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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왜군 무덤의 실체.
5~6세기초 전라도에 왜군 무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렇다.
광개토비문에도 나오듯이,신라가 군사 5천을 이끌고 일본 중부의 나라백제를 침공한다.
나라백제는 경도(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신라에 대항한다.
경도백제는 반도백제의 아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아신왕은 군사 4만을 이끌고
신라 금성으로 쳐들어가 점령하고 내물마립간을 끌어내리고 천비로 삼아버린다.
아신왕에 의해 내물마립간이 실각하고 실성마립간이 등극한다.
나라백제를 점령한 신라군은 금성이 반도백제의 아신왕에게 점령당하자
군사 500명을 남겨놓고 신라로 철군한다.
경도(교토)백제는 신라군사 500명을 회유하여 관료로 등용시키고 나라백제로 환도하여
백제,신라 연합정권을 출범시킨다.
훗날 반도백제 멸망후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부여풍은 왜로 돌아가
유신정변[임신의란 672]을 일으켜 신라계를 모두 도륙하고 백제계로 이어가는 정통성을 세우게 된다.
실성마립간은 한때 고구려의 볼모로 가서 광개토를 싫어했지만 복수할 마음으로
구원을 요청하여 광개토군을 끌어들인다.
5만의 고구려 기마군이 남하하여 백제, 가야, 왜군 연합군이 김해에서 대패당하며
전라도 지방으로 달아난다.
아신왕이 4만을 이끌고 고구려 남부 남고성(남소성)으로 출격하여 막으려 하였으나,
광개토는 백제군을 우회하여 신라 금성으로 기마대를 이끌고 들어간다.
보병군이 주력군이었던 아신왕의 4만 보병군은 고구려 기마군 추격에 실패한다.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금관가야군, 구주가야군(왜군/이 당시는 왜인이 아니라 전기가야인이
구주로 이주했다가 금관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반도로 지원해 온 전기가야(개별가야인)은
김해에서 부터 전남 남해안지방으로 고구려군의 추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낸다.
살아남은 자들은 경북 내륙 서부지방, 경남 서북부 지방으로 숨어 들어간다.
광개토군의 개입으로 전기가야(개별가야)가 사라지고 왜로 이주해간다.
그 대신에 전라도로 패퇴한 가야군은 구주로 돌아가지 못하자 경북 고령지방으로
가장 많은 수가 몰려든다. [마한은 광개토와 동맹관계].
구주가야(왜)군이 대마도를 건너 구주지방으로 퇴각하지 못해
경북, 경남 서북부 내륙지방으로 숨어 들어가서 세력을 키워 후기 대가야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고령으로 가장 많은 수가 몰려들어 세력이 커지자 분파하여
상주 고령가야(김천,선산), 거창 대가야(호남 동부지방까지 진출), 성산가야(성주,칠곡,왜관,)
진주 고령가야(하동), 함안 아라가야(안라가야>아시라국 선포로 마산의 골포국, 창원의 탁순국 장악),
고성 소가야 등으로 크게 갈라진다.
김해 금관가야(부산동래>김해>거제 견내량)는 대마도, 구주지방으로 이주하는 주요 루트였다.
초기에는 부산 동래항(초기 임나항)>김해항(임나항)을 통하여 이주한다.
임나가라는 강원도 중남부, 충북, 충남 동남부 지방, 호남 동부지방, 경북 서부지방, 경남 서부지방에 산재해있던
개별가야인들이 모여 구주로 이주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만든 나라였다.
가야인들이 왜 땅인 구주[큐슈]지방으로 넘어갔다가 지원해 왔기 때문에 왜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구주를 지배하던 가야인들이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오월인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김해에서 금관가야왕 김구해(김구해>김무력>김서현>김유신)는 신라 법흥왕의 공격을 받자,
거제 견내량으로 이주하여 가야, 백제인들을 구주로 이주시키며
뱃삯으로 가야, 백제 유물을 받았던것이다.
신라 법흥왕의 수륙양동작전으로 거제도를 포위해오자 김구해는 신라에 항복하고
뱃삯으로 받은 가야, 백제 유물을 들고 신라 금성으로 싣고 들어가 투항해버린다.
금관촌으로 강등당하였으나 최초로 상대등 직위를 하사받고 금관촌의 수장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신라 유물은 가야, 백제 유물과 신라 유물이 아닌 것을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왜군 무덤이 전라도에 있다고 전라도가 왜넘 유전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를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 백제인들은 초기 낙동강 연안을 따라 쪽배를 만들어 짐을 거제 견내량까지 실어날랐다.
나라(奈良)백제 이름이 나라(奈良/내량/나랑/내랑)가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을 말함이다.
가야, 백제인들은 열도로 넘어갈 때 반도의 마지막 출항지인 거제도 견내량의 이름을 따서
나라(奈良/내량)백제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초기 서해안에 출몰한 왜구는 왜구가 아니라 해구이다.
해구는 중국 해남도(하이난/수도 해구)에서 해구들이 중국 동해안과 반도 서해안으로 출몰하여
약탈한 것을 말한다.
고려 말기부터 왜구들이 남해안에 출몰하였고, 원래 부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통하여
경기 동부, 충북, 경북지방을 휩쓸었다.
이곳이 양광도이다.
양광도는 경기동부, 충청 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 서북부지방을 말한다.
양광도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정규군화 된 1만5천여 명의 왜구는 3패로 나눠 퇴각하면서
한 무리가 익산 함열읍, 황등면 황산일대로 내려와 전라도로 진입하려다가 이성계에게 다시 토벌된다.
남원 지리산 운봉 황산으로 왜군이 집결했다가 모두 토벌된다.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고려말 500여척의 정규군화된 왜수군이 군산으로 침공했다가 100여척의 고려군에
대패하는 진포대첩도 벌어진다.
이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화포가 사용되었다.
진포에서 패한 왜군들이 육로로 달아나다가 이성계에게 모두 토벌된다.
5~6세기 왜군은 현재의 일본인인 왜구가 아니라, 구주지방에 자리잡았던 구주가야인을 왜군이라 불렀다.
구주가야인의 선조는 전기가야인이며 김해가야로부터 독립했을 때는
중국 남부의 해남도(수도 해구/하이난)에서 첨각열도(센카쿠열도), 유구해구(류큐해구),
살남제도(사쓰난제도)를 통하여 구주지방으로 들어간 남오월족들이었다.
남오월족은 일본중부지방으로 진출하여 오국, 월국 등을 세우기도 하였다.
[남오월족은 키가 작아 왜구 활동은 미미하고 대부분이 위나라 [남위, 북위]출신을 해구,
왜인/왜구라고 부름]
김해가야가 고구려에 멸망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해남도 해구에서 넘어온 해구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립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반도와 단절이 이루어지게 되어 구주지방을 상실하게 된다.
신라의 고구려군 지원 요청으로 구주지방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해구들은 왜구가 되어 고려시대에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남위>강소성 남경 동오(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움)>하남성 낙양으로 들어가 한나라 헌제를 폐위하고 위건국.
>산서성 대동시 평성의 멸망한 대나라에서 탁발선비족 탁발규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낙양으로 들어가
조비의 위나라를 점령하고 다시 위나라를 세움. 탁발규의 나라를 북위라 부름]
>북위의 동위, 서위 분열 당시 중국 남단 해남도[하이난/해구]로 달아난 북위인들이 중국 남단을 약탈하며
중국 동해안까지 북상하여 해구로 활동하며 반도 서해안 지방을 삼국시대 전반기[초중기]까지
약탈하는 것이고, 동위>북제, 서위>북주멸망시 승문[조몬]제도를 통해 구주[큐슈]로 들어가서
왜인이 되어 삼국시대 후기부터 왜구가 되어 남해안을 약탈하는 것임].
동위[고환/고태/구태/탁발선비]>북제[고양],서위[우문태/우태/우문선비]>
>북주[우문각/ 북제를 멸망시키고 건국]>수, 당으로 이어짐.[수양견이 북주의 외척으로 있다가
우문각, 우문호가 황실을 비운 틈을 이용하여 북위 출신 황족 수백명을 참살하고 북주 왕으로 있다가 수 건국],
수(양견,양광), 당나라(이연,이세민)때부터 고구려가 수당이 너무 커져서 중원 통일국가급이었기 때문에
해구, 왜인이라고 부르지 못한 것임.
동위, 서위 분열 당시 변발 풍속을 없애고 성을 원소씨, 원씨 등으로 개명하고
중원화(양나라화, 서진/동진화, 백제화)하기 시작하자, 평성으로 물자가 적게 들어오는 것을 명분삼아
중원화를 거부하던 산서성 대동시 평성에 남아있던 원북위와 대립하며 분열한다.]
구주가야는 김해 금관가야의 속국이었다가 김해가야의 멸망으로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해구들의 구주지방 장악으로 독립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해구들은 그래서 훗날 왜구라 불렀다.
구주가야인들의 선조는 원래 전기가야인(개별 6가야)들이었다.
김해 금관가야는 구주가야군을 소환하여 대마도에 전쟁물자를 쌓아두고 고구려군에 대항하였으나
보급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구주로 돌아가지 못한 구주가야인들이 후기 대가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거창 대가야는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슬치기문, 정읍태인, 고창 동부, 순창 동부, 곡성, 구례, 화순,
순천일대를 장악한다.
[순창 강천산 동부 산악지방, 고창 선운산 동부 산악지방, 화순 동부지방, 광주에서 발견되는
우르>우륵6가야 문화는 대가야에 복속된 후 562년 신라에 대가야가 멸망하자 피신해와서
임시적으로 일시 정착한 흔적임]
상주 고령가야는 보은, 옥천, 영동 일대지방을 아우르게 되고, 진주 고령가야는 하동일대를 손에 넣게 된다.
가야인들은 강원도 내륙 남부지방부터 충북지방, 충남 남동부지방, 호남 동부지방, 경북 서부지방,
경남 서부지방에 두루두루 널리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대가야의 중심지는 고령에서 분파한 거창 대가야가 가장 강력하였고 그 다음이 상주 고령가야였다.
이밖에 진주 고령가야, 고령 본가야, 성주 성산가야, 고성 소가야,
함안 아라가야 (안라가야/마산, 창원, 거제 아시라국 선포), 부산 동래/김해/거제 금관가야 등이 있었다.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구형왕)의 둘째 아들인 김무력은 영월, 제천, 단양, 영주 개별가야 일대를 장악하고
신라에 귀속시킨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김무력의 아들)은 괴산, 증평, 진천 일대를 장악하고 성주로 있었다.
이 일대는 원래 모두 전기가야의 개별가야 땅이었다.
전남 영산강일대에서 발견되는 왜인 무덤은 금관가야로 부터 소환되어 지원온 구주가야군이
오월인을 동원하였다가 광개토군으로부터 추격을 당하다가 죽은 것이며
가야인과 오월인들의 무덤을 조성한 것이었다.
전남 해남을 중심으로 보성, 진도, 완도, 여수, 장흥, 고흥반도 일대는
구주가야군이 돌아갈 길을 찾다가 고구려군으로부터 최후를 맞이한 곳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마한영역(소도구역/고구려 광개토와 동맹관계)을 피해
경북, 경남 서북부 지방으로 들어가 후기 대가야를 성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광개토군을 상대하기 위해 구주로 넘어갔다가 금관가야로 지원 온 전기가야인들은
광개토군에 패하자 내륙으로 숨어들어가 세력을 키우며 감숙성, 내몽고 사라선맹지구에서
새로 들어온 우르(우륵)6가야를 점령하고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세력을 넓히면서
호남 동부 소도구역으로 진출하며 백제와 동맹을 맺고 왜까지 실크로드 교통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해주는 역활을 하였다.
고려말기 영남, 양광도를 휩쓴 왜구는 다시 전남 남해안으로 상륙하여 영산강을 거슬러 북진한다.
양광도(경기동부, 충청북부, 충북, 경북서북부)에서 패한 왜구는 충남 논산군, 연무읍을 지나
전북 익산군 함열, 황등으로 들어왔다가 이성계에게 두번 다 대패당한다.
아시발도가 이끄는 정규군화된 1만5천여의 왜구는 남원 지리산으로 3패로 나눠 후퇴하였다가
운봉 황산에서 집결했다가 모두 섬멸되었다.(이성계의 황산대첩)
이성계가 개선할 때 진안 마이산루트로 회군하며 마이산을 보고 조선을 창업할 계획을 품었다는 사실이
실록에 기록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호남의병들로부터 토벌을 당하여 죽은 왜군들도 많았다.
전국 의병 총대장 김덕령은 광주 의병을 이끌고 담양으로가서 세력을 모은 후,
서해안, 남해안을 따라 상륙해 들어오는 왜군들을 토벌하면서 진주성으로 들어가서 진을 친다.
웅치(황박,정담), 슬치(양대박),이치전투의 고경명(제1대창의사 호남의병총대장)에 이어,
진주 제2차 전투에서 죽은 삼장사인 나주, 담양의 김천일(호남 의병총대장 2대 창의사),
남원의 황진(충청도 병마절도사), 화순의 최경회(경상도 병마절도사)의 전철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전라도로 들어온 왜군의 시체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일본 전국시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의 선조는 이렇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 무리가 동경 동남부로 들어와 자리잡고 살고 있었다.
발해 멸망후 동간도를 떠난 한무리가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상륙한 후, 육로로 동경 동남부로 들어온다.
고구려 후예와 발해 후예는 이곳에서 세력을 키우고 난동을 부리며 동경을 장악해 버린다.
그런 후 일본 중부의 나라백제를 침공하여 경도(교토)로 옮겨간 나라백제와 대치하며,
남북극시대를 200여년 간 펼친다.
일본의 중심축은 나라백제, 오사카세력, 경도, 동경세력으로 삼각축을 형성하다가
오랜 대립에 지친 나라백제인들이 이탈하여 구주지방으로 이주해가기 시작한다.
나라백제를 점령한 고구려, 발해 동경세력은 동경일대에서 모은 사무라이 세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사무라이 세력은 신강성, 감숙성 실크로드에서 몽골에 쫓겨 연해주로 밀려나는
금나라 여진족과 거란족, 그리고 홍건적들이었다
이들은 몽골,동진, 고려연합군에 쫓겨나기 시작하여 려말선초 조선군의 토벌로 일본으로 들어가는
숙여진족[란주여진/문명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숙여진족[야인족], 거란망인들이었다.
천황가의 백성들을 동경으로 끌고 가자 따르기를 거부한 나머지세력이 구주지방으로 이주해간다.
숙여진족은 고구려, 발해망인들을 동북[도호쿠]지방으로 밀어내고 동경을 차지한다.
일본 서남부 구주로 밀려난 구주백제인들은 몽골 원나라 초대황제인 쿠빌라이(세조) 지원4년에 조공하고
정식 백제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몽고에 구원을 요청하여 여진, 거란 망인계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대마도에서는 삼별초 항쟁군에 패했고
본대는 제2차 출정때 구주 서남부 나가사키 타카섬에서 상륙하지 않고 동경 에도군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배에서 숙박하는 바람에 풍랑으로 궤멸되고 3만을 실은 병선만 살아돌아간다.
그후 숙여진족 풍신수길이 전국통일을 하게 되자 구주백제인들은 구주(큐슈) 가고시마로 밀려났다가
최후의 구주백제인들이 구주 동남부의 미야자키현 지방 일대로 밀려난다
한때 구주백제인들은 려몽연합군을 끌어들여 경도 일대를 장악한 동경군대를 몰아내려 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려몽연합군의 상륙을 저지시킨 군대는 삼별초군들이었다.
승화후 온(고종 동생), 노영희, 배중손 등의 삼별초군은 명량의 울돌목에서
려몽연합군의 전선 수천척을 섬멸시킨 바가 있었다.
노영희, 배중손 등이 강화도에서 전선 1천척을 거느리고 진도로 이주하여 고려 자주국을 선포하였다.
그후 삼별초군을 토벌하러온 려몽연합군의 전선 3천척 이상을 울돌목에서
몰살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육로로 북상하였다가 중국 화포를 들여온 려몽연합군에 승화후 온, 배중손, 노영희 등이
전사하고, 김통정 등은 제주도로 사령부를 옮겼다가 홍다구(예천)가 이끄는 려몽연합군에 패퇴하여
오키나와(옥이나와), 대마도로 탈출하여 각각 삼등분하고 다스렸다.
1270년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에서 삼별초군에 패퇴하여 상륙하지 못하였고,
1274년 려원연합군 본대는 본토로 상륙하려다가 구주 서남부 가고시마위 나가사키 타카섬에서
배에서 숙박하는 바람에 풍랑으로 괴멸되고 3만을 실은 병선만 살아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을 침공하기 위한 전선 수주는 홍다구와 그의 아들 홍파두가 고려인을 끌어다가 만든 전함들이었다.
가고시마 북쪽 나가사키 타카섬.
나라백제는 멸망하여 바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1274년 쿠빌라이 세조 지원 4년에 몽골에 조공하고 정식 백제국으로 인정을 받아 돌아간다.
이 기록은 8만권에 달하는 만주 흠정원류고에 기록되어져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다.
구주백제 군은 려몽연합군을 끌어들여 동경 에도막부의 선조를 모두 몰아내려했었다는 사실이다.
p/s
여진족-청나라인처럼 앞머리를 밀고 중간부터 뒷머리를 길렀다.
미혼자는 남녀 모두 머리를 땋는다.
거란족-앞머리 전체를 일부 남기고 윗머리 뒷머리는 모두 깍는다.
거란 초기에는 앞머리 양옆으로 한주먹 만큼만 남기고 모두 깍아 종족 구분표시를 하였다.
몽골 실위족- 앞머리 정중앙에만 한주먹 남기고 모두 깎았다.
이렇게 해서 피아구분을 하여 멀리서 보고 적인지 아군인지를 빨리 구분하고 대처하려 함이었다.
이 풍습을 가진 숙여진족(란주여진/문명생활)과 일부 거란망인들이 몽골, 동진, 고려,
조선 이성계 등의 토벌로 동경으로 쫓겨 들어가 동경을 장악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일은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중동부를 장악하고 있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혈통 성질이 가장 비슷한 중서부의 부여, 가야, 백제, 오월, 신라의 후예를
대대적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건주여진(생여진/ 신강성,감숙성 실크로드 요충지 돈황지구를 장악하고 몽고를 식민지배하다가
뭉케, 쿠빌라이에게 흑룡강성으로 밀려나 수렵생활을 영위함)]은 누루하치 때 후금(요녕성 무순시 신빈),
홍타이지 때 심양에서 청을 건국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북경을 점령함]
이성계의 토벌로 란주여진(숙여진/문명생활) 주류세력은 홍건적, 거란망인 일부와함께
함경도와 일본으로 달아나 훗날 전국통일 세력으로 성장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건주여진(생여진/수렵생활)은 요녕성 신빈에서 조명예허연합군을 물리치며
심양에서 후금,청을 건국하고 북경을 점령하여 청을 이어간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예허여진은 단동(안동)을 중심으로 요녕성 심양까지 늘어져 살도록
분산시키는 역활을 하여 조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않고 압록강을 도강하여 만주로 들어갔다면 예허여진, 란주여진, 건주여진,
홍건적, 거란 망인 등이 모두 일본으로 밀려들어가 더욱 강성해진 왜군이 되어
임진왜란때 조선은 멸망당하고 오히려 조선이 만주로 밀려나 오랑캐의 후예로 알려져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쓰고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갔을 것이었다.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발발까지 이성계의 후예들이 군사분야를 전담하여
담당했을 때는 정확히 200년간 평화기를 누려왔다는게 증명된 것이다.
[1591년 2월 호남 주기학파 문무관세력들이 동인 주리학파(이산해,류성룡)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고향지방으로 모두 5~7품계 직급 강등당하고 좌천되면서 1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래서 호남방어가 가능했던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