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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란 무엇이며, 어떻게 창작하는가
이상옥(DIMA 카페지기)
1. AI도 아는 디카시
AI가 어느새 우리 삶의 중심부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AI, AI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의 위키’에 내 정보가 탑재된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핵심 사항이 기재된 것을 보고 놀랐다. ChatGPT를 쓰다가 요즘 Gemini까지 스마트폰에 깔았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AI 앞에 휴먼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명의 이기인 AI를 마냥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AI와 공동 사유로 『디카시와 철학』을 출간한 바도 있다. 이 작업을 통해서 ChatGPT에게 디카시 정보를 제공하고 디카시를 딥러닝시키면서 ChatGPT가 그간 잘못 이해하고 있던 디카시 정보들을 교정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ChatGPT도 디카시를 상당 부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ChatGPT는 그간 학습한 방대한 디카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디카시 담론을 생산할 수도 있다. 시인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디카시의 정체성을 살펴보며, 최근 쓴 디카시 「가을 판화」 사례로 디카시 창작이 문자시와 어떻게 다른지도 밝혀보도록 한다.
2. 디지털 시대 최적화된 서정 양식
디카시는 발생론적 특징으로 날씨를 전제로 한다. 디카시의 서정은 시인의 머릿속 상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세계와의 만남, 곧 날씨에서 출발한다. 날씨는 자연과 사물 속에서 돌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시적 형상이며, 시인은 그와 마주치는 순간 창작의 충동을 느낀다. 이때의 서정은 이미 사유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을 받아 안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디카시의 발생론적 서정은 날씨를 원천으로 하는 현장적 감응이라 할 수 있다.
디카시는 디지털 매체의 산물로 멀티언어성을 지닌다. 전통 시가 언어라는 하나의 매체에 의존했다면, 디카시는 본질적으로 이중 매체 위에서 성립한다. 시인은 날씨를 사진기호로 붙잡고, 동시에 짧은 문자기호로 응답한다. 두 기호는 서로 다른 체계지만, 하나의 작품 속에서 멀티언어적으로 결합한다. 독자는 이미지를 보는 동시에 언어를 읽으며, 두 층위의 울림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서정을 체험한다. 바로 이 점에서 디카시는 단선적 울림을 넘어선 다중적 서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시간적 특징으로는 극순간성을 지닌다. 디카시는 기다림의 산물이 아니라, 찰나의 예술이다. 날씨가 불현듯 나타나고, 시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즉각적으로 스마트폰 내장 디카를 들어 찍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짧은 언술을 덧붙인다. 이러한 극순간적 창작 방식은 순간의 생생함을 보존하며, 일상의 시간을 예술의 시간으로 변환한다. 디카시의 서정은 곧 찰나가 영원으로 승화되는 순간예술로서의 특성을 가진다.
또한 소통적 특징으로는 실시간 공유성이다. 디카시는 종이책에 담겨 오랜 시간이 지나 독자에게 전해지는 전통 시와 다르다. 그것은 창작되는 순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독자는 그 자리에서 작품을 보고 반응하며, 때로는 재창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로써 디카시의 서정은 닫힌 울림이 아니라 열린 대화가 된다. 창작과 향유의 거리가 사라진 이 새로운 구조는, 디카시를 실시간 소통의 서정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실존적 특징으로는 현장성과 체험성이다. 무엇보다 디카시는 현장에 뿌리내린 실존적 서정이다. 시인은 책상 위에서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날씨는 그 삶의 현장에서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며, 디카시는 그 응답의 형식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디카시의 서정은 관념적 상상의 놀이가 아니라, 세계와의 직접적인 조우에서 얻어진 실존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디카시는 문화사적 의의 또한 크다. 디카시는 기술과 예술이 만나 서정을 다시 쓰는 방식이다. 그것은 날씨라는 원천으로부터 사진기호와 시적인 언술을 동시에 생성함으로써, 서정의 형식·유통·체험을 재구조화한다.
디카시가 시작된 2004년이라는 연도는 문자제국과 디지털제국이 교차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점이다. 디카시는 그 이후의 문학이 ‘멀티언어적’, ‘네트워크적’, ‘플랫폼적’ 조건하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례이다. 2004년은 시대적 전환의 상징이다. 그해 소셜 네트워크의 본격적 확산을 알린 페이스북의 등장은 개인적 순간들이 즉시적으로 공적 영역으로 유통되는 조건을 일상화했다. 동시에 라이카라는 소형 필름카메라 하나로 세계 곳곳에서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포착하며 위대한 포토저널리즘 시대를 연 사진가 브레송이 세상을 떠난 해가 공교롭게도 2004년이라는 것도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징후적이다. 문자제국에서 디지털제국의 도래를 표상하는 사건들이 유독 2004년도에 겹친다.
이런 시대 전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디카시라는 장르는 태어났다. 그것은 기술적 조건과 예술적 상상이 만나 서정의 형태 자체를 재구성하는 첫 사례로 읽힐 수 있다. 디카시는 매체 간 경계도 허문다. 전통적 서정은 언어의 우위를 전제로 했지만, 디카시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동렬의 기표로 병치된다. 이는 볼터(Bolter)와 그루신(Grusin)이 말한 ‘재매개(remediation)’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디지털 매체는 사진과 활자 매체를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표현 규칙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가 단순히 붙여진 것이 아니라, 날씨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동시에 생성된 독립적 기호로서 서로를 보완·증폭시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매체 변화는 기술적 전이일 뿐 아니라 서정적 의미 생산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다.
디카시는 서정의 순간성도 두 겹으로 재정의한다. 디카시의 ‘극순간성’은 이미지와 언술이 동시에 발화한다는 점이다. 날씨는 시적 형상으로서 시인을 순간적으로 자극하고, 그 충동의 두 축인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거의 동시에 발현되며 하나의 통합 텍스트를 이룬다. 그래서 디카시의 순간성은 단일한 시선의 포착이 아니라, 복수의 기호가 교차하는 ‘동시성’이다. 이로 인해 서정은 더 이상 내면의 장기간 숙성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현장의 체험을 즉시 예술로 번역하는 실천이 된다.
디카시는 저자·독자도 재구성한다. 소셜 플랫폼은 저자와 독자의 경계를 흐리게 했다. 페이스북 이후의 문화는 사용자가 동시에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프로슈머’가 되는 환경을 낳았고, 디카시는 그러한 구조에서 탄생한 장르다. 디카시 창작자는 개인적 체험을 즉시 공개하고, 독자는 곧바로 반응·확산으로 응답한다. 서정은 고립된 고백이 아니라 네트워크적 수행(performance)이 된다. 문학사는 이 변화를 단순한 유통 방식의 변동으로 보지 않고, 서정체험의 공적·공동적 재배치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디카시는 일상을 서정화하는 방식에서 미학적 실험을 수행한다. 스마트폰 디카의 ‘스냅’ 미학과 짧은 언술의 미니멀리즘이 결합되어, 오래된 장대한 묘사 대신 압축된 감각과 암시적 의미를 남긴다.
그 결과 생겨나는 미학은 일상의 찰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미세 서정’,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의 공백을 메우면서 생성하는 ‘여백의 미학’, 그리고 텍스트가 매체적 맥락(플랫폼 인터페이스, 타임라인, 댓글 등)에 의해 읽히는 ‘퍼포먼스적 서사’를 새롭게 구축했다.
3. 디카시의 창작 원리
디카시 창작의 시작은 시인이 날시(raw poem)를 포착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날시는 단순히 눈앞에 있는 사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스스로 시적인 얼굴을 드러내는 형상이이며, 시인의 감각 속에서 번쩍이는 순간적 현현이다. 나무 한 그루가, 갈라진 벽 틈의 잡초가, 빗방울이 스쳐 지나가는 유리창이 문득 다가와 시적인 빛을 발산할 때, 그것을 날씨라고 말한다.
이때 시인은 그저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자신을 열어 보여주는 그 순간에, 시인은 열린 감각의 자리에서 그 형상을 맞이한다. 사물이 스스로 다가와 시인의 의식을 흔들고, 그 충격이 곧 가슴의 떨림으로, 손끝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눈이 번쩍 뜨이고,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 디카를 들어 그 형상을 찍게 된다. 이것이 날씨와 시적 충동이 만나는 자리다.
문자시는 씨앗을 틔우듯 서서히 구상과 상상력의 과정을 밟는다. 시의 종자인 착상에서 줄기와 잎을 키우며, 시의 전체적 지도를 그리고 초고를 쓰고 다시 퇴고를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디카시는 다르다. 날씨가 포착되는 순간 이미 시의 몸통이 시인 앞에 놓인다. 긴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시적 충동이 솟구치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언술은 곧바로 흘러나온다. 시를 길게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온전한 시적 사건이 그 자리에 도래하는 것이다. 즉발적 만남이다.
따라서 날씨 포착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세계와 시인의 격렬한 만남이다. 그것은 설명할 겨를이 없는 직관의 시간이며, 동시에 창작이 태어나는 기점이다. 세계가 스스로 “여기 있다”고 발하는 순간, 시인은 응답하듯 찍고 쓰며, 들고 나가 곧바로 타인과의 소통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된다. 이 결합은 곧 SNS 환경과 맞물려 실시간 공유로 확장된다.
위와 같은 디카시 창작 과정의 특수성을 『디카시 창작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시 창작은 네 가지 과정을 거친다. 착상, 성장, 초고, 퇴고가 그것이다. 현대시로서 문자시는 이제까지 종이라는 인쇄매체로 표현하며 이 네 가지 과정으로 구분된 시 창작 관점이었다. 디카시는 주로 스마트폰 디카를 활용하여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이 날아가기 전에 찍고, 그것을 곧바로 언술하는 것이기에, 일반 문자시처럼 착상·성장·초고·퇴고 같은 일련의 과정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쓰기보다는 착상·성장·초고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디카시는 극순간 멀티언어예술로서 디지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새로운 서정양식적 특징에 따라, 창작 과정도 문자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디카시에서 날씨를 포착하는 순간은, 세계가 시가 되려는 욕망과 시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거기서 창작은 지체 없이 일어나고, 디카시는 다른 어떤 장르도 흉내 낼 수 없는 즉발성과 현장성을 얻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디카시를 극순간 멀티언어예술이라 부른다.
디카시의 창작은 서정양식의 본질을 회복한 극점에 위치한다. 일반 문자시가 착상–성장–초고–퇴고의 단계를 거치며 시적 사유를 점층적으로 전개하는 데 비해, 디카시는 날씨를 포착하는 찰나에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동시에 결합되어 하나의 텍스트로 성립된다. 이미 착상·성장·초고는 분절된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 사건으로 일어난다. 시인이 세계를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그 순간, 시적 충동이 발화로 이어지고 즉각적으로 멀티언어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의 순간성은 단순한 즉흥이 아니다. 시적 신체가 세계와 직접 맞닿는 감각적 충동의 결과다. 즉, 디카시의 창작은 ‘몸의 사유’가 예술의 형상으로 번쩍이는 사건이다. 문자시가 사유의 확장을 통해 형상화된 ‘이후의 시’라면, 디카시는 사유 이전의 감각이 기호로 전이되는 ‘즉시의 시’다. 이 즉시성 속에는 시적 긴장과 응축이 고도로 압축되어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디카시는 현대 서정양식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문자시는 산문화되고 스토리화되며 서정의 본질, 즉 순간의 정서적 진동을 잃어가고 있다. 반면 디카시는 스마트폰 디카라는 디지털 매체의 감각성과 시인의 신체적 직관이 결합되어, 전통적 서정의 즉흥성과 현대적 감각의 기술성을 동시에 구현한다. 그것은 ‘생각된 언어’가 아니라 ‘느껴진 기호’로서, 순간의 정념이 세계와 만나는 교차점에서 탄생하는 디지털 서정이다. 따라서 디카시의 순간성은 우발적 즉흥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서정양식적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시의 본질이 ‘순간의 정서 표출’에 있다면, 디카시는 그 본질을 가장 첨예하게 수행하는 예술 형태다.
창작이 한 덩어리로 일어나는 이 압축적 창작 구조가 바로 디카시를 문자시와 구별하는 서정양식적 핵심이며, 현대 시문학이 잃어버린 서정의 감각을 복원하는 새로운 시적 비전이다. 또한 디카시가 순간 포착, 순간 언술, 순간 소통의 특성에 따라 창작돼 SNS를 활용해 실시간 공유되며 쌍방향 소통한다는 점에서도 디카시 창작은 즉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여기서 시인이 표출한 서정을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바로 소통한다는 것이 디카시만의 서정양식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디카시가 이런 방식으로 창작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디카시가 극순간예술로서 서정양식적 특성에 따른 창작 방법론이다. 대부분의 디카시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고 이런 방식만이 디카시의 창작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반 문자시처럼 얼마든지 숙고의 시간과 퇴고의 과정도 가질 수는 있다. 물론 일반 문자시도 즉흥시라는 것이 있다. 디카시 창작처럼 즉흥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일반 문자시도 서정양식이고 디카시도 서정양식이다. 서정양식의 본질은 순간적 서정의 표출을 거듭 강조해 둔다.
가장 최근에 쓴 디카시 「가을 판화」를 통해 디카시 창작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한다.
고성 고향집 서재에서 잠을 잤다. 위에 숙소가 있지만 그날따라 서재에서 라꾸라꾸 침대를 펴서 전기담요를 감고 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바로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아직 여명이라 서재 안은 어두운데 창밖 하늘이 너무 눈부시게 클로즈업되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차고 넘쳤다. 경험적으로 그것은 세계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이고 그것은 또렷한 시적 형상으로 인식됐다. 그것이 바로 날씨였다. 바로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찍었다. 시적 충동, 시적 감흥이 온몸을 뜨겁게 했다.
근자에 서울에 있는 아들이 추석 연휴라고 고향집에 와서 하루를 묵었는데, 어머니가 말년에 치매 증상이 있어 창원 집으로 모셨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창원 집에 있을 때 아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었던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었다. 작은딸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추석 연휴라 더욱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는 유독 아들인 나에게 온 생을 걸고 세계의 중심이 나인 것처럼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남매를 두었는데, 여동생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지만 아들인 나에게 더욱 큰 사랑을 주었다.
큰딸은 결혼하고 공부도 더 하고 자신의 일도 한다고 아이 낳기를 미뤘다. 정작 아이를 낳으려고 기다리다 안 생겨 애를 먹다가 10년이 지나 아들을 보았다. 어렵게 낳아서인지, 큰딸이 자식을 키우는 걸 보면서 어머니의 영혼이 깃든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외손자에게 하는 것도 그렇고 큰딸이 나에게 하는 것도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가 현신해서 나를 돌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 마치 어머니처럼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이번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하게 됐다.
어머니가 하늘로 가시고 나서, 주변 곳곳에 어머니가 빙의한 것 같은 분들이 많다. 아들과 같이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서, 할머니가 하늘로 가시고 나서 아빠를 돌보게 하기 위해 아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서 아빠를 도와주는 것 같다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정황의 콘텍스트가 그날 날씨를 포착하는 순간 더욱 온몸을 충동하게 해서 창작한 디카시가 「가을 판화」이다.
어머니 하늘로 가시고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셨다
곳곳에 당신이 계신다
「가을 판화」
그날 아침 하늘로 가신 어머니를 불러오고, 추석 연휴에 아들이 보여준 어머니 사진과 더불어 어머니의 부재를 채우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호명했다. 그분들은 어머니의 표상이고, 어쩌면 또 다른 얼굴을 한 어머니라는 생각까지 들고, 또 순간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하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성령, 즉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준 것과 오버랩되면서, 순간적으로 “어머니 하늘로 가시고/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셨다”라는 언술이 먼저 쓰였다. 그러다가 “곳곳에 당신이 계신다”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추가됐다.
문자시 창작과는 다른 국면임이 분명하다. 눈 뜨자 문득 서재 창으로 본 하늘 풍경이 시의 몸으로 인식되고, 그것은 또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것인가? 그 주체는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부재를 메우는 또 지상의 다른 수많은 어머니와 같은 파라클레토스였다. 이렇듯 날씨가 유발하는 시적 충동은 강렬한 에너지로 폭발하며 시인으로 하여금 찍고 쓰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디카시의 멀티텍스트성을 좀 더 부연하면, 아침 햇살이 서재 창문을 비스듬히 스쳐 들어올 때, 그 빛은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흔드는 시적 신호였다. 이 작품의 사진기호에는 시간이 새겨져 있다. 가을의 햇살은 단순히 계절을 말하는 빛이 아니라, 그 빛 속에는 어머니의 부재와 그리움이 스며 있다. 창틀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이며, 그 너머의 풍경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깊이를 품고 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하늘로 가시고, 그러나 내 곁에는 또 다른 어머니들이 있다”는 영적인 인식에 이른다. 그 깨달음은 슬픔을 위로로 바꾸는 내적 변용의 순간이며, 한편으로는 더 짙은 그리움의 역설이다.
문자기호 속의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그 위로의 상징이다. 파라클레토스는 단순한 종교적 비유가 아니다. 삶의 깊은 자리에서 느끼는 존재의 순환과 사랑의 지속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리움이 끝나는 자리에 새 생명의 관계가 싹트는 것, 그것이 이 디카시가 보여주는 생의 철학이다. 사진기호는 현실의 이미지를 담고, 문자기호는 그 이미지를 넘어선 의미를 호출한다.
그리고 두 기호가 맞닿는 순간, ‘가을 풍경’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영적 감각의 공간이 된다. 이 만남의 자리에서 감각과 사유, 현실과 초월이 공존하는 제3의 언어, 즉 멀티텍스트의 예술로 변모한다. 「가을 판화」는 그렇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서로를 향해 문을 여는 작품이다. 사진은 눈의 언어로, 문장은 영혼의 언어로 서로를 보완하며 부재의 슬픔을 현존의 신비로 바꾼다. 이 디카시는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그 의미는 보편적이다. 누구나 사랑했던 이의 부재를 경험하고, 그 부재를 견디며 다시 삶을 이어간다. 이 보편의 체험을 감각적이고 초월적인 언어로 승화시킨 것이 「가을 판화」다.
이 디카시가 완성되자마자 디카시마니아 카페 창작방에 바로 탑재했다. 탑재하자마자 김병수 시인의 “명절이면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오는 어머니 모습, 창밖만 바라봅니다”를 비롯해 여러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디카시는 디지털 환경 자체를 시 쓰기의 도구로 활용하는 디지털 시대의 최적화된 새로운 서정양식이다. 창작 방법이나 소통 방식도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