게 해주신다(에즈 6,22).
“올바른 저울과 저울판은 주님의 것이고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그분의 소관이다”(11). 잠언 11,1 “속임수 저울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정확한 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이 구절과 유사하며, 두 구절 모두 하느님은 속이는 저울과 저울판을 미워하심을 말한다. 비록 솔로몬 시대에 “저울과 저울판”이 우리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단위나 측정 방식이 달랐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을 훔치도록 하게 하는 그러한 탐욕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마도 세금을 속이는 자들로 손해를 보는 가난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 말하는 “이중장부”도 성경이 말하는 ‘서로 다른 추’(잠언 20,10)이다. 그러한 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수천 달러를 훔치는 것보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서 1센트를 훔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잠언은 명백하게 그러한 행위는 잘못이라고 가르쳐준다. 하느님은 속이는 저울과 저울판을 혐오한다.
“상냥한 말은 꿀 송이 목에 달콤하고 몸에 생기를 준다”(24).
24절에서 상냥한 말은 꿀과 같은 두 가지 유익을 준다고 말한다. 꿀은 희소가치가 있으며, 달콤하고, 금과 같은 색을 지니고 있고, 정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바는 달콤함과 몸에 생기를 준다는 성질이다. 선한 말은 꿀과 같아서, 삶을 아르답고 건강하게 가꾸어 준다. 24절에 등장하는 ‘꿀 송이’라는 말은 여기 외에는 오직 시편 19,11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 의로운 길에서 얻어진다”(31). 31 절이 소개하는 백발이라는 말은 나이,명예,존경심에 대한 상징이다. 장수는 선한 삶의 보상으로서 잠언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백발은 장수 그 이상의 무엇을 나타낸다.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은 노인과 부모를 공경하고 섬겼다. 당시는 농경과 목축 사회로서 변화도 느렸고 발전된 기술 문명도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인은 젊은이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고 오래 사는 것은 곧 지혜의 축적이라 여겼다(욥 32,4-7).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32). 32절은 “보다 낫다” 형식을 갖춘 동의어적 평행이다. 자신의 노함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32절은 화를 다스려야 하는 것을 떠올려주지만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참지 못하는 혹은 그 일을 위해 부도덕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다. 그들 스스로를 다스리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다스리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33). 33절에서 하느님은 사람들의 사건들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알려준다. 아래까지 내려뜨리는 옷을 입고 앉으면 한복의 차마폭과 같은 부분이 생기는데 그 위에 제비를 던졌다.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는 방식이다. 우리가 제비를 뽑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의지가 지배한다. 우리는 여기서 제비뽑기의 여러 예들을 떠올릴 수 있다. 도둑질한 아칸의 제비(여호 7,16-20),단식기간 중 음식을 먹은 군인들과 요나탄(1사무 14,41-43),자신의 하느님께 불순종한 예언자 요나(요나 17),유다를 대체할 사도인 마티아(사도 1,23-26) 등.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은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는 제비뽑기를 사용하라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에 나는 동의한다. 오늘날 우리는 제비를 뽑을 필요도 없는 문제에서도 계시를 기다리곤 한다. 하지만 잠언은 많은 의논을 하라는 교훈도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잠언 11,14;15,22). 물론 어떤 상황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며,의견은 분열되고,믿는 자들이 기도 기운데 제비뽑기를 원할 때가 있다. 그때 하느님은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신다.
잠언 17장
17장은 미련하고 악한 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인생의 참된 길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17장 내용은 1, 2절과 27, 28절에 비중이 놓여 있는 양괄식 구성을 보여준다. 양괄식이란 글의 중심 내용이 첫머리와 끝 부분에 반복하여 나타나는 문장 구성 방식을 말한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뇌물로써 재판의 공정성을 깨뜨리며 다툼을 좋아하는 등 악행을 일삼는 자는, 새끼 빼앗긴 어미 곰보다 더 위험하고 혐오스럽다(12절). 따라서 그런 사람과 함께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조각의 떡만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또한, 지혜로운 삶의 비결 중 하나는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며 말을 아끼는 것이다(27절).
“편안하게 먹는 마른 빵 한 조각이 불화 섞인 잔치 음식으로 가득한 집보다 낫다”(1). 1절은 잠언 15,17과 매우 유사하다. 즉 함께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무엇을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 동일한 핵심 안엣 이것은 이웃에 관한 것이 될 수 있다. 화목한 이웃과 작은 집에서 사는 것이 주위에 적이 많은 궁전에 사는 것보다 낫다. 또한 이 교훈은 직업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적은 임금을 받아도 성취감을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많은 돈을 받고 날카로운 조건 속에서 일하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다. 만약 마음의 평안이 중요하다면 마른 떡 조각이 큰 문제가 될진 않을 것이다. 만일 성대한 상이 중요하다면 아마도 거기에 수반될 문제들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사려 깊은 종은 주인의 수치스러운 아들을 다스리고 그 형제들 사이에서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2). 오늘날 어린이들에게는 과분한 삶이 주어진다. 법적인 유산은 그것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용도와는 상관없이 주어진다. 자신의 땅은 그가 선택하는 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줄 수 있다. 어리다고 상속권을 박탈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은 거의 없지만 군주 시대에서는 그들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현재의 통치자의 가장 나이 많은 자녀가 미래의 왕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그들의 왕국을 어리석은 아들들에게 주고야 마는 지혜로운 왕들의 모습들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차라리 권력과 부가, 맨 처음 그것들을 습득한 자들과 비슷한 이념을 가진 자들에게 가는 것이 혈통적 상속에 의한 것보다 더 낫다.
“가난한 이를 비웃는 자는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자/ 남의 불행을 즐기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5). 5절에서는 타인의 불행,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어려움에 행복을 느끼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는 결코 가난한 자들의 불행을 조롱하거나 모욕하거나 그것을 기뻐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이 재앙을 당했을 때 그러한 것에 흡족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5절의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가 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포함한다. 전반부는 하느님은 가난한 자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후반부는 만약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한다면 동일한 일이 그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마음이 빗나간 자는 행복을 얻을 수 없고 혀가 비틀린 자는 불행 속에 빠진다”(20). ‘뿌린대로 거둠’의 주제를 가진 잠언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이 가르침이 나타는데, 아마도 충분히 반복될 만큼 우리가 순종하길 염원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절은 우리가 마음에 담은 바가 무엇인지 또한 우리의 혀에 있는 말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결정됨을 가르쳐준다. 빗나간 마음과 비틀어진 혀는 그저 불행과 어려움만 거거두게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은 건강을 좋게 하고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22). 어떤 의미이든지 잠언은 영적인 건강과 육체적 건강을 연결하는 진술을 한다. 즐거운 마음은 건강은 주지만 기가 꺽인 정신 즉 근심은 질병을 준다.
“말을 삼가는 이는 지식을 갖춘 사람이고 정신이 냉철한 이는 슬기를 지닌 사람이다. 미련한 자도 잠잠하면 지혜로워 보이고 입술을 닫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인다”(27-28).
27절은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하고, 그들의 입을 다문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은 자기통제력을 가진 지혜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28절)이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제력은 지혜로 보인다. 온 세상에 알려진 사실을 떠벌리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질문들을 하는 것 또는 상관없는 정보들을 내놓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의 무지를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을 갖춘 사람’라는 27절의 히브리 관용구는 ‘안정된 영혼’을 말한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