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영산홍 붉은 꽃물결에 가슴이 설렜다. 어딘가로 떠나고픈 바람들이 일었던 것일까. '독립군가'배우기에 열심인 문화센터 합창단원 몇 명과 점심이나 같이하자며 차를 탔다. 수원역 고가도로인 듯싶더니 서수원을 거쳐 발안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꽃구경도 할 수 있고, 보여줄 곳이 있다며 바람을 잡은 것은 이선생이었다.
좌중의 막내 격인 그는 뜬금없이 "우리 선생님들 중에 혹시 '독립가'라고 들어보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독립군가'를 배우고 있는 도반들이다보니 왜 아니었겠는가. 자신의 선친께서 생전에 '독립군가'를 좋아하셨다며 남다른 모습을 보여 오던 그는, 또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며 언젠가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원을 출발하여 한 20분쯤을 갔을까. 어느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며 그는 수원에서 35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 이곳에서 내리면 자신의 어릴 적 고향집이라며,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안내한 곳은 붉은 벽돌로 된 이층집이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옆에는 아담한 정원과 함께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원화성 3,1독립만세항쟁의 발상지를 찾아서 _1
바로 이곳이 '독립가'를 작사 작곡한 탄운 이정근 의사의 기념공원이라고 했다. 남향으로 창의탑이 우뚝 솟아있고, 꽃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옆에는 발안3,1독립운동기념탑, 3,1독립가, 민족혼 휘호의 비가 있어 선열의 살아있는 그날의 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원의 문 앞에는 도로가 있어 여기가 화성의 9경중 하나라는 것을 지나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독립가'는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독립군가'와도 발음이 비슷하여 자칫 헷갈릴 수 있게 들리지만 '독립가'는 군가가 아닌 일반 국민들이 3,1독립만세항쟁을 벌이며 부르는 노래였다고 생각된다. 가사만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악보는 알 수가 없었지만 옮겨보면 이러했다.
< 독립가 >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나니 이제 서야 터졌구나 피도 대한 뼈도 대한 살아 대한 죽어 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은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서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이 가사는 우리를 안내해준 이선생의 증조부님께서 당시에 직접 썼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아주 쉬운 말로 되어 있어 많은 동포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공원 입구에는 탄운 이정근 의사의 약력이 게시되어 있어 우리는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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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의 선구자이신 탄운 이정근 의사의 본관은 전주이씨 덕원군의 14대손이며, 서기 1863년 2월10일 이곳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다. 소년시절부터 한문에 열중하여 4,5세 때에 천자문을 거침없이 암송했고, 8,9세에는 소학과 대학, 논어 등을 통달하여 인근에 그 소문이 자자했다고도 하였다. 4서3경까지 통독한 가운데 19세에 결혼하여 향리에서 문맹퇴치 운동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28세에 이르자 각 지방의 농촌을 돌며 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저명한 청년교육자가 되었다고 한다.
33세 되던 해에는 상경하여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 직에 임명되었으며, 국정에 참여하던 그 때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그 조약이라고 하는 것이 대략 이러했다고 한다. '한국의 외교사무 일체를 일본 외무성이 관리할 것. 한국은 일본 정부를 경유하지 않고는 여하한 국제적 성질을 띤 조약이나 약속을 할 수 없다. 본 일본정부는 대표자로써 통감을 한국에 두고 그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두어 사무를 관리하게 할 것. 일본과 한국의 사이에 현존하는 모든 조약 및 약속은 본 조약에 위반되지 않는 한 계속 유효하다.'
문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으며, 탄운 이정근 의사는 피눈물을 머금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선 화성과 수원일대 농촌의 문맹퇴치 운동을 다시 시작하며 광범위하게, 극비리에 독립 운동을 펼칠 동지들을 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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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떠도는 말이 '왜왕 3년'이라는 구호였다고 한다. 이는 탄운 이정근 의사가 친히 지은 것이며, 침략 강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천벌을 받아 3년도 못 가서 망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수원군 일대에 널리 알려지자 이로 인해 왜경에 체포되어 많은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국상이 전국에 선포되었고, 그를 기화로 본격적인 탄운 의사의 3.1독립만세항쟁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근동의 7개 면을 위시하여 밤마다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망곡제를 올리고, 그때 지으신 '독립가'를 참석한 군중들과 함께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56세가 되던 그해 기미년 3월 20일 서울에서 동지들이 가지고온 3,1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여 극비리에 동지들에게 돌리며, 마침내 3월31일 발안 장날인 낮 12시를 기해 남녀노소가 태극기를 준비해온 가운데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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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날 장꾼들은 흰 갓을 쓰고 여자들은 흰 저고리를 입어 국상의 애도를 위장했고, 일경들은 미리부터 수원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30여명의 헌병들이 합세하여 경비는 삼엄했다고 한다. 그러나 800여 애제자들을 앞장서 이끌고, 수많은 군중들이 불같이 일어나 주재소로 몰려가자 당황한 이들은 무자비한 학살로 맞서며, 탄운 이정근 의사는 그들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고 한다.
이는 발안뿐만 아니라 화성과 수원의 3,1독립만세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15일 후인 4월15일에는 발안 장터에서 가까운 제암리 교회의 29선열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학살 탄압에도 3,1독립만세항쟁 소식은 해외동포들에게도 큰 희망이 되어주었고, 중국 만주 상하이, 소련 연해주 시베리아, 일본 오사카, 미주 등지의 해외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의 민족 해방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새롭게 전해왔다.
이층으로 된 관리 사옥 1층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으며, 2층은 '사단법인 탄운 이정근 의사 기념 사업회'사무실로 쓰고 있는 한편, '탄운 이정근 의사 장학회'에서는 이곳 출신 대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족혼'을 심어주는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창의탑(彰義塔)'은 나를 알게 하고, 정신이 번뜩 맑아지는 조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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