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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누구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도 때도, 쫓기듯 추구합니다. 완전히 사로잡혀서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을 때가 발생합니다. 현대인들에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 공항장애나 우울증 같은 정신병증으로 발전할 정도로 강박적입니다. 물론, 잠깐 행복하게 될 수는 있습니다. 행복이 조금 더 오랫동안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곧 그 행복에 익숙해집니다. 지루하게 느낍니다. 다시 더 많은 행복을 찾아서 방황하게 됩니다.
바닷물을 들이켜서 더 큰 갈증만 유발誘發시키는 안타까운 상황이 수시로 반복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쾌락적응 또는 쾌락 쳇바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잉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결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온갖 유혹들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불안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껏 욕망을 누릴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자유이며 또 행복이라는 주장 곧 유혹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가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매사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이 농후하며, “죄 곧 나, 나 곧 죄”이고, 지극히 작은 죄 앞에서도 여지없이 흔들리고 또 죄를 질펀하게 깔고 앉아서 즐기는 자아라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더 가지게 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어야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욕망을 추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만족과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요? 남보다 조금 뒤처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비록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으며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나지 않고 밭에서 농작물이 나지 않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고 고백할 수는 없을까요? 수시로 올라와서 목마르게 만드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으로도 충분히 만족과 행복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속으로부터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욕망을 마음껏 추구하며 살라고 유혹하는 무책임한 시대와 맞장 떠 볼 수는 없을까요?
드디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성막을 구름으로 덮어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불같이 보이는 구름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삶 중심에 친히 임하셨습니다. 거하셨습니다. 함께 동행 하셨습니다. 친히 통치해 주셨습니다.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동할 때는 여호와께서 앞서 가셔서 여러분이 진칠 곳을 찾아 주셨소.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인도하셨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도 보여주셨소.”(신1:33b)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사십년 동안 줄곧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하나의 습관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도, 쉬지 않고 반역을 시도했을 때도, 심령 깊은 곳에 꼭꼭 감춰두었던 탐욕이 발동發動하여 의도적으로 당신을 거역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관심을 끊임없이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 삶속에 친히 성령으로 임하여 계십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히13:5)라는 약속대로,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늘 동행 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호흡을 거두어 가실 때까지 친히 다스려 주십니다.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실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광야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생존과 소망의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성민 이스라엘은 누구나 다 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떠올랐습니다. 성막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누구나 개인적으로 성민 이스라엘을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통치와 이끌어주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경험했습니다.
느낌은 사람들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감동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상태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저 그렇고, 어떤 사람은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합니다. 광야 생활은 구름의 움직임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다. 구름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구름의 인도에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실제로, 구름은 성막을 쳐야할 자리를 미리 결정했습니다. 먼저 내려앉았습니다. 그것을 본 성민 이스라엘은 행진을 멈췄습니다. 성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궤를 모셨습니다. 이어서 머물기 위한 진영을 갖췄습니다. 구름이 머무르고 떠오르는 시기와 머무는 기간은 하나님 외에 성민 이스라엘 가운데 누구도 몰랐습니다. 최고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구름이 머물고 떠오르는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구름의 변화에 따라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했습니다.
구름이 한 달이나 일 년 또는 그 이상으로 오랫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머물 때는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는 가장 안전하고 지혜로운 처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어떻게 그에게 모든 것을 회복해 주셨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소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살펴보시고 돌봐주실 정도로 자비로우십니다.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약5:11b)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인내하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잘 아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때를 아십니다. 자비로우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상급을 풍성하게 허락해 주십니다. 구름이 짧게 머무를 때는 평소와는 다른 열심이 요구되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었습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을 네 명으로 잡았을 때, 이백사십만 명이 넘었습니다. 족히 삼백만 명은 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쨌든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노약자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가축 떼까지 이끌고 있었습니다.
장막의 수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치고 걷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장막을 걷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구름이 지극히 짧은 시간만 머물다 떠오르거나 기후 조건이 극히 나쁜 상황에서도 즉시 진을 걷고 출발해야 했습니다.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민9:21a)라는 증거대로, 심지어 단 하루밖에 머물지 않고 떠오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는 순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아니 조금도 지체하지 못한 채 즉시 육신의 장막을 버리고 떠나야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미덕美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9:23b)라고 증거 합니다. “직임מִשְׁמֶ֥רֶת(미쉬메레트)”은 “지키다, 수호하다, 준수하다, 따르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שמר(솨마르)로부터 파생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명령과 규례와 임무와 책임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통해서 머무르거나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망설이며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리 빨리 움직이는 것이냐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머물지 말지 그랬느냐고, 쓰러질 정도로 지쳐있는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고, 수없이 많은 노약자들과 무수히 많은 짐승 떼들을 이끌고 구름이 머물고 떠오를 때마다 성막은 물론이고 별처럼 많은 장막을 치고 걷는 자신들이 가엾고 불쌍해 보이지도 않느냐고, 이번에는 왜 이리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냐고, 왜 이렇게까지도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것이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어떤 때는 환경이 너무 좋아서 더 오랫동안 머물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환경이 너무 나빠서 장막을 친 직후 바로 떠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주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달게 먹었습니다. 충분히 소화시켰습니다.
구름이 자신들의 의지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때에 머물거나 떠올라도 즉시 순종했습니다.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직임 곧 순종을 다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관한한 달인의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과소평가했던 그들이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그들처럼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각종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와서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마8:19)라는 평행본문에 따르면, 그는 서기관이었습니다. 성경을 쓰고,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전문가였습니다. 유대교와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종교적인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법률에 관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종교적인 전통과 교리를 유지하고 전달했습니다. 학식과 재력을 갖췄습니다. 온갖 기득권과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최고의 계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겠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수행하며 섬기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부와 명예, 정치 종교적인 기득권까지 누리는 그야말로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9:58)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부와 명예, 권세와 기득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우나 새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의식주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습니다. 출세하여 이름을 떨칠 수도 없습니다. 평안한 거처도 없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할 때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받게 되는 영광에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됩니다. 능력을 나타내는 과정에는 가난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사람들에게 배척이나 당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지 않고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고 있던 영광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함께 영광을 누리고 있던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자신도 받고 싶어졌습니다. 성경은 이후 상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은 그가 말없이 돌아섰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따르기는 하겠지만 아버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치르는 장례식은 가정과 종교와 사회적인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율법 공부와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와 할례 시행보다 우선적으로 지켜야할 의무였습니다. 죽은 시체를 만질 수 없었던 제사장들도 친척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만질 수 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 일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을 낳고 길러준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안대로 따르겠다는 사람의 명분名分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라.”(눅9:60a)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은 목숨까지도 전부 다 동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중요한 의무를 다하지 말라는 의미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서로 상충相衝했을 때 결정적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이라도 기꺼이 겪어내겠다는 결단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왔습니다. 대단히 당당해 보였습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만반의 준비를 이미 다 마쳐놓았다고 말했습니다. 함께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2b)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마라. 뒤돌아보지도 마라. 하나님 나라를 내일로 미룰 수는 없다. 오늘 기회를 잡아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사람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곧은 고랑을 내는 것입니다. 밭을 갈면서 다른 일에 신경을 쓰거나 주위를 둘러보면 곧은 고랑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입니다. 한 시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특히, “합당하다ευθετος”를 직역하면 “잘 배치된”입니다. 본 절에서는 “유용한, 적합한, 순응하는”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라는 우선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진 곧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부인해야합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아야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절제의 기술 :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5가지 삶의 원칙The Joy of Missing Out:The Art of Self-Restraint in an Age of Excess ”이라는 책의 저자인 그Sven Brinkman의 주장에 따르면, 헛된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은 구멍 난 항아리입니다.
밑이 빠진 독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무수히 많은 유혹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덜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 새롭고 많은 것을 바라기보다는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정말 소중하다고 할지라도, 값비싸다고 할지라도,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나 아깝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두 눈 딱 감고 기꺼이 덜어낼 수 있어야합니다.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뒤쳐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라는 세상의 외침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과 내면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욕망에 휘둘리도록 버려두지 말아야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야합니다. 기꺼이 더 많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뒤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알려진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법칙Law of Jante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생에 대한 기대를 적게 합니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선택지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여깁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분히 부정적이고 또 비관적인 태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비워내고, 덜어내고, 내려놓고, 조금은 뒤처질 때 헛된 유혹과 욕망에게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것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무책임한 세상의 집요한 유혹과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욕망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었던 두려움과 불안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힘겹다고만 느꼈던 삶이 다른 어느 때보다 쉬워집니다.
훨씬 가벼워집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마음에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이 창조됩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주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불완전한 평안이 아닙니다. 환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누릴 수 있는 완전한 평안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윤택하고 풍성한 평안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창조됩니다. 간절히 바랐던 행복도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마음을 비워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덜어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려놓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조금은 뒤처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쳇바퀴처럼 쉬지 않고 돌아가는 쾌락을 더 이상 추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비폭력 저항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그Mahatma Gandhi는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다면 현재의 자신을 포기하라, 미래는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시로 다가와 유혹하는 욕망에 찌들어버린 현재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되고 싶은 자신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되고 싶은 미래의 자신이 있다면 오늘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어떤 직임을 허락해 주시든지 기꺼이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혹 필요하다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 채소를 먹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잠15:16-17)라고 외쳤습니다.
“재산이 적으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재산은 적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재산은 많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극히 이기적이고 오만한 삶을 산다면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원하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고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누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불행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대신들에게 항복하면 네가 죽지 않고 이 성도 불타지 않을 것이며 네 가족도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그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성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이 이 성에 불을 지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렘38:17b-18)라는 하나님의 경고에 따르면, 남 왕국 유다의 장래 역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은 다람쥐 쳇바퀴 같이 쉬지 않고 돌도록 만드는 욕망의 굴레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욕망에 사로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자아를 비워내고, 덜어내고,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게 만드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복된 삶, 비록 사람들보다 조금 뒤처지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더할 나위 없는 평안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