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삶 (잠 25:1-3)
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 시간에 “영화로운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1절 은 솔로몬이 원저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그만큼 잠언을 귀히 여겼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시대가 기원전 약 10세기인데 2세기가 지난 히스기야 시대에 솔로몬의 잠언은 왕과 신하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잠언이 더욱 더 귀한 보물로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성도가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예수의 복음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2절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그랬습니다. 이 뜻은 모르게 숨기면서 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나 우주 통치 방식이 워낙 신비하고 오묘하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아름다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1:33-36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사역 자체가 영화로운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의 사역이 그렇게 영광스럽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요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후3:7-9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지역에서 판검사가 나오면 현수막 걸어놓고 축하합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살리는 직분이라면 더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직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더 깊이 알고 확신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을 위해 직간접으로 힘쓰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52:7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했습니다. 이처럼 침이 마르게 칭찬한 구절은 이 구절 말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전도자의 발이 살리는 발이 되려면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은 죄를 포함해 인간의 온갖 장애를 말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의 공로에 굳게 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 받았다. 나는 이길 것이라가 아니라 이겼다. 나는 예수 안에서 영화롭게 되었다. 이렇게 복음에 서서 노래할 뿐 아니라 이 예수 공로를 전하고 선포하고 함께 찬양하는 대열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지난 1800년 5월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역시 그랬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우리는 승리의 예수 안에 득게 서서 이미 산을 넘은 자이므로 이미 승리자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후에 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했는데 예수의 영화로움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의 삶이 곧 그를 포함한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을 믿는 우리는 영적으로 더 이상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늘 찬송하며 성령으로 실제를 누리는 가운데 전하라는 말입니다. 사사기 2장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는데 백성이 얼마나 소리 높여 우는지 그 곳을 보김이라 했습니다. 보김이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이 나타나는 사역을 할 수 있다면 그는 가장 영화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가장 영화로운 삶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뭐라 했습니까?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즉 왕은 백성들의 최고 통치자로서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해결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하고 풍요롭게 살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왕은 모든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이며 이것이 왕의 영화입니다.
반면 왕으로서 높은 자리에서 군림만 하려고 하고 세도만 부리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추한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실패한 왕들을 보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계속 세금만 거둬 궁전만 짓고 자기를 기념하는 동상만 세우고 사치하고 연락하고 폭압정치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리하게 전쟁준비만 해서 백성들을 죽게 하면 이런 왕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지금 북한의 고위 간부들이 집단 망명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세요. 마20:28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섬기는 자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서로 쟁론했을 때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영화로운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자주 받다 보면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더 나아가 배려를 권리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호떡집 아주머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혼자 손수레 호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신사가 보니 장사도 안 되고 안타까워서 매일 지나가면서 돈 천 원을 건네주고 호떡은 그냥 됐다며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한 달을 넘게, 늘 그렇게 돈을 주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역시 돈을 건네고 돌아가는데, 호떡집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아저씨, 호떡 값 올랐어요. 천이백 원 주세요."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고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불만 불평합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추해집니다. 어쩔 수 없이 받는다면 감사하는 마음 잃지 말고 예루살렘 교회처럼 육신으로 받고 영적으로 기도하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바다가 생명의 바다인 것은 갈릴리 바다는 물을 받으나 주기 때문에 살아 있지만 사해는 물을 주지 않고 받기만 하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든지 주어야 전도가 됩니다. 행20:35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주면 행복해지고 주면 계속 더 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랑으로 섬길 때 영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3. 영화로운 삶은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절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백성들이 왕의 계획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왕이 그 심성이 깊고 지략이 풍부하며 미래지향적인 통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미래를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미국의 49번째 땅이 된 알래스카는 검은 보물인 석유와 푸른 보물인 산림과 누런 보물인 황금을 품고 있는 보석 같은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7년, 미국은 이 땅을 제정 러시아로부터 7백 20만 달러에 매입했습니다. 한국의 일곱 배나 되는 넓은 땅을 서울 명동의 100평도 안 되는 가격에 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국회는 매매계약을 성사시킨 윌리암 스워드 국무장관을 향해 “쓸모없는 얼음땅을 7백 20만 달러나 주고 사다니 국고를 탕진한 책임을 지라.”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은 중요한 전략요충지로 사용되었으며 1967년 엄청난 양의 석유가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러시아는 가슴 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얼음 땅이 미국의 보물이 된 것입니다.
눈앞만 바라보는 현실주의자는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보는 안목을 가질 때 역사는 그 이름을 기억해 줄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를 만났다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누가 이해해 주지 않고 비난만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가 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처럼 영화로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영화로운 것도 그가 하나님의 꿈을 받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갈렙이 위대한 것도 꿈이 있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무엇이 늙음인가? 꿈이 없는 것이 늙음입니다. 무엇이 청춘인가? 꿈이 있으면 나이와 관계없이 청춘입니다. 그러므로 늘 엎드려 저를 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이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 안에서 우리 옛 사람은 죽고 위대하고 영화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에 서서 위대한 인격과 위대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하고, 더욱 낮아져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아 아름다운 꿈을 품고 실천해 가시는 가장 영화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