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든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는 것에 익숙해져가는 현대인들. 하느님의 존재도 애써 무시한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주는 편안함을 누릴수록 내적 궁핍과 근원적인 목마름을 피할 수 없다.
세속적인 가치들이 판을 칠수록
역설적으로 신앙적 가치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관상수도자들의 삶은 세속화된 현대인들의 일상과 쉽게 대비되곤 한다.
‘봉헌생활의
해’ 막바지를 보내며, 그야말로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된 삶’을 찾아 ‘가르멜 수도회 성 요셉 한국관구’ 안으로 들어갔다.
봉쇄 울타리
속
한국 신자들도 ‘가르멜’이라는 단어에서는
‘봉쇄구역’, ‘관상’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떠올린다. 어린이들도 가르멜회 아기 예수의 성녀의 삶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가르멜’ 영성
혹은 관상생활에 관해서는 어렵다는 말로 대답하기 일쑤다.
대신 봉쇄 구역 안에서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온종일 무얼 하는지 등의 질문들을 쏟아낸다. 기자 또한 질문들을 한 짐 지고 수도원을 찾았다.
‘수녀님’(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하는 가르멜 남자
수도자들과 달리, 봉쇄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여자 수도자들은 대외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과의 긴 대화는 유쾌했다.
이미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듯 맑고 환한 ‘수녀님’의 표정은, 관상수도자들의 모습은 엄숙하다 못해 다소 무거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단숨에 없애버리기 충분했다.
각자 다른 방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고 그 사이엔 격자가 있었지만, 대화의 걸림돌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기자 혼자 간식을 대접받으며 대화하는 것이 민망할 따름이었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정해진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피정의 집이나 영성센터 외엔 기자와 같은
외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수도원 내 구역은 한정적이다. 외부 전화에 응대하고 이메일을 확인하는 수도자들도 일부로 정해져 있다. 신자들과
함께하는 공동 전례도 수도자들은 격자 너머에서 봉헌했다.
시대가 바뀌고 긴긴 시간이 흘렀어도 봉쇄의 삶은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은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창살 너머 있는 봉쇄 구역이 고립된 외딴
섬은 아니다. 단순히 수도자들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벽을 친 것도 아니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내적 자유를 얻고자 봉쇄의 삶을 선택했다.
세상과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생활은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것들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봉쇄의 삶은 바로 하느님만으로 충분히 충만한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시이다.
매순간 순간을
봉헌
“봉쇄 구역 안에서 어떻게 사는지, 하루 일과가
어떤지 궁금하시죠?”
서울가르멜수녀원의 수녀님은 자주 들었던
질문이라면서 먼저 일과표를 내밀었다. 새벽 기상 후 첫 일과는 아침기도와 미사. 묵상기도와 3시경을 바치면 아침요기와 청소 후 제병 만들기 등의
소임을 이어간다.
다시 6시경 후엔 점심식사와 휴식, 영적독서를 한다. 9시경을 바치고 소임일을 하면 저녁기도와 묵상기도. 저녁식사 후 잠시 휴식을 거쳐 끝기도와 성체조배, 독서기도까지 봉헌하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미사와 하루 7번의 성무일도,
2시간의 묵상기도, 1시간의 영적독서를 제외한 모든 일과는 각자 침묵 안에서 하느님 현존 수업을 실천하고 각자 맡은 소임을 다하는
시간이다.
가르멜 수도자들에게 끊임없는 기도는 생활의
기초이자 첫째 의무다. 또 기도생활 안에서 실천하는 노동은 수도자들의 생계 수단의 차원을 넘어 내적 삶에 평형을 이루도록 돕는다. 관상생활을
더욱 균형있게 해주는 필수요소라는 설명이다.
가르멜 여자 수도자들이 오롯이 기도로써 봉헌의
삶을 살 때, 남자 수도자들은 관상의 삶을 바탕으로 세상에 나가 하느님을 전파하는데 힘을 쏟는다. 같은 영성과 카리스마를 공유하는
관상수도회이면서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이다.
한국 가르멜 남자 수도자들은 외적 활동으로 피정
지도와 신자 면담, 고해성사, 영성 강의 등을 펼치고 있다. 특히 서울 ‘가르멜 영성 문화 센터’에서 영성 일반 과정과 청년 신앙 피정, 침묵
피정 등을 상설 운영 중이다.
올해 맨발 가르멜회 창립자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 탄생 500주년을 보내면서 주요 도시 순회 영성 강좌를 열고, ‘가르멜 총서’ 발간에 박차를 가하는 노력도 주목할 만한
활동이다.
관상생활을
실천
가르멜 수도자들의 관상생활, 즉 기도는 개개인의
성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쇄신과 세상 복음화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드러낸다.
세속적인 모든 생활을 끊고 오로지
기도 생활에 투신하는 수도자의 모습은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드러낸다. 때문에 교회 역사 안에서 관상수도자들의 삶은 늘 필요로 했고,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대전가톨릭대 영성신학 교수로 활동 중인 가르멜회
한국관구 윤주현 신부는 “기도를 통해 더욱 온전히 영성생활에 투신하는 것이 관상수도자들의 삶의 내용”이라면서
“신앙적 가치를 세속적 가치와
상대화시켜 버리는 세상 안에서, 관상생활은 하느님을 온몸으로 증거해 교회에 영적 힘을 불어넣고 개개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주는데 큰 힘이
된다”고 전한다.
가르멜회 한국관구 수련장 김형신 신부도 “가르멜
수도회는 하느님을 관상하고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즉 회개를 향한 외침을 대신하는 역할을 인식하고 교회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매일 주님 앞에서
묵상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자아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면서 관상생활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변화에 대한 결심으로 매일매일 걸어가는
쇄신의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한국교회의 영적 기둥으로 탄탄히 자리잡고 있는
‘가르멜 수도회 성 요셉 한국 관구’의 모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완화된 가르멜회를 개혁해 세운 ‘아빌라의 성 요셉 가르멜 수도원’이다.
1940년 서울여자가르멜수녀원이 공식 설립된 이후 한국에는 대구와 상주, 부산(현 밀양), 대전, 충주, 고성, 천진암 등 8개 수녀원이 자리를 잡았다.
또 서울수녀원은 캄보디아에 가르멜수녀원을 진출시키기도 했으며, 현재 동두천가르멜수녀원 설립을 진행 중이다.
남자 수도회는 대구와 인천,
마산, 광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공동체를 두고 있고, 서울 관구 본부에서 ‘가르멜 영성 문화 센터’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