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4막 22장 (3부)
기아의 브리샤.
현대의 포니와 더불어 쌍두마차격인 기아의 차량이였다.
왜소한 크기에 깜찍한 모델은 포니에 견주어 색다른 느낌을 주는 국산차였다.
어느날 아버님이 부르시어 차고지에 가보니 검은 브리샤 차량이 있었다.
"아버님 이거 못보던 차인데요?"
아버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차 누군한테 선물 받은것이다.
오늘부터 네가 타도록 하여라."
이게 무슨말인가?
이제 22살밖에 안된 나이에 마이카가 생기다니.
꿈이여 생신이여.
나는 하늘을 날아갈것만 같았다.
시세가 50만원 내외 간다는 중고차지만 생애 최초로 내차가 생기다니.
나는 얼떨결에
"아버님 감사합니다"
하고 시승하여 보았다.
왜소한 모습과는 달리 운전석은 편하였고, 5명이 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4명이 타기에는 안성 맞춤이었다.
검정색은 묵직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나는 시동을 걸어보았다.
순간 엔진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차는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어를 일단에 넣고 악세레다를 밟아보니 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차는 대로상을 나와 달리기 시작하였다.
야~호
신난다.
이차를 끌고 어디로 갈까,
나는 마음이 들떠 어쩔줄 몰랐다.
비록 왜소한 중고차지만 내차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한테 알리고 싶었다.
우선 서울역 근처에서 근무하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자랑하니 "축하한다"며 저녁을 산다고 하였다.
나는 6시경 서울역으로 가 친구를 만나 남대문숯불갈비집에 가서 거나하게 한잔 하였다.
그리고 취중만담을 하며 친구집까지 데려다 주고 음주운전을 하고 집으로 귀가하였다.
(그당시는 음주운전 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차량도 많치 않았고 러시아워나 교통체중이라는 단어도 없었으니 차량 운전은 식은죽 먹기였다.
서울이 교통체중이 발생되고 러시아워 단어가 사용된것은 1980대 중반부터 였다.)
그후 나는 친구들중 제일 먼저 자동차가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집안 친척들 한테도 자랑하니 모두 부러워하였다.
여기저기서 차좀 태워달라.
주문이 쇄도하였다.
나는 고종사촌들과 북악스카이웨이도 달려보고 어머니를 모시고 워커힐도 가보았다.
서울의 명물인 남산도 가보았고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두어달이 지났을까.
차고지에 가보니 브라샤 차량이 보이질 않았다.
"아버님 브리샤 차량이 않보이네요?
누구 빌려주셨어요?"
"아니다.
브리샤 어제 팔았다."
나는 귀를 의심하였다.
어찌 사전 말도 없이 차를 파시다니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버님이 결정한 일이니 어쩔도리가 없었다.
일장춘몽같은 몇달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음주운전의 스릴를 맛보고, 자동차경주에 나갈 정도의 숙련된 운전을 터득했거늘..
불쌍한 브리샤는 또다른 주인을 만나 떠나 버린것이다.
야속한 놈.
나를 들뜨게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한껏 주고 사라진 브리샤.
나는 평생 브리샤를 잊지 못하였다.
추후 자동차는 여러번 교체하며 소유하게 되였지만
최초로 마이카를 알게해준 검은색에 조그마한 브리샤를 영원토록 잊지 못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