卒業有感
졸업장을 든 채 눈물이 글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선 그들이 보고 싶다. 학교의 행사 가운데 좀 어폐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희비가 엇갈리는 일은, 아마 졸업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날이 오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한 학생들에게는 졸업은 다시없이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제간의 결별(?)이 서운해서 가끔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교장은 회고사에서 졸업을 정거장을 떠나는 기차에 비유한 일이 있었다. 앞서 떠나간 차가 탈선하는 일 없이 궤도 위를 잘 달릴 때 후속 차량들이 그 뒤를 따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예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기차가 정거장을 떠날 때는 힘차게 기적을 울리듯이 졸업식장의 울음바다도 출발의 기적소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교직생활에서 졸업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의 연례행사로써 만성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희비가 엇갈리는 그 묘한 기분은 여간해서 졸업을 못하니 이상한 일이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하고 한국의 길은 서울로 통하는데 우리 교육대학의 길은 스승으로 통한다고 말한다. 우리 대학에서 가장 즐겨 쓰는 말 가운데 '사제동행' 과 '스승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다. 직설적인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뒤의 캐치프레이즈를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본다.
“스승이 되기 전에 학생이 되고 스승이 된 뒤에도 학생이 되라" 라고.
인생수료식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는 모두 학생일는지 모른다. 도서관은 아무도 졸업할 수 없다는 말이나 요즘 흔히 쓰는 '평생교육' 보다는 '평생학습'이 더 적절한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졸업과 가장 인연이 깊은 벌레는 아무래도 반딧벌레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은 반딧벌레가 거의 멸종 되었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는 그 고사(故事)가 이해가 잘 안 갈지 모르지만 반딧불과 눈(雪)으로 책을 읽었다는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졸업식 축사에는 의례히 '형설(螢雪)의 공'이 인용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학생들은 반딧불을 모르고 지내는 지가 오래이다. 그대신 대개 휘황찬란한 반딧불 빛깔의 형광등(螢光燈) 밑에서 공부를 한다. 앞으로의 졸업식 축사에 '형설의 공' 대신에 '형광등의 공 헛되지 않아서 ・・・・・' 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반딧벌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졸업과는 가장 관계가 깊은 벌레가 되는 셈이다.
지난날에는 반딧벌레가 하도 흔해서인지 개똥벌레라는 지속한 이름으로도 불리웠었는데 이제는 아주 귀한 벌레님이 된 것 같다. 멸종되어가는 것이 어찌 반딧벌레 뿐일까만 이들이 날아다니는 낭만적인 여름밤을 앞으로는 두고두고 기대하지 못할 것인가?
졸업의 계절에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그 이름 개똥벌레님!
옛날 서당에서는 오늘날의 졸업식에 해당되는 것에 '책씻이' '또는 책례(禮)'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책 한 권을 다 떼고 나면 훈장과 동문수학한 서생들에게 한턱을 내는 정겨운 풍습이다. 어떻게 보면 졸업식보다 사은회가 더 가까운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은회에서 생각나는 일은 나의 중학 선배 한 사람이 사은회의 여흥(餘興)시간에 농담이 지나쳐서 졸업을 앞두고 정학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람이 만담조로 "졸업 후에 큰 회사를 하나 꾸미면 모교의 교유(敎諭)들을 고용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내용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던 것이다. 만담은 즉각 제지되었고 장본인은 훈육주임에게 불려갔다. 그렇게 되고 보니 여흥은 금시에 파흥(破興)이 되어 여흥 아닌 여흉(餘兇)이 된 셈이었다.
후문으로는 일부 교유(敎諭)는 철부지의 악의없는 언행으로 돌리고 관용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측, 특히 일본인 교유들은 강경했던 모양이다. 고용자의 대상을 암암리에 그들 일본인 교유들을 지목한 것이 아니냐고 민족감정으로 몰아서 퇴학도 불사한다는 강경조치를 주장했다던가?
결국 졸업 전날까지의 정학으로 낙착이 되었지만 스승에는 국경이 없는 것처럼 일본인도 은사는 은사인 것이다. 이런 데까지 민족감정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분들의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화제가 조금 빗나갔는데 '책씻이' 가 되었건 아니면 사은회가 되었건 인정 속에 오고 가는 한 턱은 받아서 좋고 내서 좋은 것일것이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는 무턱대고 '턱'을 즐기는 경향이 있어서 가끔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잔고(殘高)가 아슬아슬한 하숙생들의 부형장학금을 우려내어 하숙 옮긴 입방(大房) 턱, 새로 사입은 옷의 착복(着服)턱 등 그럴듯한 이름들을 붙여서 쳐들어가는 모양이다. 이런 가운데서 젊은날의 호연지기를 길렀다면 할 말은 없지만 호연지기(浩然之氣)아닌 실속은 없고 말만 떠들썩한 호연지기(豪言之氣)로 끝날까 걱정스럽다.
졸업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꽃다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입시(入試)의 계절에는 엿장수, 찰떡장수들이 한몫을 보듯 졸업의 계절에는 꽃장수들이 단단히 대목을 본다. 그것도 조화아닌 생화를 몇 아름씩 갖다놓고 팔아대는데 한겨울인데도 국화, 카네이션 등이 제철을 방불케 한다.
서 시인( 徐詩人)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봄부터 울었나보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묵은 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나 천둥, 무서리 대신에 이제는 비닐하우스, 난로, 연탄 등이 등장하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소쩍새나 천둥, 무서리에 견주어서 시어(詩語)로서는 삭막하기 이를데 없지만 시인아닌 꽃장수들로서는 졸업식의 대목을 보기 위해서 국화꽃은 그렇게라도 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꽃장수들에게는 핀잔 먹을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역시 진짜 꽃다발은 '마음의 꽃다발'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화향기보다 짙고 카네이션보다 더 붉은 것은 '마음의 꽃', '사랑의 꽃' 그리고 '정성의 꽃'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것들을 한데 모아서 여기 수많은 꽃다발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아쉬움을 남기고 교문을 나선 우리 졸업생들에게 모두 한아름씩 안겨주고 싶다. 가난한 접장의 마음의 선물로.
(隨筆公苑3집, 1983.3.)
첫댓글 심성이 바다같이 넓고 맑았던 교수님의 그때 그 시절이 오버랩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떤 교장은 회고사에서 졸업을 정거장을 떠나는 기차에 비유한 일이 있었다. 앞서 떠나간 차가 탈선하는 일 없이 궤도 위를 잘 달릴 때 후속 차량들이 그 뒤를 따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랜 교직생활에서 졸업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의 연례행사로써 만성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희비가 엇갈리는 그 묘한 기분은 여간해서 졸업을 못하니 이상한 일이다.
“스승이 되기 전에 학생이 되고 스승이 된 뒤에도 학생이 되라" 라고... 인생수료식이 끝날 때까지는 우리는 모두 학생일는지 모른다. 도서관은 아무도 졸업할 수 없다는 말... 본문 부분 발췌
오랜 교직생활을 하셔서 무덤덤 해질만도 하실터인데 그 묘한 기분을 졸업하지 못하시는 것은 원선생님이 진정한 스승이시기 때문일 것잉입니다... 안생 수료식이 끝나지 얺은 우리는 여전히 인생학교의 학생입니다. 성실한 학생으로 오래도록 남기를 ^^
조성순 선생님 !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