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나이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열아홉 꽃다운 나이, 고인이라 불리기엔 너무 아깝다. 이 죽음 앞에 나는 죄인 아닌가? 비정규직과 하청구조를 바꾸는데 힘을 보태지 않을 거라면 지하철 요금이라도 비싸게 냈어야 했다. '닫힌 문에서 닫힌 문으로 달려온 내 열아홉 살'이란 소설가 서해성의 시구가 가슴을 저민다.
곧 청년 노동자가 될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묻는다.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꾸짖었던 그 법들 속에 노동자의 안전을 염려하는 법은 있는가? 노동 관련 4개 법안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법인가? 그리고 또, 세월호 구조 때도 외주업체의 도착을 기다렸었다. 국민의 안전은 늘 힘없는 외주업체 손에 달려 있다. 이런 세상은 얼마나 더 죽어야 바뀔까?
어제 한탄했는데 방금 또 남양주에서 노동자들이 죽었다.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포스코 협력업체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사를 보니 하청업체를 협력업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위험한 곳엔 언제나 하청업체 노동자가 있고 죽는 것은 비정규직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19살 청년노동자처럼 모두가 가난하지는 않다. 자본 수익률이 매우 높은 나라다. 그만큼 노동자의 안전과 복지에 돈을 덜 써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내유보금을 많이 축적할 수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서 기업인이 해외원정도박으로 수백억씩 날릴 수 있다. 그 죄 때문에 재판을 받아도 전관 변호사에게 수백억원을 주면 빠져 나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모두가 당연한 관행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것들이 어린 노동자가 생명을 잃는 이유 아닐까? 이런 세상은 언제나 없어질까?
협력업체(=외주업체=하청업체) 청년노동자는 기껏 사발면을 먹으려고 서둘러 혼자 일을 했다. 그리고 죽었다. 둘이 해야 할 것을 혼자 했다고 규정을 위반했다는 누명까지 쓴다. 규정을 바꾸고 인력은 늘리지 않았으니 서류를 다루는 사람들만 책임을 면하겠다는 규정 아닌가? 부끄러운 뉴스도 함께 들린다. 예쁜 아이돌 가수들이 한류라고 전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나라에서 가난한 소녀들은 신발깔창이나 휴지로 생리대를 한다. 누가 이런 나라를 만들까? 나는 무엇을 했나? 이 순간에도 나는 ‘부끄러운’으로 써야 할까 ‘슬픈’으로 써야 할까 그런 걸로 고민을 했다.
일하던 사람이 죽는 사건을 보도하는데 보수 언론들은 노동자를 꼬박꼬박 근로자라고 부른다. 과거 교사와 교수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했던 사람들이 근로자란 말을 즐겨 썼었다. 시간을 바친 일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 아닌가. 노동자는 사실이고 근로자는 분칠한 이름이다. 협력업체도 분칠한 이름일 거다. 노동자란 말이 더러운가? 분칠하지 않았대서 그 죽음도 더러울까?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신음 소리가 들린다. 망가지는 지구도 함께 보인다. 타락한 나의 문명이 나를 병들게 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 여유, 안락, 부, 건강이라는 행복의 수사 뒤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 언제나 나의 행복은 죽음과 멸망을 바닥에 깔고 달려온다. 나는 무엇을 분노해야 하나? 2016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