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장제스 총통
공산당에 패한 교훈으로 대만서 '토지 개혁'부터 했죠
입력 : 2023.12.13 03:30 조선일보
장제스 총통
▲ 장제스. 1953년 촬영한 사진. /브리태니커
대만 국사 편찬 기관 국사관(國史館)이 미국에서 반환받은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의 일기를 책으로 발간했어요.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를 상대로 소유권 분쟁을 벌인 지 18년 만이죠. 지난 7월 미국 법원은 대만 정부, 장제스 집안, 후버연구소 등이 벌인 소유권 분쟁 재판에서 일기를 국사관에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어요. 이어 9월에는 총 59상자 분량의 '양장일기(兩蔣日記·장제스, 장징궈 총통 부자의 친필 일기)'가 반환됐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은 그중 일부로, 장제스가 첫 번째 총통 재직 시절 쓴 일기입니다.
장제스는 1920~1930년대 중국 본토를 장악해 중국 공산당과 대결하고, 일본에 맞서 전쟁을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대만에서 오랜 기간 정권을 유지하다 197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총통 시절은 어떠했을까요?
소금 장수 아들로 태어나 중국 통일
장제스는 1887년 중국 저장성에서 소금 장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대장 노릇을 즐겼던 그는 군인의 꿈을 키웠고, 당시 근대화에 앞섰던 일본으로 건너가 군 생활을 했습니다. 쇠락해 가던 청 왕조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운명을 다하자, 장제스는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와 혁명에 참여하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1925년 국민당을 이끌던 쑨원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그의 후계자를 자처했고, 군 총사령관으로서 권력을 거머쥐었어요. 그는 전국에 퍼져 있던 군벌 세력을 제거하려 북벌을 단행했고,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어요.
난징을 수도로 한 국민당 정부는 이후 약 10년간 이어졌어요.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죠.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일본에 대한 항전을 이어갔어요. 이 과정에서 적대 세력이던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항일(抗日)이라는 공동 목표가 사라지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더는 공존하기 어려워졌어요.
이어 내전이 벌어졌고, 초반 우세했던 국민당은 잘못된 정책으로 민심을 잃어 주요 지역을 공산당에 빼앗겼어요. 결국 1949년 12월 장제스 정부와 군대는 대만으로 후퇴했습니다.
장제스는 정부를 대만 타이베이로 옮겼고, 1950년 3월 다시 총통에 선출됐어요. 이후 1954·1960·1966·1972년 선거에서 모두 당선되며 장기 집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토대는 바로 대만 내에 내린 계엄령이었어요. 1949년 5월부터 1987년 7월까지 대만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장기 계엄을 이어갔어요. 장제스가 언젠가 반격해 다시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대만을 줄곧 전시 상태로 유지한 거죠.
경제는 고속 성장, 정치는 일당 독재
장제스가 장기 집권하는 동안 대만은 경제적 발전을 이뤘지만,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지는 못했어요. 권력을 잡은 장제스는 우선 토지 개혁을 시행했어요. 과거 농민의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점을 교훈 삼아 발 빠르게 개혁에 나섰죠. 경작지 임대료는 1년 치 작물 수확량의 37.5%를 초과하지 못하게 했고,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어요. 이를 통해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지주의 이익도 보장하려고 했죠. 실제로 토지 개혁 기간에 농업은 연평균 4~5%씩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지주의 자산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려 했는데, 이는 대만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됐어요. 특히 1960~1970년대에는 세금 제도와 금융 규제를 점차 철폐하고, 수출 유도와 저(低)임금을 통한 외자 유치 등 정책을 펴 고속 경제 성장을 이뤘습니다.
미국의 경제 원조도 경제 발전의 한 축이 됐어요. 1950년 우리나라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장제스가 세운 중화민국에 1965년까지 총 15억달러를 지원했어요. 장제스 정부는 이 자금으로 시기별 4개년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했고, 전력·철도·도로 등 인프라를 개선해 생산력을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려고 했어요. 이를 통해 대만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도약할 수 있었죠. 이 외에도 장제스는 공직자 부패 척결, 의무 교육 시행 등 개혁을 통해 대만을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장제스가 통치하는 대만은 사실상 일당 독재 국가였어요.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시행해 국민 활동을 제약했어요. 일반 국민은 자유롭게 해외에 나갈 수도 없었어요. 모든 정부 기구와 민간단체에 정보원을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봤고, 국민에게 서로 감시하고 고발할 것을 권장했죠. 또 집회, 출판, 언론 등 활동도 엄격히 심사하고 감독했어요. 특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사회에 퍼지지 못하게 했어요.
공산주의를 차단하려 한 '백색 테러'는 장제스의 총통 임기 전 시작돼 집권 내내 계속됐어요. 대표적으로 1947년 2·28 사건이 있어요. 경찰이 담배 노점상을 구타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시위와 이후 진압 과정에서 2만8000여 명이 사망했죠. 이 사건은 본성인(대만에 건너온 초기 이주자)과 외성인(1949년 전후 장제스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 간 대립 문제이기도 했는데, 일제가 물러난 뒤 집권한 국민당의 차별 대우에 본성인이 반발한 사건이었어요.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임시 조례를 제정해 민주 정치를 중단했어요. 총통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고, 무제한 연임을 허용했죠. 또 각종 사회단체 조직을 금지했고, 선거도 무기한 연기했어요. 그 결과 각종 선출직 의원은 종신 임기를 보장받게 됐습니다. 특히 장제스는 2·28 사건에 대한 논의를 엄격히 탄압했어요. 이 사건 이후에도 장제스 정권은 '불순분자를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반체제 인사에 대한 숙청과 박해를 가했는데, 약 14만명의 대만인이 재판을 받고 투옥됐습니다.
▲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대만 타이베이에 세운 국립중정기념당. /위키피디아
▲ 1945년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 장제스의 일기.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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