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나들이
가을을 맞아 2박 3일 간의 여행을 떠났다. 친구부부와는 서울에서 기차로 내려가 『익산역』에서 합류하였다. 말로는 노래 ‘고향역’의 주 무대라고 하면서 코스모스 한 송이도 없어 의아했다. 기다리던 동생부부의 차를 타고 먼저 찾은 곳은 『김제』에 있는 「시민체육공원」이었다.
우선 선친의 시비를 찾아 참배하였다. 공원의 중앙에 위치하여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주변의 말끔한 수목들이 실개천과 잘 어울린 자연 속에 검정색의 단양산(丹陽産) 오석(烏石)에 새겨진 시비(詩碑)가 오늘따라 더욱 돋보인다. 종종 찾는 곳인데 하늘은 푸르고 기온도 온화한 가운데 군데군데 단풍이 물들고, 호수에는 이름 모를 물 새 들이 헤엄치고 노는 광경이 마치 고즈넉한 선경(仙境)을 찾은 느낌을 주었다. 인근에 있는 강암(岡庵) 선생의 서도비(書道碑)에도 들러 이 나라의 서예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어른의 위대한 업적을 추모하였다.
『줄포』에 있는 유명 식당에 들렸는데 1시간 정도를 기다리다가 정갈하고 맛있는 반찬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무엇보다 수년 만에 먹는 ‘홍어애탕’이 일품이었다. 이어서 『람사르 습지』를 찾아 세계최고라는 300톤 무게의 고인돌을 구경하였다. 시간이 촉박하여 구석구석을 돌아보진 못했지만 과거 여러 개의 마을이 수몰되면서 자연적으로 조성된 습지에 수많은 동,식물들이 번성하면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유산이었다.
이어서 간 곳은 『청량산』에 있는 「문수사」(文殊寺)였다. ‘애기단풍’으로 이름난 곳인데 수령이 100년에서 400년 된 단풍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아직은 예쁜 단풍이 물들지 않아 사찰까지 왕복하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자란 단풍나무 숲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곳의 볼거리는 노승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의 ‘석조승상’(石造僧像)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그곳을 파보니 「문수보살」의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고창』 읍내에 있는 대규모의 리조트 단지에서 ‘수정방’을 반주로 하여 휴식하였다. 주로 「선운사」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글을 함께 읽고, 이 지역과 인연이 깊은 소설인 『장마』와 『완장』을 쓴 「윤흥길」 작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더구나 친구의 부인이 대학교수 출신답게 다방면에 해박하니 대화가 부드러웠다.
다음날에 먼저 간 곳은 『고창읍성』(高敞邑城)과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신재효」의 고택이었다. 서민들의 애환을 창(唱)으로 위로하는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복원과 관리가 잘 된 유적이었다.
이어서 ‘고인돌 지역’을 찾았다. 1500기가 넘는 고창 고인돌 유적 중 447기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먼저 들린 곳은 도산리 지석묘(支石墓)였다. 전형적인 ‘탁자형’의 북방식의 고인돌로 양쪽에 단단한 돌로 중앙의 묘석을 받치고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이 고인돌을 망군대(望君臺) 혹은 망북단(望北壇), 혹은 괴인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주변에는 7~8개의 무너진 고인돌과 함께 남아 있다.
나오는 길에 누가 불러 돌아보니 한 농부가 감을 따면서 먹고 가라고 하였다. 빨갛게 잘 익은 대봉 홍시였는데 수분도 많고 맛도 매우 좋았다. 단단한 감으로 곶감을 만들려고 하니 무른 감은 모두 가져가라고 하였다. 덕분에 시골 인심에 젖어 일행 모두 마음껏 홍시 감을 먹고 자루에도 가득 담았다.
이곳에서 조금 더 이동하여 『상갑리 지역』의 야산에 있는 고인돌의 장관을 보았다. 이곳의 고인돌은 2,500년 전부터 약 500년 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묘로 알려졌다. 주로 남방식 지석묘가 많은데 ‘기반식’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석관을 매장하고 그 위에 5∼6개의 괴상석 또는 작은 판석으로써 부정형의 괴석, 혹은 판석으로 된 개석을 괴어 놓은 것이다.
「선운사」(禪雲寺)는 예전에도 왔던 사찰이다. 내심으로는 예전에 미처 살펴보지 못한 장소를 찾아보려는 심사에서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계획한 곳이다. 다름 아닌 「추사」의 명필 글씨가 새겨진 비석을 보기 위함이었다.
경내에 들어가 먼저 찾은 곳은 사찰의 맨 안쪽에 위치하여 입구로부터 꽤나 거리가 있는 「도솔암」(兜率庵)이었다. 도솔암(兜率庵)은 「선운사」의 산내 암자로 「선운사」와 함께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창건된 곳이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도솔천’을 따라 수목이 울창한 길을 상당히 거리를 올라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최고 명당은 전국에 산재한 유명사찰이란 생각이 든다. 제법 고도가 높은 암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산줄기가 연이어 이어진 가운데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는 단풍의 울긋불긋한 색조가 푸른 하늘과 함께 멋진 그림으로 다가왔다.
먼저 눈에 띄는 웅장한 규모의 「암각여래상」을 찾았는데 바로 이 석불 앞에 「미륵전」을 짓는다고 공사가 한창 이었다. 주변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사로 오히려 자연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대한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 머리 위에는 닫집(누각 모양의 보호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 준다.
이어서 100여m를 바위틈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내원궁」(內院宮)에 있는 「금동지장보살상」을 찾았다. 암자의 이름인 도솔(兜率)이 도솔천(미륵이 산다는 이상 세계)을 의미하여 미륵보살을 모신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 「내원궁」은 독특하게도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잘 성취된다고 하는 기도의 효험이 가장 좋은 곳으로 유명하여 찾기가 어려운 길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이처럼 「도솔암」에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들이 있다. 진즉에 「유홍준」 교수는 「암각여래상」은 고려시대 지방호족의 자화상적 이미지로 인상이 우람하고 도발적이며 젊고 능력 있는 개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하였다. 그리고 「내원궁」의 「지장보살」은 조선 시대의 불상으로 사대부적 이상미를 반영하듯 학자풍이고 똑똑하게 생겼다고 하였다. 나아가 경주 「석굴암 석가여래상」은 통일국가의 이상을 반영하는 근엄함과 권위의 화신으로 묘사되었다고 하였다. 필자는 ‘ 백제인의 미소 ’ 라고 부르는 서산의 「삼존불」이 이들 불상과 더불어 각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불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길에 「참당암」(懺堂庵)에 잠시 들렸다. 이곳은 「선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암자로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도 웬만한 규모의 사찰과 같았는데 무엇보다 「선운사」의 전체 규모의 방대한 가람의 배치에 내심 놀랐다. 이토록 넓은 사찰이 구석구석까지 자연과 일체가 되어 빚어낸 아름다운 풍광이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에 고찰의 매력을 듬뿍 느꼈다.
이어서 ‘차 밭’을 지나 「선운사」의 본당 경내로 들어가 먼저 살핀 곳이 바로 「동백 숲」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동백꽃이 유명한 곳은 『여수』의 ‘오동도’, 『보길도』의 「윤선도」 별장이 있는 ‘부용동’, 『강진』의 ‘백련사’, 『서천』 바닷가의 ‘동백정’ 그리고 이곳 「선운사」의 동백꽃을 꼽는다. 특히 이곳 「선운사」의 동백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이 500년이나 된다. 이곳의 동백꽃은 위도가 높아 해마다 4월 말이나 5월 초면 절정을 이루는데 무더기로 떨어지는 검붉은 꽃과 어울려 피어나는 새 꽃들이 햇살을 받아 하늘과 어울리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시인 「서정주」와 가수 「송창식」은 「선운사」의 동백꽃을 시와 노래로 각기 읊었다. 동백꽃은 세 번 피는데 한번은 나뭇가지에서 붉게, 또 한 번은 땅 위에서 검붉게, 마지막으로 사람의 가슴 속에서 애틋하게 핀다고 하였다. 아마 모두의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인생의 사연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선운사」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 전나무 숲에는 ‘부도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까만 대리석으로 된 『백파선사 비문』이 서있다. 바로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쓴 비문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방정한 해서체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代用之碑)라 씌어있다. 후면에는 이 비문을 지은 풀이가 행서글씨로 썼는데 이 글씨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다.
「백파」선사는 선사상을 피력한 『선문수경』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를 반박한 사람이 『해남』 「대흥사」의 「초의」(草衣)선사였다. 이 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추사」가 끼어들어 「백파」와 한판의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이게 된다.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는 15가지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 그 유명한 『백파망증 15조』(白坡妄證 十五條)이다. 유배가 풀려 먼저 「대흥사」의 「초의」선사를 만나고 『정읍 조월리』의 시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으나 눈보라에 길이 막혀 하루가 늦는 바람에 끝내 「추사」는 「백파」선사를 만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 「백파」선사의 제자 둘이 찾아와 「백파」선사가 3년 전에 입적한 사실을 말하며,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여 써준 글씨가 바로 『백파선사비문』인 것이다.
이곳 비문 앞에서 한참 동안을 머물면서 일행과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한 때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보관하다가 다시 야외로 옮겼다고 한다. 더구나 이 비의 탁본을 생전 선친께서 아끼던 것이라 더욱 애착이 갔다.
사찰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남도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서 찾아간 곳은 「미당 서정주」의 문학관과 생가 터였다. 이 땅에 본격적인 서정문학의 시 세계를 개척하여 많은 우리말의 아름다운 표현을 갈고 닦았는데 말년의 친일시비로 명예와 오욕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근접한 부안 출신의 목가적(牧歌的) 시인으로 일제와 독재에 저항했던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행적과는 매우 대조적인 삶이었다.
인근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생가를 찾아 거대한 부의 흔적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친일시비에 휩싸인 아쉬운 생애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였다. 또한 「미당」의 선친이 「인촌」의 집에서 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으로 일했던 인연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친독일 부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단하면서 다시는 조국 프랑스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드골」의 다짐이 떠올랐다.
한참을 달려 낙조를 바라보면서 당도한 곳은 『격포』 항구 다. 과거 1993년 가을에 『위도』를 오가던 유람선이 침몰하여 아까운 인물들이 다수 희생되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잘 알고 지내던 다수의 선,후배들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밀물과 함께 바다 바람이 광풍이 되어 세차게 몰아치니 ‘채석강’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근 횟집에 들렸다가 숙소로 돌아와 노래와 악기 연주 그리고 시낭송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다음 날 숙소에서 『두포항』의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썰물과 함께 군데군데 새까만 바위와 갯벌이 드러나면서 다소 쓸쓸한 가을 풍경을 연출하였다. 서둘러 찾은 곳은 어제 밤에 들렸던 ‘채석강’이었다. 물이 빠지면서 사람들의 출입이 되니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웅장한 바위산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행도 한참을 들어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괴암과 하나가 되어 즐겁게 지냈다.
이어서 들린 곳은 「내소사」(來蘇寺)였다. 필자도 세 번째 찾아온 곳으로 입구에 서니 ‘전나무 숲’이 반겨준다. 500여 m에 이르는 전나무 숲은 이곳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오대산 「상원사」와 광릉의 전나무 숲과 함께 손꼽히는 명소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당산나무 역할을 하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반겨주고, 「대웅보전」의 문창살은 연꽃, 국화, 모란, 해바라기 등 꽃 무늬를 문살마다 정교하게 조각하여 장식했다. 더구나 각기 모양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더구나 「대웅보전」의 현판글씨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작품이고, 「지장전」(地藏殿)의 글씨는 친구의 형인 「송하경」(宋河璟)의 글씨라 더욱 반가웠다. 특히 이곳의 전나무 숲에는 노란색의 상사화가 기막힌 풍광을 연출하는데 이미 때가지나 푸른 잎 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했다. 또한 천혜의 자연 속에서 쌀과 소금, 젓갈과 풍천장어, 복분자와 감 등 풍부한 물산과 풍족한 인심을 나누는 인정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속에서 큰 인물이 나오고 문화예술을 아끼는 풍토가 조성되었음을 느꼈다.
또한 「선운사」와 「내소사」의 실체를 더욱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알찬 시간을 보냈다. 더구나 오가는 길에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산하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정에 시골 마을의 포근한 정취를 새기게 되었다.
다만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관광객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모습이 다소 안타까웠다. 여러 시민의식이 결여된 모습이 오히려 유산을 훼손하여 안타까웠다.
비록 주마간산식의 여행이었지만 자연과 합일하여 건강한 심신을 찾게 되었다. 다시 일상에 열중하고 훗날에 다시 회동할 그날을 기대하며 희망을 안고 살아갈 일이다.
(2024.11.9.작성/11.13.발표)
※ 다소 긴 글이지만 이 지역을 여행하시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