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미술 (Graffiti art)
낙서는 일찌기 원시시대와 고대 어느문명에도 이루어 졌으며.
원래 지하 묘지나 자연물과 비문, 숫자, 그림과 같이 어느곳에나
존재하였으며 낙서가 미술의 주제로 등장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이며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싸이 트윔블리 (Cy Twombly)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낙서의
표현방법에 관심을 보였고,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는
도시의 벽을 주제로 한 이미지에 낙서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첫번째로 낙서가 다른 낙서와 구별되기
시작한 것으로 뉴욕에 있는 Taki 였다.
1971에서 뉴욕 타임즈는 이 작가의 관해 논문을 발간되었는데
그것은 Taki 183 (TAKI는 그의 이름 Demetrius의 예명이고 183는 그가 산 거리의 수)이다.

그로인해 낙서의 다른 모양과 구별하는 것을 시작되었고 많은
호기심을 자극한 Taki 183은 뉴욕의 거리에 이와 유사한 낙서가
구석구석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쟝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에 와서
길거리를 어지럽히는 낙서라는 인식과 비판을 종식시키고
전세계 유력한 미술상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
싸이 트윔블리 (Cy Twombly) (1928,4,25 ~ )

Leda and The Swan (1962)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28 ~ 1956,8,11)

Easter and the Totem (1953)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 (1923 ~ )

Variacions sobre un tema musical 1 (1987)
쟝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2,22~1988,8,12)

SAMO Shit

Aaron (1980-81)

Untitled (1983)

Big Rat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힙합의 MC, DJ, B-BDY와 함께 4대 요소중에 하나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GRAFFITI는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작가가 남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남는 것이기에 게다가 그 행위 자체가 불법적인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에(벽에 그리는 낙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도 힘들다.
드러난 단어적 어휘로 본다면 그리스어의 Sgraffito, 이태리어의 Graffito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긁다. 긁어서 새기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그 맥은 고대의 동굴벽화로부터 이집트의 상형문자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항상 같이 존재 해왔으며 그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다. 지금은 흔히들 벽에다가 스프레이로 문자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총칭하여 일컫지만 엄연히 예술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그 소재나 형태, 공간은 얼마든지 작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어떤 것을 GRAFFITI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거리의 힙합문화의 요소로 등장한 GRAFFITI는 뉴욕의 할렘가를 중심으로 유래가 되었는데 그 당시 흑인들의 인종차별과 별다른 문화적 공간이 없었던 그들은 벽이나 차량등에 스프레이 낙서로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BOMBING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는 GRAFFITI가 불법이었을 당시 몰래 작업을 하고는 사라져 버려서 마치 폭탄이 터진 것과 같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그림이나 인물을 똑같이 묘사하는 Imitation, 사회에 대한 발언이나 대중에게 알리고 싶은 글들을 적어놓은 Social words ,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Tagging이 있다. Tagging은 사전적인 의미라면 꼬리표라는 뜻이다.
보통 자신의 이름이나 NICK NAME을 디자인하여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GRAFFITIST들을 TAGGER라고도 부른다. TAGGER들은 BLACK BOOK이라고 하는 연습장에 그때그때 칼라 패턴이나 TAGGING아이디어를 스케치한다.
현대와 같이 사회적으로 복잡한 세계 속에서 최근까지 문화예술 외각에서만 존재해 왔던 낙서미술(Graffiti)에 과한 양면성을 미술계 내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낙서미술은 경멸과 찬탄을 동시에 받으며 논쟁 속에서 발전해 왔다. 뉴욕시의 공공재산 위에 그려있는 낙서미술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적 의문을 갖게 한다. 어떤 관점에서 문화, 예술의 파괴행위가 옳은 것 또는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훌륭하다든지 혹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식의 평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인가? 온 도시 벽면에 난잡하게 쓰여진 낙서는 우리문화 속의 개인주의의 파괴적인 난폭함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새로운 진정한 집단예술(community art)의 형식인가?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낙서는 위반과 사회적 무정부상태,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상징해 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한 문화예술의 파괴행위로 보았다.
곧 질서정연한 사회와 법률 그리고 규범들을 더 이상 당연시 여길 수 없게 하는 범죄행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낙서미술을 억압받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순수 미학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낙서미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계에 10년이 넘도록 등장해 왔다. 그것은-뮤지컬과 댄스에 대응하는 '랩'과 '브레이크 댄스'와 함께 - 할렘(Harlem), 브룩클린(Brooklyn), 그리고 브롱크스(Bronx)에서부터 맨해튼 도시 클럽과 때로는 질서와 가치관을 갖춘 신 공간에까지 수입되었다.
첫번째 낙서미술의 대형 전시회는 1975년 피터 슈엘달이 만든 소책자와 함께 예술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낙서미술은 1980년 6월 콜랩(Colab-합동 프로젝트)사가 주관한 '타임 스퀘어쇼(Time Square Show)'이후에야 비로소 미술로 부상했고, 그것이 주변 미술가들을 위한 출구라고 여긴 두 미술가 스테판 아인즈와 조 루이스에 의해 사우스 브롱크스사의 상점 앞에 있는 화랑 '패션 모다'에서 1978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인즈와 루이스가 뉴올리언즈와 뉴욕의 거리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관장하기 의해 이들을 신 박물관에 초대한 후에 패션 모다의 활동이「비리지 보이스」에 상세히 실리게 되었다.
반면, 전적으로 새로운 다민족적, 다인종적 미술가 세대가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집단생활의 절망 가운데서 나온 이들로서 어느 날 갑자기 뉴욕의 중견 매매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작품이 구입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영향을 끼쳤던 전시회 '뉴욕/뉴 웨이브(New York/New Wave)'는 디에고 코르테즈의 큐레이팅으로 1981년 P.S.I에서 열렸는데, 그때의 풍조를 잘 융합시켰다.
패션 모다는 또한 낙서미술이 담긴 티셔츠, 단추, 포스터 등의 다양한 판매를 위해 1982년 '도큐멘타'에 부띠끄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와 같은 몇몇의 결정적인 사건들로 인해 복합적 문화 고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하층계부터 삶을 시작하고, 지하철과 공공물 벽에 자신들의 주장을 적어놓았기 때문에 비공식적 낙서미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는 다른 어느 것보다 고상함과 영웅주의를 표현한 듯 보이고, 너무나 순수함에 몰두한 나머지 지역미술에서의 독특함을 거의 잃어버린 '국제적'모더니즘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미술계의 제도적 틀로의 통합, 그리고 성공윤리로의 계속적인 흡수는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그들 중 하나가 낙서미술 현상을 지하철에 그린 스프레이 그림과 같은 하나의 특정한 의식이나, 일련의 독단적인 의도들로는 더 이상 특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의 낙서미술가들은 침략적이며 공격적인 거리예술에 헌신적인 반면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지하철역에 잠시 몇 문장의 낙서를 했던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같은 사람은 현재 미술계에서 성공적인 화가로 관심을 끌고 있다.
GRAFFITI 자체가 거리문화였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예술가들의 창작작품에 멋진 소재로도 활용되어 전문SHOP도 있고 어떤 도시에서는 자유롭게 작업 할 수 있는 벽까지 제공된다고도 한다.
아직 국내에는 보편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대, 대학로,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