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眩暈의 迷宮
현기증이 영혼을 잠에서 깨우다
A. 첫 멀미, 수평선을 보아라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인생은 뒤돌아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지만, 앞을 향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키르케고르)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땅을 의심하지 않는다. 발을 내디디면 땅은 발을 받아주었고, 몸을 기울이면 다시 중심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자신이 균형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인간이 균형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균형을 제공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천추객은 그 사실을 아주 젊은 날, 바다 위에서 처음 알았다. 대양으로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바다를 동경한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수평선, 별빛 아래에서 밤을 새우며 배를 운항하는 삶. 그에게 바다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바다는 그에게 자유를 주기 전에 먼저 멀미를 주었다. 귀국했을 때 누군가 '바다를 동경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바다에서 육지를 볼 때의 동경만큼에 비하면 그건 동경도 아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만 톤의 강철 거인은 출항과 함께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세계 전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천장이 기울고, 벽이 기울고, 몸속 장기들까지 어디론가 쏠려가는 것 같았다. 그때 천추객은 처음으로 알았다.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준을 잃는 일이라는 것을. 강철처럼 단단하다고 믿었던 의지는 그 순간 물처럼 풀어졌다. 창백해진 얼굴. 식은땀. 뒤틀리는 위장. 끝없이 밀려오는 구토. 천장이 움직이는 것인지 자신이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바다에 대한 동경 때문인가. 3년의 승선으로 병역을 대신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는가. 국가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분 뒤에, 안락에 대한 욕망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의심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일등항해사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연민이 없었다. "일어나! 갑판으로 나가!"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갑판으로 나가라는 것인가. 그러나 일등항해사의 목소리는 다시 떨어졌다.
"가까운 바다를 보지 마라." 잠시 침묵. 그리고 한마디. "저 멀리 수평선을 보아라."
그 말은 단순한 멀미 처방이 아니었다. 훗날 일흔을 넘긴 뒤 돌아보았을 때, 천추객은 그 말이 자기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첫 번째 철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까운 것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먼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비틀거리며 갑판으로 나갔다. 선체는 좌우로 흔들렸다. 속은 뒤집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배는 흔들리고, 몸도 흔들리고, 세상도 흔들렸다. 그런데 수평선은 그대로였다. 그때 그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중심은 흔들림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날 그는 멀미를 완전히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다만 처음으로 멀미와 함께 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그가 수십 년 동안 바다에서 배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B. 육지의 관성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 for it's not the same river and he's not the same man.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그 강도 같은 강이 아니고, 그 사람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일흔을 넘긴 노항해사가 되어 돌아보니, 멀미는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인간은 움직이는 우주에 살면서 움직이지 않는 세계를 꿈꾼다. 사랑하면서 이별하지 않기를 바라고, 젊음을 살면서 늙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모두 육지를 사랑한다. 육지는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한 너는 안전하다."
그러나 바다는 다르게 말한다. "네가 서 있다고 믿는 그곳조차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멀미였다. 천추객은 훗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렇게 불렀다. 육지의 관성. 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신도 그랬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에 머무르고, 이미 지나간 사랑을 놓지 못하고, 한때의 성공을 현재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 모든 것은 정신의 멀미였다. 세상은 움직이는데 나만 움직이지 않으려 할 때, 영혼은 어지러워진다.
C. 딸아이가 가르쳐 준 것
Not till we are lost do we begin to find ourselves.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그 깨달음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은 훨씬 뒤였다. 그가 선장이 되어 가족을 배에 태웠을 때였다. 세 살도 채 되지 않은 딸아이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배가 흔들렸다. 아내는 불안해했다. 그런데 아이는 웃었다. 기우뚱. 또 기우뚱. 갑판이 기울 때마다 아이의 작은 몸도 함께 기울었다. 그러다가 넘어졌다. 그런데 울지 않았다. 다시 일어났다.
천추객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배에게 "흔들리지 마"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배가 흔들리면 함께 흔들렸고, 다시 중심을 찾았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순응이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움직임을 자기 존재의 리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날 천추객은 깨달았다. 아이에게는 멀미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육지의 관성이 없었던 것이다.
D. 자유의 현기증 앞에서, 키르케고르를 만나다
Anxiety is the dizziness of freedom.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그날 밤이었다. 천추객이 첫 항해의 선실에서 멀미에 시달리던 바로 그 시간. 침상 곁에 검은 외투를 입은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 깊이 가라앉은 눈. 쇠렌 키르케고르였다. "나그네여, 그대는 지금 몸이 어지러운 것인가, 아니면 존재가 어지러운 것인가?" 천추객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현기증을 알고 있네." 키르케고르가 말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저는 지금 바다 때문에 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자유입니까?"
키르케고르는 미소를 지었다. "육지에서는 세계가 그대를 대신하여 중심을 잡아주지.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네.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인간은 불안을 경험한다네.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지. 두려움에는 대상이 있네. 폭풍이, 죽음이 무섭지. 그러나 불안은 무엇이 일어날지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천추객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절벽 위에서 무서운 것은 떨어질 가능성 때문만이 아니네." 키르케고르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스스로 몸을 던질 수도 있는 자유가 있지. 그것이 자유의 현기증일세."
천추객은 갑자기 자신이 겪은 멀미를 생각했다. 세계가 반드시 이렇게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E. 정신의 무지
The self is a relation that relates itself to itself.
"자아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하나의 관계이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그렇다면 제가 말한 '정신의 무지'란 무엇입니까?"
키르케고르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지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네.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태일세." 그는 아담의 이야기를 꺼냈다. 금지 이전의 아담은 선악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가능성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인간은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하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선택의 가능성은 자유를 낳고, 자유는 책임을, 책임은 불안을 낳는다. "그대도 그러했네. 육지에서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배에 올라오자 세계가 흔들렸네. 처음으로 자신이 세계에 맡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네."
F. 아이와 믿음
He who has learned to be anxious in the right way has learned the ultimate.
"올바르게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자는 궁극의 것을 배운 것이다."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천추객은 문득 딸아이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제 딸아이는 왜 웃었습니까?"
키르케고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온기가 번졌다. "아직 세계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러나 더 높은 경지에 있다는 뜻은 아니네. 아이는 아직 불안을 알지 못할 뿐이지."
"그렇다면 저는 아이처럼 될 수 없습니까?"
"아니." 키르케고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의 무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통과한 뒤 다시 세계를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일세."
천추객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어쩌면 자신의 생애가 그러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젊은 날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다에 올라가자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바다를 건너면서 그 두려움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이제 일흔이 넘어 돌아보니, 그가 얻은 것은 두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이었다.
G. 멀미여, 고마워라
A ship in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built for.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그러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존 A. 셰드)
키르케고르가 사라진 뒤 천추객은 다시 갑판으로 나갔다. 바다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제 그 흔들림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알았다. 멀미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멀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날 이후 수평선은 그에게 단순한 항해의 기준이 아니라 존재의 기준이 되었다. 가까운 것은 흔들린다. 감정도, 육신도, 명예도, 사랑도 흔들린다. 그러나 그 모든 흔들림을 바라볼 수 있는 먼 곳이 있다. 그곳이 수평선이었다.
멀미는 나를 쓰러뜨렸지만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현기증은 내 눈을 흐렸지만 오히려 더 먼 것을 보게 했다. 구토는 내 몸속의 것을 비워냈고 그 빈자리에서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바다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바다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웠다. 나는 세계를 고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인간은 흔들리지 않아서 중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발견하기 때문에 인간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나는 멀미를 미워하지 않는다. 멀미여, 너는 내 육체를 흔들어 내 정신을 깨웠고, 내 삶을 흔들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항해사는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없이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첫댓글 오늘도 머무르면서
공부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암튼 재미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