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마조프의 형제(Brat'ya Karamazovy) (중)
차 례
제 2 부
제 6 편 러시아의 수도사
제 3 부
제 7 편 알료샤
제 8 편 미챠
제 9 편 예심
제 6 편 러시아의 수도사
1,조시마 장로와 그의 손님들
알료샤가 불안과 고통스런 마음을 안고 장로의 암자에 들어섰을 때, 그는 깜짝 놀라 멈칫 발길을 멈췄다. 이미 의식을 잃고 하늘 나라로 가고 있으려니 염려했던 장로가 힘이 빠져 축 늘어져 있기는 하였으나, 명랑하고 쾌활한 얼굴로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안락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알료샤가 오기 15분 전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손님들은 그 이전부터 암자에 모여들어 장로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장로께서 오늘 아침에 친히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바와 같이 반드시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사람들과 얘기 할 것'이라는 파이시 신부의 자신 있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파이시 신부는 숨이 넘어가고 있는 장로의 이 약속과 모든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설혹 장로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숨이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일어나서 작별 인사를 나누겠다는 약속을 들은 이상 그는 죽음 자체까지도 믿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이 다시 제 정신이 들어 약속을 지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렸을 것이다.
사실 조시마 장로는 오늘 아침 일찌기 잠자리에 들면서 그를 보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ㅡ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들과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스런 당신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 흉금을 털어 놓기 전에는 죽지 않을 거요.
어쩌면 마지막 말이 될 오늘의 담화를 듣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장로를 정성껏 모셔온 그의 친구들로서 그들은 네사람이었다. 이오시프 신부, 파이시 신부, 그리고 암자의 총책임자인 수도사제(修道司際) 미하일 신부도 있었는데, 그는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고 학식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강한 정신력과 확고 부동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겉으로 보기엔 엄하게 보였지만 마음 속에는 자못 부드러운 숨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는지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네번째 손님은 빈농 계급 출신의 안핌이라는, 아주 늙고 순박한 수사였다. 그는 거의 문맹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과묵하고 조용하여 남들과 별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더할수 없이 겸손한 사람으로서 마치 자기의 지혜로는 미칠 수 없는 그 어떤 위대하고도 무서운 것에 겁먹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수사를 조시마 장로는 무척 사랑해서 일생 동안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대해 주었다. 장로는 예전에 안핌 수사와 둘이서 수년 동안 거룩한 러시아의 전역을 두루 돌아다닌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장로는 누구보다 그와 얘기를 제일 적게 했을 것이다. 그 방랑은 아주 옛날, 즉 40여년 전에 조시마 장로가 코스트로마의 이름 없는 한 가난한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이 가난한 수도원을 위해 모금을 하려고 안핌과 같이 순례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주인이나 손님들이나 모두 장로의 침대가 놓여 있는 두번째 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방은 매우 좁아서 네 사람은 조시마 장로의 의자를 둘러싸고 첫째 방에서 가져온 의자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그 외에 견습 수도생 포르피리는 서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여 성상 앞에 등과 촛불을 켜서 방을 밝히고 있었다. 문턱에 서서 어리둥절해 하는 알료샤를 보고 장로는 반갑게 미소를 짓고 한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말했다.
"어서와, 조용한 친구. 잘 왔어. 이제야 와 주었구먼. 자네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알료샤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무엇이 폭발하여 그의 혼을 전율케 하였다. 그는 흐느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러지? 우는 건 좀더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장로는 오른손을 알료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빙그레 웃었다. "나 좀봐. 나는 이렇게 일어나 앉아 얘기를 하고 있잖아. 아직도 20년은 더 살지도 모르지. 어저께 브이셰고리예에서 리자베타라는 딸을 데리고 온 그 착하고 친절한 여자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주여! 그 부인과 어린 딸 리자베타를 위해 기구해 주옵소서!(그는 성호를 그었다) 포르피리, 그 부인의 성금을 내가 일러준 곳에 갖다 주었는가?"
그것은 어저께 '나보다 더 가난한 여자에게' 전해 달라고 하며 장로를 숭배하는 그 명랑한 부인이 내놓은 60코페이카가 생각나서 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헌금은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고행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자기의 노동으로 번 돈이어야만 했었다.
장로는 이미 어젯저녁에 포르피리를 보내어 요 근래에 화재로 집을 잃고 애들과 같이 구걸을 다니는 어느 부인에게 전하게 하였던 것이다. 포르피리는 '익명의 자선가로부터' 들어온 돈을 분부대로 전했노라고 급히 보고하였다.
"자,이제 일어나게, 이 사람아." 장로는 알료샤에게 말을 계속했다. 자네 얼굴 좀 보세. 그래, 집에 가서 형님을 만나 봤나?"
장로가 이처럼 확고하면서도 정확하게 두 형들 가운데서 하나를 가리켜 묻는 것이 알료샤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느 형을 말하는 것일까? 장로가 어제와 오늘 자기를 읍내로 보낸 것은 그 형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분 중에 한 분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알료샤가 대답했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어제 내가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절을 한 자네의 맏형 말이야."
"어제는 만났습니다만, 오늘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가서 찾아보도록 하여라. 내일 가서 빨리 찾아보도록 해. 만사를 제쳐놓고 빨리 서둘러야 해. 아직은 그 무서운 일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 그 형이 앞으로 겪어야 할 위대한 고난 앞에 머리를 숙였던 거야."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제 장로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하는 광경을 목격한 이오시프 신부는 파이시 신부와 서로 눈짓을 교환하였다. 알료샤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장로님, 선생님." 몹시 흥분하여 그는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 모호 합니다. 형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이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너무 알고 싶어하지 마라. 어제 나는 어떤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마치 그의 전 운명이 어제 그의 눈 속에 나타나 있는 것만 같았어. 그 눈길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나는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려는 일을 순간적으로 알아채고 무서워 몸을 떨었어. 내 평생 그와 같은 표정을 본 일은 한 두 번밖에 없지만 그들은 자기의 전 운명을 자기 얼굴에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했고, 불행히도 그 사람들의 운명은 내 생각대로 들어 맞았어.
알렉세이, 내가 그를 찾으라고 너를 보낸 것은 같은 형제로서 너의 얼굴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달린 것, 우리의 운명역시 마찬가지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한 말씀을 잊지 말아라.
한데 알렉세이, 나는 지금까지 너의 얼굴을 보고 마음속으로 축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장로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이 수도원 담 밖으로 나가더라도 속세에서도 수도사처럼 살게 될 거야. 많은 적들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 적들조차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야. 인생 역시 너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겠지만 그것으로 전화위복이 될 수도, 생을 축복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을 축복하게 할 수도 있을 거야. 이것이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 그렇지, 이게 너라는 인간이야. 여러 신부님들, 선생님들," 하고 그는 정다운 미소를 띄우고 손님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오늘날까지 나는 이 젊은이의 얼굴이 왜 그처럼 사랑스러운지 당사자인 알렉세이에게 조차 말한 적이 없었소. 이제야 말이지만 그의 얼굴은 나에게 추억과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소.
내 인생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 내게 형이 하나 있었는데, 불과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내가 보는 앞에서 죽어갔지요. 그 후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그 형이 내 운명에 있어 지표 내지는 하늘의 암시와도 같은 존재였음을 차차 믿게 되었지요. 만약에 그 형이 내 인생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라는 존재가 아예 없었다면 아마 나는 수도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이 보람있는 길로 들어서지 못했을 테니까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나의 소년 시절에 처음 나타났지만 내 인생의 나그네 길도 다 저물어 가는 지금 또다시 나에게 나타난 것 같소. 여러 신부님들, 이상하게도 나는 알렉세이가 그와 얼굴은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많이 닮아 알렉세이를 그 젊은이로, 즉 나의 형으로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형님이 무슨 추억과 영감을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의 황혼녘에 신비롭게 나를 찾아온 것만 같단 말이오. 그래서 이러한 나 자신과 이처럼 기이한 꿈에 놀라기까지 하였지요. 포르피리, 너 내 얘기 듣고 있나?" 하고 그는 자기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견습 수도사를 돌아보았다.
"내가 알렉세이를 더 사랑한다 해서 네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이젠 그 까닭을 알겠지. 하지만 너도 사랑하고 있어. 그걸 알아 주면 좋겠다. 나 역시 네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럼 친애하는 여러분, 나는 지금 이 젊은이, 즉 내 형님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내 평생 그보다 고귀하고 예언적이며 감동적인 일은 없었으니까요. 내 가슴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나의 전생애를 되풀이하듯 지난날들을 모두 되돌아봅니다,.............."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조시마 장로가 그 생애의 마지막 날에 찾아온 손님들과 나눈 마지막 나눈 말은 부분적으로 기록이 되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가 장로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기념으로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날의 담화 만을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의 담화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거기에 첨가 하였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게다가 이 기록을 보면 장로의 담화는 마치 자기 생애를 친구들에게 소설 형식으로 들려준 듯 중단 없이 계속되지만, 그 뒤의 기록을 보면 이건 사실과는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저녁의 담화는 주인과 손님이 함께 주고받은 것이었으므로 손님들이 주인의 말을 가로채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도 모두 이야기에 참여하여 말대답도 하고 자기네 의견을 말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로는 이따금 숨이 차서 말이 막히고 심지어는 잠시 쉬려고 침대에 눕기까지 하였으므로 중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는 아주 잠들어 버리지는 않았고 손님들도 역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성경낭독으로 한 두 차례 담화가 중단되기도 했는데, 낭독은 파이시 신부가 했다.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장로가 그 날 밤 안으로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는 낮잠을 푹 자고 났으므로 그 생애의 마지막 날 저녁에 친구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갑자기, 새로운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것은 그의 내부에 믿기 어려운 신기한 활력을 준 최후의 감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에 불과 했다. 그의 생명이 갑자기 뚝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지금은 담화의 내용을 빠짐없이 다 들추기보다는 단지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의 기록에 의해 장로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국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편이 더욱 간단하고 그만큼 힘이 덜 들테니까.
다시 되풀이 하지만 알료샤가 이전의 담화 속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하여 여기에 첨가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첫댓글 장로님이 나오시니까 차분하게 느껴지네요...
조시마 장로를 통해서 작가의 영적 직관력을 짐작할 수 있을거 같아요. 참 느낌 좋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ᆞ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