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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행진과 성막
출 36: 2-7
요즘 우리는 IMF 때보다도 오히려 더 어렵다고 하는 경제 위기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가, 금융시장, 경기지수, 환율 등 경제와 관계되는 모든 분야에서 ‘최악의 기록’들만 끝없이 갱신되고 있는 불안한 소식들이 텔레비전 뉴스를 틀거나 신문을 펼칠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IMF는 그래도 세계 금융시장의 조류를 따라가지 못한 우리나라 자체의 문제였다지만, 이제는 지구촌 전체의 경제가 같이 흔들리는 시대를 맞이하여 이 장기적인 침체와 불황에서 탈출구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종말 징조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그날이 올 때까지는 바로 이런 세상이 여전히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도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현실적인 경제위기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출애굽 직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애굽에서 해방된 기쁨과 감격이 충만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사실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앞날이 요원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모두다 종살이하던 사람들이었으니 가진 재산도 얼마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광야라는 곳은 ‘경기침체’는커녕 아무 생활수단이 없는 즉 아예 ‘경기’ 그 자체가 전무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열악한 경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2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광야생활을 40년이나 지나는 동안에 단 한 명도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체험했던 이 사실, ‘경제학적’인 계산이나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그런 기적이 오늘날에도 과연 어떤 성도에게 똑같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가난할 때에도 최고의 헌금을 드리는 것이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돌파구가 됩니다.
출애굽기 36장 2절부터 7절까지에 기록하기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오는 고로 4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5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7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출애굽기 40장 17절에 보면 “제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제이년 정월”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두 번째로 맞이한 정월이라는 뜻으로서, 즉 출애굽한 지 만으로 거의 일 년 지났을 때에 성막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도착한 것은 그 이전 해 삼월이었으므로 그들은 시내 산에서 약 10개월가량 지낸 셈이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들을 받게 되었고 곧 이어서 성막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 보면, 이 성막을 세운 시기란 전혀 부적절하게 보이는 때였습니다.
비록 출애굽을 했다고는 하나 그들과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기나긴 광야 행진은 아직 본격적인 첫발도 내딛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먼 길을 갈 때, 특히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타지로 이사를 가게 될 때라면 누구나 다 자기 주머니에 돈 한 푼이라도 더 가지고 가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런 시점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자기네들의 살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고 사업을 시작해서 무슨 생활의 터전을 잡게 된 후가 아니라,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는 광야 여행을 눈앞에 두고 누구에게나 다 돈이 요긴한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앞에서 읽었던 본문의 내용은 바로 그런 성막 건축을 위한 재료와 자금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예물’을 바친 사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지시를 기꺼이 순종하여 각자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아침마다 연하여” 예물을 가져왔는데 그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고 하면 나중에 가서는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물 가져오기를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마 성전건축을 하다가 교인들의 헌금이 예산을 너무 많이 초과해 버려서 헌금중단을 시킨 것은 이것이 사상 초유이자 유일의 사례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넉넉하여 남음이 있을” 만큼 엄청난 헌금을 바칠 수 있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막 무려 4백여 년 동안의 종살이를 벗어나서 해방을 받은 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구원만 생각하면 그들이 제아무리 최고의 것을 바친다 해도 전혀 계산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성막을 세울 수 있을 꼭 그만큼의 재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성막은 결코 싸구려 자재로 대충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디자인에서부터 가장 작은 부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친히 모세에게 지시해 주셨고 그 모든 것은 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력에 따르면 최상품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장 35절과 36절에 보면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애굽 사람들이 어서 떠나라고 하면서 자기네들에게 주는 재물들을 취하면서 아마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광야 여행길의 여비로 또는 가나안에 도착하여 사업을 차릴 때 쓸 밑천으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은금과 패물과 고급 천들을 바로 이 성막 지을 때 바치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예비해 두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 정말 점점 더 그런 재물들이 아까워지고 바치기 더 어려워지는 때가 오기 전에 이 시내 산에서 미리 성막을 짓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얻은 재물을 가장 귀한 일에 미리 쓰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이 세워진 시기는 사람 생각에는 아주 부적절하게 보이는 때였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야말로 적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돈이 아쉬운 때에 오히려 ‘최고의 것’을 바쳐 짓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그처럼 돈이 아쉬운 때에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으로 성막을 위해 바쳤다고 해서 다 굶어 죽고 말았습니까?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광야, 그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하나님께서는 2백만 명이나 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굶어 죽지 않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신명기 29장 5절에 보면 “5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의식주’를 완벽하고도 풍족하게 공급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다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만 장롱에 꼭꼭 숨겨 두면 화폐의 유통이 막히게 되고 전체 경기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금리를 낮추거나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등 어떻게 해서든지 ‘돈이 돌도록’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아무래도 지금 당장 자기 한 몸 보전하고 보자는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투자는 위축되고 은행들마다 돈을 풀려고 하지 않게 되어 결국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물질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개 1장 9절 이하에 보면, ‘어렵다’, ‘힘들다’ 하면서 각자가 다 ‘자기 집으로 가져가기에만 빠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황무’하게 방치해 놓으면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산물을 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의 제목을 잊지 않고, 서원한 바를 최우선으로 바치는 등, 세상이 불경기로 침체할 때일수록 우리의 물질생활은 하나님의 영적 기업을 중심으로 더욱 왕성하게 돌려야 ‘활성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이것을 지난 36년 동안 이미 생생하게 체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10여 년 전 이 강서성전 건축을 시작하던 시점은 사람의 생각에는 아무리 보아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처럼만 보이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경향의 1세대 선배들은 그 IMF라는 국난을 오히려 ‘생애 최고의 헌금’으로써 멋지게 극복해 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와 꼭 마찬가지로, 외부적으로는 국제적 경제불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교육관 2천평 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교육관을 위하여 ‘생애 전부의 헌금’을 바치게 된 것 역시 ‘타이밍이 나쁜 때’가 결코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경제적인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주신 줄로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물질적으로 힘들다고 해도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직 남아 있는 것까지 먼저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넉넉하도록’ 바침으로써,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은총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려운 시기일수록 철저하게 교회중심으로 헌신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확실한 보장이 됩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 이하 38절에 “34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완성된 성막은 이제 이스라엘의 광야행진 내내 “그 모든 행하는 길”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행진할 때뿐 아니라 “발행하지 아니하고 있을 때” 즉 진을 치고 머무르는 것 역시 성막의 구름과 불기둥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한 신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성막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그런 성막을 짓도록 하신 것은, 그 성막이야말로 그들의 어려운 광야 행진에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성막이 있어야만 그 길 없고 이정표 없는 광야에서도 그들의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고 그들이 머물 장소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물이나 음식이나 돈이나 지도가 아니라, “낮에나” “밤에나”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하심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행진 중에 그 성막을 모시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생활을 끝내고 광야행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2장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진치고 진행할 것”인지에 대하여 또 자세히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있을 때에는 성막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세 지파씩 진을 침으로써, 성막을 정방형(正方形)으로 둘러싸는 모양이 되게 했습니다.
또 진행할 때에도 보면, 성막을 지고 가는 레위인들이 행렬의 중간에 위치하고 그 앞뒤로 여섯 지파씩 정렬하여, 성막을 제일 가운데에 두고 호위하는 배열로 행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즉 행진할 때나 진치고 있을 때에나 성막이 항상 제일 한가운데에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칠 때나 진행할 때나, 잠잘 때나 행동할 때나 할 것 없이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족적으로나, 종족을 따르거나 지파를 따르거나 막론하고 항상 그들의 광야행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성막을 자기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둘러싸고 지키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애굽 군대는 전쟁터에 나갈 때 왕을 가운데에 모시고 그 주위 사방을 부대 단위별로 정사각형으로 둘러싸는, 소위 방형진(方形陣)을 쳤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의 전쟁에서는 왕이 죽으면 그대로 지는 전쟁이 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왕을 보호하는 데에 최우선을 두게 되니까 그와 같은 진형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미 해군은 기동함대를 조직할 때, 항공모함을 중심에 배치하고 그 주위를 전함과 순양함과 구축함과 잠수함들이 둥글게 포진하는, 이른바 윤형진(輪形陣)을 펼쳤습니다.
아무리 다른 배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만일 자기편의 항공모함이 침몰하면 그 나머지 함대 전체는 오로지 적군 함재기의 밥이 될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왕이 살고 항공모함이 건재해야, 부하도 살 수 있고 전쟁에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세상 군대에서도 상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어려운 때에 성막을 짓느라고 수고했다고, 이제 그 성막을 그들의 행진 대열에 제일 앞장세워 적군의 화살막이가 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진칠 때 진 바깥에 두고 필요할 때만 가끔 방문하는 장소로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행진할 때나 진칠 때나, 항상 가장 가운데 두고, 그 성막을 그들 자신의 몸으로 막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인도와 동재하심을 받으며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일단 회사를 살려놓아야 사원들도 살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노사가 협력하고 서로 희생하면서 어찌하든지 회사가 망하지 않도록 타협점을 찾아야만 둘 다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회사(會社)’가 없어지게 되면 ‘월급인상’은커녕 ‘사원(社員)’이라는 이름조차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교인들이야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이 어려운 시기라고 해서 교회를 등한시하게 되면 진짜로 완전히 망하게 되는 길로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가 생존해야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며, 교회가 축복을 받으면 그 공동체의 지체들은 자연히 축복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경향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여호와의 집’을 허락해 주신 것은 내 생활의 변두리에다 두고 그저 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곳으로 쓰라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이란 자기 육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여가활동’으로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동체요 하나님의 구속사 성취의 중심부인 교회야말로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심을 체험케 해 주는 내 인생의 구심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잘되든지 안 되든지 사실 별 상관이 없겠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잘되어야 그 교인의 신앙생활이 탄탄하게 성장할 것이고 그처럼 영혼이 먼저 잘되면 범사의 형통이라는 축복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저와 여러분들은 바로 이 경향제단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육탄으로 방어하면서 나아가는 것만이, 이 ‘광야’ 같은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생존할 수 있으며 결국은 ‘가나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로지 성막을 최우선으로 지켜냄으로써 그토록 어렵고도 위험했던 광야행진을 40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 국가적인 큰 환난을 통과하는 중에도 역시 오직 더더욱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교회중심의 삶에 충성하고 헌신함으로써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존과 안전의 보장을 든든히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에게는 그 극심한 흉년 때에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 스스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고 말했듯이 그 양(量)은 그야말로 모자의 ‘최후의 식사’를 위한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 ‘최소량’의 재료를 가지고 먼저 ‘엘리야를 위한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바치자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는”(왕상 17:14)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의 경기’만을 기준으로 해서 보자면 마지막 떡 하나 먹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자였지만,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것을 위해 그 마지막을 먼저 바쳤을 때에 전 이스라엘이 최악의 ‘불황’에 허덕이던 중에도 오로지 그녀 혼자 ‘호황’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신문의 경제면을 펼치면서 주가부터 보고 거기에 매달려 살아가면 그 지수가 급락하게 될 때 우리의 인생도 동시에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불경기 중에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만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의 봉사와 충성의 삶에 필요한 것을 절로 채워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돈을 중심으로 가게 되면 그 돈이 잘 돌아가지 않고 그 돈이 잘 벌리지 않을 때에는 당연히 직통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가 불안하고 국가가 흔들리는 시기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이 ‘결코 망할 수가 없는 나라’에 속한 백성 역시 절대로 파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촌의 경제라는 것은 그렇게 똑똑한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이처럼 세계적인 불황 앞에 속수무책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아예 불경기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역사상 당대를 주름잡던 대제국들도 결국 다 사라졌고 끝없이 번영할 것 같았던 미국조차 저렇게 흔들리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만은 문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말세가 될수록 점점 더 밝게 비취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경기가 끝없이 떨어질 때에도 오직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절로 따라오게 되는 만년 호경기’를 탈 줄 알고, 인간 사회와 국가가 흥망성쇠의 롤러코스터를 위태롭게 달릴 때에도 오직 교회에 자기 인생의 든든한 기반을 둠으로써 ‘영원히 흥왕일로에 있는 왕국’의 보장된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