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 3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
2. 환난 가운데 위로 ( 1: 3 – 11 )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 가운데 위로라는 말이 열 번 나온다.
* 사 40: 1 -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가 이 말씀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고후 1: 3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는데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었다.
* 눅 4: 17-19 –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사 61: 1-3 –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모든 슬픔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1] 찬송하리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는 '칭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 '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여덟 개의 축복 문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Barrett).
2]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다.
* 갈 4: 4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이다.
* 벧전 1: 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3] 자비의 아버지시요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오,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 압 하라하밈)라는 말로 시작한다(A. Marmorstein).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 오이크티르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
* 시 86: 15 -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 미 7: 18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들의 아버지’이시다. ‘자비들’이라는 원어는 많은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많으신 아버지이시다.
4]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모든'(*, 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 파라클레세오스)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절).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
* 롬 8: 35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세상은 상심한 자로 가득하다. 권력자나 부유한 자도 마음이 상해 있고, 많이 배운 자나 인기 있는 자도 상해 있다. 여러 가지 사고로 인하여 육신의 아픔을 지닌 자보다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가 더 많은 것 같다.
육신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 않아 치료하기도 훨씬 어렵다. 거리의 수 많은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니지만, 그 마음의 상태는 병들고 상처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람의 실수로 상처받은 자도 있지만, 죄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도 많다. 부모나 자녀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은 자도 있으나 배우자의 불륜으로 마음이 상한다.
사업의 실패나 진학의 문제나 취업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자들도 많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는 본문의 중요한 주제이다(3-7절에 10번 나옴). 이 세상은 슬픔과 환난이 많기에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큰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평안과 용기를 주실 뿐 아니라 그의 뜻을 따라 능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외아들의 장례식에서 하염없이 울던 나인성 과부에게 그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위로해 주셨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심히 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