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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시조는 지금으로 1333년 전인 서기 66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에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나당연합군 (羅唐聯合軍)의 일원으로 대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원정(遠征) 나온 당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가 백제 평정 후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벼슬하면서 태종무열왕으로부터 백제 평정의 공으로 연안백(延安伯) 작위에 봉(封)해 지고, 식읍을 받아 연안(延安)에 적을 두어 연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순조 21년(서기 1821년) 충북 괴산에 살던 연안이씨 후손 월계(月溪) 이문우(李文愚) 라는 분이 시조의 묘소에 관한 소문을 좇아 황해도 연안을 수차 왕래하면서 연안부 서편 비봉산(飛鳳山) 옥녀봉 (玉女峰) 아래 은일동(隱逸洞)에 있는 고총(古塚)에서 「延安伯李茂」라고 음각(陰刻)된 길이 약 1척(尺)의 묘지석(墓誌石)을 발굴하여 그 실물과 발굴 경위 일체를 자세히 적은 「신사삼월초삼일 서행전후사일기 (辛巳三月初三日 西行前後事日記)」 원문이 월계공 5대손 이동훈집에 전해 내려오다가 연안이씨 대종회에 헌납하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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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당 이시담(四友堂 李時聃) 墓所
(이시담 묘소)
四友堂 李時聃 墓所는 대전 현충원 내 제1장군 묘역 우측 능선에 있다.
이시담(李時聃,1584~166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延安이며 자는 현충 . 자현(玄忠. 子玄)이고 호는
四友堂으로 延平府院君 李貴의 아들이다.
광해군 5년(16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유생으로 있으면서 1623년 인조반정에 아버지 이귀와
형 시백과 함께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延豊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대전현충원 제1장군 묘역 우측 능선에 있으며 호석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문인석 망주석이 있으며,
고종 5년(1901)에 세워진 비는 개석은 단조롭고 비석은 문양이 없어 조금은 투박한 느낌이다.
墓碣銘은 `四友堂延安李公墓`로 10대손 병서가 썼고, 송준길이 비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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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오후ㅡ
西大田고속도로를 통해 안영나들목을 나와 대전방향에서 食事를 했다. 구수한 동탯국에 약간의 시장기에 한잔
술은 최고의 맛이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라 했던가 ?.
오후 답산지 중구 무수동 有懷堂 權以鎭 고택 및 묘역을 향해 출발.
안영나들목에서 대전방향으로 5분 정도 달리다 다리를 지나 15분 정도 달리니 보문산 서쪽, 산성동을 지나 대전
동물원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작은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으로는 뿌리공원이 살짝 모습을 감추고 있고, 유등천을
거슬러 길이 이어지는 짧은 내리막길이 왼쪽으로 난 작은 길 입구에 ‘무수동 유회당, 여경암, 구완동 청자 가마터’
안내판이 장승처럼 찾아오는 나그네를 반긴다.
無愁洞 !. 과연 근심 걱정이 없는 마을이란 말인가?. 유회당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경사진 곳에 있다.
(유회당 전경)
有懷堂은 조선시대 영조 때 유회당 권이진(權以鎭)이 찬성공(贊成公) 권유(權惟)의 산소를 정한 후 지은 건물
입니다.
조선 英祖 때 戶曹判書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이 건물 뒷 산에 있는 부모 찬성공 권유
(贊成公 權惟)의 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독서와 교육을 하려고 1714년(숙종 40)에 지은 것이다.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무수동 마을 찬성공 묘소 아래 別墓와 三近精舍를 짓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시묘를 하면서 자손들에게 강론을 하고 독서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마을 둘러보기)
유회당 당사(有懷堂 堂舍)는 숙종 34년 선생이 부모를 흠모하여 마련하면서 시인 전겸익의 “明發不寐 有懷二人”
이란 싯구에서 잠 못 이루며 부모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유회당(有懷堂)이라 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찬성공 묘소 아래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선생이 숙종 33년 侍墓살이를 위해 마련하였는데 친산과 꽃동산, 물과
수석이 가까이 있다고 선생의 하거원기(何去園記)에 전하고 있다.
아울러 좌측으로 별묘(別廟)를 세워 두 분의 신위를 모셨다.
별묘 좌하로 숙종 41년에 세운 여경암(餘慶菴)과 거업재(居業齋)(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8호)가 있는데 선생이
자손과 후학들의 학문을 연마하도록 마련하였으며 여경암에는 승려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有懷堂)
(有懷堂)
묘소 낮은 야산 기슭에 사괴석(四塊石 : 한 사람이 네 덩이를 질 만한 돌)담장으로 일곽(一廓)을 만들고 서남향
으로 배치하였다.
대문 안에 연지(蓮池)가 있고 후면에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유회당(有懷堂)을 건립하였는데 그 목적은 부모
묘소의 첨배소(瞻拜所)로 제사를 지내고 독서와 강의를 하는 장소로 쓰고자 세운 건물입니다.
(왼편-別墓 * 오른편-三近精舍)
有懷堂은 다른 곳보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구릉지에 배치되어 집으로 오르도록 계단을 놓아두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연못 가운데를 지나 유회당으로 진입됩니다.
유회당 후면 남측에 'ㄱ'자 평면의 조그만 三近精舍가 있고, 북측에 장판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3동의 주위에는 담을 둘렀습니다.
(三近精舍)
1715년 유회당 뒤편에 세운 三近精舍는 부모의 묘가 가깝고, 담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가까우며, 산에 심은
꽃들이 가깝다는 뜻이다.
뒤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원주(圓柱)를 세운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사당이었으나
지금은 판각(板閣)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장판각(藏板閣)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중 선조의 문집과 유회당
문집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藏板閣)
유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정면과 양 측면에 각각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습니다.
팔작지붕에 무고 주 5량 집 구조입니다
정면, 좌우의 퇴칸을 제외하고 전체가 여덟 칸 집인데 가운데 4칸은 대청마루로 좌우 측의 각 2칸씩은 온돌방
을 두었다. 좌측 온돌방은 '구시제(求是齊) 우측은 '불기제(不欺齊)'라는 현판이 달렸습니다.
어지러운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옳음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행정 관료이자, 부모에 대한 한없는 효심을
행동으로 보여준 유회당 권이진 선생. 오늘 그가 효행정신의 표상으로,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새롭게
태어나 오늘의 세태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회당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ㅡ 全義縣監 권유(權惟) 묘소 ㅡ
호 여옹(旅翁) 우암 송시열의 사위이며 全義縣監, 공주 진관 병마 절제 도위 등을 역임하였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도총관에 추증됨.
(有懷堂 父 全義縣監 권유(權惟) 묘소)
(유회당의 長子인 通德郞 권형징(權泂徵, 1694∼1755) 묘소)
당대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직분과 남다른 처세를 보여준
선비이자 40여 년간 어버이 墓所를 지키고자 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孝心을 담았던
有懷堂 權以鎭 선생의 향기가 배어나는 곳이라 떠나는 나그네의 옷깃을 잡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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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安東權氏 有懷堂 宗家 ㅡ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이 처음 터를 잡았던 유회당 종가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88년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에 옮겨 지은 것이다.
이 가옥은 보문산 남쪽을 배경으로 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산과 내를 벗하여 생활함으로써 청결하고 참된 선비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생활철학이 담긴 것이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규모를 작게 하고, 건물 간의 사이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한 유회당 종가는 낮은 잡석 기단
위에 구성한 ㄱ자형 안채의 온건함, 아담한 크기의 사당, 마을 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모정, 그리고 자연공간과 어울린 정원 등이 다양한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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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채 신채호 선생 생가지(丹齋 申采浩 先生 生家址)
(마을 입구 선생의 遺墟碑)
유회동 마을 입구에서 금산가는 도로를 따라 6km 정도 달리면 왼편에 웅장한 金山으로 둘러싼 한적하면서도
힘찬 기맥을 느끼는 배산임수의 아담한 초가집이 방문객을 반긴다.
대전 중구 어남동 233번지. 이곳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이 태어나 8세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午睡에 잠긴 丹齋 선생님 댁)
선생은 이곳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북 청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19세 때 成均館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을사늑약 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운동과 민족의식고취를 위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항일비밀단체인 新民會 사건에 연루되어 191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旅順 교도소에 갇혔다가 57세 되던 해인 1936년 2월 21일 獄死하였다.
(무얼 그리 보시나요, 멍 멍멍 )
(丹齋精舍)
(東 西 南 北을 둘러보는 회원들)
(太風회원님들 生家도 둘려 보시고, 어디 멋진 폼으로 한판 찍어 볼까요.)
*초입에 세운 선생의 동상이 시대적 기상을 일깨워주려는 듯 발길을 멈추게 하는구나 !. 읽고 또 읽으면****
오늘도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답산 하시느라 수고 많으신 太風회원들 이제 답산 시간이 서서히 끝나 갑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6월 답산은 보훈의 성지로 거듭나는 대전현충원 내의 국가원수 묘역의 최규하 전 대통령.
故 한주호 준위 묘. 천안함 46 용사 묘. 연안 이씨 묘소를 비롯하여 유회당. 신채호 선생 생가를 살피고 나니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더운 가운데도 현충원 답산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돌아가는 마음과 발길이 가벼워 달리는 車窓에
시원한 바람은 왠지 한잔 술로 목을 추기면 어떨까 재촉하는 구나. 옥천휴게소에서 돼지 족발에 술 돌리는 회원들의
얼굴색*****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오늘 참여 못한 회원님들 다음 기회에 꼭 한잔합시다.
太極風水회원님들 항상 健康하시길********
2010. 6. 21 淸虛堂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