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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양윤영(梁允永) - 천국은 놀라운 음악의 세계 6. 원리 강의소가 된 우리 집 1 남편은 타계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더욱 하늘 일을 위해 열심할 것을 다짐했다. 남편이 타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충화(韓忠嬅) 씨를 만나 교회 이야기를 하였다. 한충화 씨도 6.25 때 남편이 납북돼 남은 생을 신앙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쾌히 원리 말씀을 듣기로 약속했다. 2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아 유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우리 집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때 마침 유경규(柳景圭) 씨와 오승택(吳昇澤) 씨가 집에 찾아와 함께 청강해 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깨끗하고 큰 편이어서 세대문교회보다 장소는 훨씬 좋은 편이었다. 3 한충화(韓忠嬅) 씨는 이대 사감을 맡고 있으면서 기숙사 기도실에서 새벽 기도를 많이 하고 있던 분이었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라서인지 쉽게 원리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강의를 들었다. 이틀 후에는 문영일 군도 와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까지 치고 해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따뜻했다. 원리 강의가 끝날 무렵엔 선생님께서 찾아오셨다. 4 나는 저녁을 대접하고, 우유와 차, 빵, 과일 등을 간식으로 대접하면서 유쾌한 시간을 갖게 했는데 저녁 늦게까지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후일에 빵에 다 마취제를 섞어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로 말썽이 되기도 했다. 5 나는 더욱 의기가 올라 그 후에 채선엽 씨, 김순애 씨, 이흥렬(李興烈) 씨, 심지어 교목인 조찬선 씨까지 전도했으며 내게 실기 성악 레슨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원리 말씀을 전했다. 6 이러는 사이에 내가 이상하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남편 장례식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내가 울지 않더라고 하면서 또 다른 소문이 떠돌았다. 사실 나는 그때 하늘에서 계시를 받아 애들에게까지 울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7 한충화(韓忠嬅) 선생의 결심이 완전히 선 이후 전도는 주로 한충화 선생이 맡았다. 강정원(姜貞遠) 씨, 이계순(李桂淳) 씨, 임승희(林承姬) 씨 등 이대 여학생을 비롯 차만춘(車萬春) 씨, 최원복(崔元福 ) 씨, 이소담(李小淡) 씨가 전도돼 식구가 날로 급증해 갔다. 따라서 이대에서는 우리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8 김활란(金活蘭) 씨는 결국 김영운(金永雲) 씨에게 우리 집에 가서 그 집단(그때 당시 우리 교회를 이렇게 불렀다)이 무엇을 하는지 샅샅이 조사해 오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그때가 연말경이었다. 9 김영운(金永雲) 씨가 보따리를 싸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났는데, 그때 우리는 김영운(金永雲) 씨의 저의를 모르고, 그저 한 선생에게 전도돼 온 것으로만 알았다. 김영운(金永雲) 씨는 종일 우리 집에 묵게 돼 유 선생과 일 대 일로 격론까지 벌이면서 강의를 듣게 됐다. 10 그때 김영운(金永雲) 씨는 두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 교수였다. 엿새쯤 지났을 때, 김영운(金永雲) 씨는 영통하는 식구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영통한 할머니들과 얼마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 자기가 연구한 스웨덴보르그의 영계의 내용과 부합한다면서 끝내 원리 앞에 두 손을 들고 선생님 앞에서 이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모두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11 그리고 비로소 그는 자기가 우리 집에 온 것이 김활란(金活蘭) 씨의 조사 명령이 있었기 때문임을 밝혔던 것이다. 김영운 씨마저 우리 쪽으로 넘어 오자 김활란(金活蘭) 씨는 새로운 방해 공작을 시도했는데 그게 ‘이대 학생 퇴학 사건’이었던 것이다. 12 우리 집에 매일 새로 전도된 사람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30여 명의 식구들이 5평 넓은 방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철야를 하기도 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로운 것은 새벽 2시쯤 선생님께서 기도하시는 중 역사가 시작돼 모든 식구들이 집이 떠나갈 듯 아버지를 부르며 자석에 쇠붙이가 달라붙듯 선생님 앞으로 날아가 붙는 것이었다. 13 수경(秀卿) 씨와 효민(孝敏) 씨는 웃옷이 다 벗겨지도록 뒹굴기도 했다. 앞뒤에 은행 사택이 많았는데, 새벽녘에 그 소동이 벌어졌으니, 나는 역사를 못하도록 말리기에 급급했었다. 황환채(黃煥菜) 씨, 안창성(安昌成 ) 씨, 유광렬(柳光烈) 씨, 이진태(李鎭泰) 씨, 박승규(朴承圭) 씨도 그 무렵에 들어왔다. 14 용산 학교의 지리 선생이며 오승택(吳昇澤) 씨의 자형이었던 안창성( 安昌成) 씨는 오승택(吳昇澤) 씨를 빼내기 위해 왔었지만, 원리 말씀을 들으면서는 맞았어! 맞았어! 하면서 원리 말씀에 감복되는 모습이 순진한 어린이 같았다. 15 한의사로 현재 하와이에 가 있는 노동휘 씨는 그 무렵 남자 대학생들을 많이 전도해 왔었다. 한 번은 20명이나 되는 남자 대학생들을 데려 오기도 했다. 차츰 전도가 잘 되어 5평 방에 사람이 꽉 차고 여자 식구들이 매일처럼 온돌방 두 개를 차지하고 숙식도 하여 은행 사택인 우리 집은 마치 여관처럼 북적거렸다. 말하자면 이 단계에 김영운(金永雲) 교수가 들어왔던 것이다. 16 강의는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녁에 와서 듣게 하고, 사흘이 지난 사람은 대개 모박 수련회 식으로 3일간 묵으면서 강의를 듣곤 했다. 강의를 우리 집에서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되자, 풍경 사진도 아예 우리 집으로 옮겨 와서 현관문에서 마주 보이는 3평 다다미방에서 효민(孝敏)씨와 효영(孝永) 씨가 맡아 했다. 17 선생님은 대개 12시 가까이까지 말씀해 주시다 늦어 교회에 돌아가실 수 없게 되는 때는 주무실 적당한 방이 없어 사진 암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주무시곤 했다. 그 방은 암실로 사용해서 방문을 모두 검은 담요로 가리었는데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18 벌거벗고 춤춘다는 모략도 그렇게 해서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선생님이 형무소에 입감돼, 검사가 조서 꾸민 서류를 가지고 와서 나를 심문했는데, 우리 집 구조의 도형을 그려놓고 방마다 누구누구가 있었느냐? 19 선생님은 어떤 방에 주무셨으며 이불은 누가 펴줬느냐고까지 묻기에, 나는 귀한 손님에게는 집주인이 시중을 드는 게 예의가 아니냐면서 당신이 귀한 손님으로 우리 집에 오면 내가 시중들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에서 한두 차례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을 모두 합한다면 수백 명은 넘을 것이다. |
証言 梁允永 - 天国は驚くべき音楽の世界 6. 原理講義所になった私の家 1 夫は他界したが、生き残った者は一生懸命生き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私は全てを天に委ね、一層天のみ旨のために頑張ると誓った。夫が他界した後、間もなく韓忠嬅氏に会って教会の話をした。韓忠嬅氏も、韓国戦争で夫が北朝鮮に拉致され、残りの人生を信仰をもって暮らしていたが、彼女は喜んで原理の御言葉を聞くと約束してくれた。 2 先生に許可を得て、劉(ユ)先生を家にお連れして、私の家で講義を聞いてもらった。その時、ちょうど 柳景圭氏と吳承澤氏が家に訪ねてきて一緒に聴講してくれた。私たちが住んでいる家はきれいで大きい方だったので、三大門(セデムン:三つの門)教会より場所ははるかに良い方だった。 3 韓忠嬅氏は梨花女子大学の寮監を務めながら、寄宿舎の祈祷室で夜明けにお祈りをたくさんされていた方だった。彼女は準備された人なのか、簡単に原理のみ言葉を受け入れた。2日後にはムン・ヨンイル君も来て一緒に歌い、ピアノまで弾いて雰囲気が一層柔らかく暖かかった。原理講義が終わる頃には先生が訪ねて来られた。 4 夕食を召し上がっていただき、牛乳、お茶、パン、果物など間食をもてなして、楽しい時間を過ごして頂いた。夜遅くまで誰も席を立たなかった。後日、パンに麻酔薬を混ぜて席を立たせ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問題にもなった。 5 私はさらに意気込んで、その後、 チェ・ソンヨプ氏、キム・スンエ氏、李興烈氏、さらには学校の牧師のジョ・チャンソン氏まで伝道し、私に実技声楽のレッスンを受けていた学生たちにも原理を伝えた。 6 そうこうしているうちに、わたしがおかしいという噂が流れ始めた。夫の葬式に参列した学生たちは、私が泣かなかったと言いながらまた別の噂を流した。実は私はその時、天から啓示を受け、子供たちにも泣かせないようにしていたのだ。 7 韓忠嬅先生の決心が完全に固まった後、伝道は主に韓忠嬅先生が担当した。 姜貞遠氏、李桂淳氏、林承姬氏など梨花女子大の女子学生をはじめ、車萬春氏、崔元福氏、李小淡氏が伝道され、食口が日に日に急増していった。それで梨花女子大では、私たちを鋭く注視するようになった。 8 金活蘭氏は結局、金永雲氏に私の家に行って、その集団(当時、私たちの教会をこのように呼んだ)が何をしているのか、隈なく調べてくるよう命令したのだ。ちょうど年末だった。 9 金永雲氏が風呂敷包みを持って私の家に現れたが、その時私たちは 金永雲氏の思わくを知らず、ただ韓先生に伝道されてきたんだとばかり思っていた。金永雲氏は一日中いて、私の家に泊まることになり、劉(ユ)先生と一対一で激論を交わしながら講義を聞くことになった。 10 当時、金永雲氏は二つの神学校を卒業した神学教授だった。6日ほど経って、金永雲氏は霊通する食口に会わせてくれと言った。霊通するおばあさんたちとしばらく話を交わした後、自分が研究したスウェーデンボルグの霊界の内容と合致すると言って、ついに原理の前にひれ伏し先生の前でこのみ意に従うと決心した。私たちはみんな拍手で彼女を歓迎した。 11 そしてはじめて彼女は、自分がここに来たのは、金活蘭氏の調査命令があったからだと打ち明けた。金永雲氏までもこちらに来てしまうと、金活蘭氏は新しい妨害案を練った。それが「梨大学生退学事件」だったのである。 12 私の家に毎日新しく伝道された人たちが訪ねてきた。クリスマスイブには、三十人あまりの食口が、五坪の広い部屋で、先生のみ言葉を聞きながら徹夜をしたりもした。その日の記憶が生々しい。午前2時頃、先生が祈祷している時に役事が起き、すべての食口が家が吹っ飛ぶくらい“アボジ”を叫び、磁石に鉄がくっつくように先生の前に飛んでくるのだった。 13 秀卿氏と孝敏氏は上着が脱げるほど転げ回ったりもした。近所に銀行の社宅が沢山あるのに、明け方にそんな騒動が起きたので、私は役事が起きないようあくせくしていた。黃煥菜氏、安昌成氏、柳光烈氏、李鎭泰氏、朴承圭氏もその頃に入ってきた。 14 龍山学校の地理の先生であり、吳承澤氏の義兄だった安昌成氏は、吳承澤氏を連れ出すために来たんだが、原理を聞きながら、『そうだ! そうだ! 』と原理のみ言葉に感服する姿が純真な子供のようだった。 15 韓方医として現在ハワイにいる盧東輝氏は、その頃、男子大学生を大勢伝道した。一度は20人もの男子大学生を連れてきたこともある。次第に伝道がうまく行き、五坪の部屋に人がいっぱいになり、女性食口たちが毎日のようにオンドル部屋を二つ占め、寝泊まりもして、銀行の社宅である私の家は、まるで旅館のように騒々しかった。言うなれば、この段階に金永雲教授が入ってきたのだ。 16 講義は初めて来た人には夕方に来て聞くようにし、3日過ぎた人は大概何泊修練会式で3日間泊まりながら講義を聞いたりした。講義を私の家で本格的に行うようになると、風景写真もあえて私の家に運び、玄関のドアから向かいの3坪の和室で孝敏氏と孝永氏が担当した。 17 先生はたいてい12時近くまで話して下さり、遅くなって教会に帰られなくなる時は、休まれるのに適当な部屋がなくて写真室として使っていた部屋で休まれたりした。その部屋は暗室として使われていたので、部屋のドアはすべて黒い毛布で覆われていた。 18 それを変な目で見る人がいたようで、裸で踊るという謀略もそうして生まれ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先生が刑務所に収監され、検事が調書を作成した書類を持ってきて私を尋問したが、私の家の構造の図面を描いて部屋ごとに誰がいたのか? 19 先生はどの部屋で寝て、ふとんは誰が敷いたのかまで聞くので、私は貴いお客さまには家の主がお世話をするのが礼儀ではないかと言って、あなたが貴い客として私の家へ来たら私がお世話をするだろうと言ったことがあった。その頃、私の家で1~2回講義を受けた人たちを合わせると、数百人は越えると思う。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