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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 벗어남의 철학
- 조해란론
권대근
문학평론가, 23 세계한글작가대회 집행위원
Ⅰ.
우리 일상의 경험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해란의 수필을 읽고 난 후, 딱 생각난 단어는 ‘양자도약’과 ‘탈합치’ 두 단어였다. 먼저 양자물리학의 ‘양자도약’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원자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전자가 원자 핵 주위의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전자들은 일반적인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궤도 사이의 공간을 거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즉, 하나의 장소, 궤도에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양자도약이라고 부른다. 이것만으로도 상식적인 물리 법칙을 깨뜨리기에는 충분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도약의 과정에서 언제 어디서 전자가 나타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새로운 전자 위치의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세상이 우리의 경험과 독립하며 이미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말해준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티노바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이 확률의 바닷속에서 매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신비는 그러한 개연성으로부터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이 물리적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일으키는 프로세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양자적 사건들은 이 우주에서 진정한 의미의 무작위 사건들이다. 양자의 이동 괘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는 ‘너희들이 전자를 아느냐’고 했고, 아인슈타인은 거시세계 법칙을 끌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점핑 현상은 실제로 미시세계 현상이 아니라 거시세계에도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영어공부를 해보면, 오랫동안 안 들리던 영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들리는 경우가 있다. ‘인생 한 방’이라는 말도, ‘어느 날 갑자기’란 말도 양자도약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은 반드시 온다. 내일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있게 되어 있다. 미시세계 양자역학 원리로부터 거시세계의 불가해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가 있다.
미국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무음의 음악 연주는 예술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불확정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조해란이 유투버로 존 케이지 아방가르드 연주 경험을 수필로 쓴 글을 확인하고 나니, 프랑수아 줄리앙이 ‘탈합치’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에게 나타났다. “어떤 관념이 합치될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합치는 세계화, 전 지구적 시장, 미디어의 지배, 일반화된 연결망의 기둥 등으로 인해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규탄하는 데 머무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규탄은 힘도 없고 의거할 토대도 없으며 사람들이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수의 지엽적인 ‘현장에서의’ 탈합치들이 서로 마주치며 퍼져나갈 때, 따라서 안착된 합치들에 은미한 균열을 일으킬 때 합치의 은신처를 무너뜨릴 수 있다.”
‘탈합치’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이 만든 신조어다. 줄리앙은 40여 년 간 중국사유와 서양사유를 맞대면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중국학의 차원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사유를 펼쳐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동서양 사유의 관계를 통찰한 40여 종의 단행본을 저술했고 최근에는 이와 같은 방대한 지적 자산을 토대로 독창적인 문화론과 실존의 윤리학을 정립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시한다. 인류 삶의 진화 자체에서 이탈을 통해 인간이 된 존재가 출현할 수 있었고, 대자연과 간극을 벌리게 된 것은 무엇에 기인했는가? 또한 의식으로 불리는 것이 세계에 대한 탈착을 통해 인정될 수 있고, 세계 안에서 자유로서 전개될 것을 세계의 응집에 균열을 냄으로써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프랑수아 줄리앙은 이에 대한 일차적인 답을 이렇게 설명한다. “삶의 외부에서 부과된 명령, 다른 질서에 의거하지 않는 윤리가 이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과 합치함으로써 안정화된 모든 적합성이 합치에서 생산력을 잃는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므로 동시에 합치로부터 탈결속하는 윤리다. 특정 자아에 매몰시키는 일치의 바깥, 특정 세계 안에 가둬버리는 적합성의 바깥에 서게 해주는 돌파나 탈주야말로 ‘실존’의 능력 그 자체가 아닌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탈-봉인(封印)’, ‘우발적인 것과 조정된 것’,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탈합치에서 의식이 비롯된다’ 등을 이야기하며 ‘근대성’으로 마무리한다. “확립과 동시에 고정되는 모든 질서를 내부에서 해체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자원을 나타나게 하는 탈-봉인(封印)을 나는 탈-합치로 명명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탈합치하는 것이다’는 무슨 뜻인가?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나와 세상과 단절이 없을 때 건강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영속을 위해 이전 상태를 연장하고 지속만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상태는 삶이 굳어지고 해체되어 죽음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 상태를 벗어나는 일이고 밀착 상태의 결속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상태로부터 새로운 것을 계속 나타나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탈합치는 선행 규범의 폐쇄성을 벗어나게 하고 창조적 가능성을 활성화시키지만, 반드시 진보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이나 예술의 역사는 탈합치가 항상 우발적이며 위험을 무릅쓰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에게 탈합치는 자유와 실존을 향해 열린 창이 된다.
Ⅱ.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현재’라고 칭해지는 상태에 이른, 따라서 그 상태의 고갈에 이른 적합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하는 것이다.” 줄리앙 교수의 탈합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도전해볼 만한 과제다. 이런 아방가르드 개념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면 알 수도 있거니와 유네스코 선정 우수잡지 선정 에세이문예로 등단한 조해란 작가의 수필 <소음도 음악이더라>는 글을 읽으면 ‘탈합치’라는 개념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옮긴이 이근세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탈합치는 자유의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표현이다. 탈합치에는 지성과 통찰력, 특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탈합치의 실천은 어렵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라고 적었다. 탈합치는 영혼의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조해란은 탈합치의 철학으로부터 ‘소음도 음악이더라’는 역설적인 명제를 논리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양자 도약이란 쾌도 이탈과 맞먹는 껏이라 하겠다. ‘벗어남의 철학’이 피워낸 꽃이라 하겠다.
베란다 안으로 아침 햇살이 오랜만에 내려와 앉는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온 감기로 땀에 젖은 몸을 말린다. 창밖에서 모호한 수런거림이 올라오는 것 같다. 앙상한 빈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 늦가을 흩어지는 낙엽소리, 어느 집에서 멍멍이 짖는 소리, 일상에서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소리들이 새롭게 들린다. 존 케이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며칠 전 우연히 유튜브 영상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보게 되었다. 연주자가 무대에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는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음표도 없는 하얀색 종이, 검은색 오선지인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간이 흐르면 악보를 넘기고 끝났다 싶은지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연주자는 무대를 나갔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음도 연주하지 않는 무음의 음악 연주였다.
- 조해란 <소음도 음악이더라> 발단부, 전개부 초반
이 수필의 발단부를 주목해 보자. 원래 발단부의 주기능은 전개예고다. “창밖에서 모호한 수런거림이 올라오는 것 같다. 앙상한 빈 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 늦가을 흩어지는 낙엽소리, 어느 집에서 멍멍이 짖는 소리, 일상에서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소리들이 새롭게 들린다. 존 케이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세 번째 문장부터 일종의 소음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 인굽되는데, 전부 소리에 관한 것이고,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는 잡다한 소리지만 소음에 속한다. ‘수런거림’ ‘낙엽소리’ ‘잦는 소리’ ‘자연의 소리’들이 베란다 안으로 아침 햇살이 내려와 앉는 날, 모두 조해란 작가에게 새롭게 들린다. 그러면서 ‘존 케이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고 독백을 하면서 ‘소음도 음악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다분히 전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개부로 들어가서 한 연주자의 4분 33초 동안의 무음 연주를 유튜버로 경험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미국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는 낙천적인 성격과 독특한 연주 스타일로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은 음악, 공연 중에 청중이 듣는 환경의 소리, 우연한 자연스러운 소음도 음악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음 높이와 소리를 모두 배제하고 음 길이만을 결정해 4분 33초라는 음악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존 케이지는 아무리 고요함을 만들려고 노력해봐도 완전한 고요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아노 선율이 아닌 연주장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기 때문에 이 곡은 연주할 때마다 다른 곡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연성을 통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음악이 된 것이다. 4분 33초에 듣는 것은 단순히 침묵이 아닌 움직이는 소리들인 것이다. 편성에 따라 그 소리의 움직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의해 큰 차이가 날 것 같다. 언어로 표현되는 문학의 경우에는 언어의 도움을 받고, 소리로 표현되는 음악은 소리의 도움을 받는다.
- 조혜란 <소음도 음악이더라> 전개부
존 케이지는 미국의 아방가르드 작곡가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은 음악, 공연 중에 청중이 듣는 환경의 소리, 우연한 자연스러운 소음도 음악이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4분 33초 짜리 음악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의 발상은 ‘아무리 고요함을 만들려고 노력해봐도 완전한 고요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착안해서 아방가르드 곡을 만들었는데, 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이다. ‘4분 33초에 듣는 것은 단순히 침묵이 아닌 움직이는 소리들’이다. 문학이 언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듯이. 음악도 소리의 도움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이런 시도는 새로운 시도지만 그렇다고 근거가 없ㄴ느 건 아니다. 음악이 소리 예술이라면 모든 소리를 이용하면, 음악이 된다. 이런 논리는 포스트모던 논리다. 전통적인 음악에 대한 개념을 깨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패턴이 아닌가. 구조주의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구조라는 것이 명확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으니 그 패턴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변화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자는 것에 작가는 동조하고 있다.
오늘은 음악에 빠져 4분 33초 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맡겨보자. 음악 심리학자 사토 히로시는 음악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자연의 품에 안기면 마음이 가라앉듯 나에게는 손주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화음이 되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4분 33초에 빠져든다.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리듬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리듬을 따라가는 생각은 피곤한 영혼을 토닥이는 것 같이 따뜻해진다.
- 조혜란 <소음도 음악이더라> 결말부
고전물리학에서 모든 물체의 속성은 그 위치와 운동량을 포함해서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 차원에서는 어떤 물체의 고유한 성질, 예를 들어 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면 다른 특정들, 위치 같은 것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즉 어떤 사물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지고, 그 물체의 속도를 알고 있다면 그것의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섬세하고 진보된 기술로도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 물리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베르너 하이젠베르그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물체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하나에 초점을 맞출수록 다른 하나의 불확정성은 더욱 증가한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가 고정성이나 보편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인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면, 대상은 온통 가능성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소음도 음악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수필은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조해란은 담론층에 와서 음악 심리학자 사토 히로시를 불러와서 ‘음악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하면서 아방가르드 음악 4분 33초 무음 연주에 대한 논리적인 뒷받침을 시도하고, 다시 나진의 경험을 한번 더 발단부와 같이 언급하면서 주제의식을 스포팅하는데, ‘마음이 심란할 때 자연의 품에 안기면 마음이 가라앉듯 나에게는 손주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화음’이 된다고 적고 있다. 악보에 따라 인공적으로 내는 인간의 아름다운 소리만이 음악이 아니라는 것은 현대철학의 핵심인 해체주의를 관통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현상인 아방가르드 전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서 작가는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리듬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리듬을 따라가는 생각은 피곤한 영혼을 토닥이는 것 같이 따뜻해진다.’로 마무리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조화로운 리듬’은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음악의 최소한의 조건인 것이다. 아무리 악기로 연주하지 않는 자연의 소리라도 거기에는 최소한의 음악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리듬을 따라가는 생각’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작가는 ‘리듬’이라는 음악소를 이용해서 음악의 조건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어, 어느 정도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Ⅲ.
‘아방가르드’는 프랑스어로 ‘첨병(尖兵)’-선발대 정치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전위’라는 말로 해석되며 시대보다 앞서가는 문화예술을 뜻하기도 한다. 해체와 융합의 시대다. 요즘은 모든 것이 해체되어 가는 세상이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아니다. 여백이 있음으로써 채워진 것보다 몇 배 더 아름다워야 그 진가를 살릴 수 있다. 여백은 채워진 부분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것을 전해줄 수 있다. 4분 33초라는 시간은 ‘여백’이다. 이것은 이 수필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다. 무조건 기존의 방식만 따라 돌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때론 물러서서 고정된 사고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참다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순한 회고담이나 자화자찬에 지나지 않는 수다와 넋두리는 신파조 서술에 불과해 식상할 수밖에 없다.
이 수필은 전위적 예술에 대한 작가의 공감을 설득적으로 전개해서 공감을 건져낸 진정한 현대수필이라고 하겠다. 조해란의 수필 중 전개부에서 작가는 “존 케이지는 아무리 고요함을 만들려고 노력해봐도 완전한 고요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아노 선율이 아닌 연주장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기 때문에 이 곡은 연주할 때마다 다른 곡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연성을 통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음악이 된 것이다.” 결말부를 다시 보자. “오늘은 음악에 빠져 4분 33초 동안 눈을 감고 생각을 맡겨보자. 음악 심리학자 사토 히로시는 음악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자연의 품에 안기면 마음이 가라앉듯 나에게는 손주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화음이 되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4분 33초에 빠져든다.” 여기서 말하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탈합치, 즉 벗어남의 철학을 보여주면서, 해체주의 아방가르드의 수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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