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07.
어느 언론사의 웹사이트에 나의 강연 영상이 올라가자 그 사이트의 의견란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몸무게에 관한 논쟁이었다.
‘15파운드(약 7㎏)는 빼야 할 것 같은 여자가 무슨 자존감 타령인가?’
- 브레네 브라운, ‘마음가면’에서
예전엔 방송의 공익성 하면 탐사보도나 교양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다. 지난해 화제가 된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의 남성 버전인 ‘미스터트롯’은 코로나19라는 천재지변을 만나면서 국민힐링 프로그램으로 거듭났다. 후속 프로그램인 ‘사랑의 콜센터’에 전화를 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특히 중노년 여성들이 큰 위안을 받은 것 같다.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운동 프로그램 ‘오늘부터 운동뚱’도 회를 거듭할수록 공익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의 끈질긴 편견에 스트레스를 받던 청장년 여성들이 특히 반기고 있는 눈치다.
▲ 최근 ‘오늘부터 운동뚱’이라는 운동 프로그램이 인기다. 김민경 씨는 뚱뚱한 사람은 운동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며 날씬한 여성들의 스포츠로 알려진 필라테스에도 도전해 심으뜸 강사의 칭찬세례를 받고 있다. / 유투브채널 '오늘부터 운동뚱' 캡쳐
필라테스는 날씬한 사람만 하나
원래 이 프로그램은 자칫하면 가학성 논란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먹방 프로그램인 ‘맛있는 녀석들’에 출연한 뚱뚱한 네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뽑아 전문가의 지도 아래 운동을 시킨다는 기획으로, 추첨 장면을 보면 25% 확률에 걸리지 않기를 다들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자신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출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눈치다. 하필 네 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김민경 씨가 뽑혔고 김 씨는 울상이 됐다.
그런데 1회부터 프로그램의 방향이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났다. 김 씨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맡은 양치승 관장은 “근력을 많이 늘려주는 게 제 목표에요. ‘어, 민경이 굉장히 날씬해졌다.’ 이게 아니라 먹고 싶은 거 더 맛있게 많이 먹는 게 제 목표에요.”라고 말했다. 운동과 다이어트로 체지방을 태워 몸무게를 줄이는 게 아니라 근육을 늘려 기초대사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근력 운동을 시작하면서 두 번째 반전이 일어났다. 김 씨가 운동을 너무 잘 하자 양 관장은 감탄을 연발했고 회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의 성격이 바뀌었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종합격투기에 이어 김 씨는 필라테스에 도전했다. 김 씨는 “왜 날씬한 사람만 필라테스를 하냐? 나도 한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주위에서는 ‘무리한 도전’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필라테스 5회가 진행된 현재 김 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날씬한 건 기본이고 팔다리가 긴 여성들만이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진 고난이도 필라테스 동작들을 김 씨가 척척 해내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를 가르치고 있는 심으뜸 강사는 “어떡해, 너무 잘해요~”라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김민경 현상’을 필자가 이처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건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뚱뚱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데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과체중 또는 비만은 보기에 안 좋을 뿐 아니라 건강이 나쁘다는 신호이고 자기 몸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게으르고 의지력이 약할 거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퍼져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오죽하면 ‘체중 낙인(weight stigma)’ 또는 ‘비만 낙인(obesity stigma)’이라는 공식용어까지 존재할까.
비만 자체보다 유해한 비만 스트레스
학술지 ‘네이처 의학’ 4월호에는 이제야말로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체중 낙인을 끝내야 할 때라는 관련 분야 전문가 36명의 공동 선언문이 실렸다. 정통 의학 학술지에 이런 종류의 글이 실린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뚱뚱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미국을 비롯한 10개국의 내분비학, 영양학, 내과, 외과, 심리학, 분자생물학 등 다양한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은 2000년대 들어 비만에 관한 수많은 과학 연구결과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여전히 20세기의 관점으로 비만을 바라보고 있어 뚱뚱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뚱뚱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살을 빼려고 무리하다가 식이장애나 우울증 등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여성들이 가혹한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비만 자체보다 체중 낙인으로 인한 비만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유해한 결과를 낳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선언문은 2000년대 과학이 밝혀낸 비만의 진실이 체중 낙인의 부당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의지만으로는 살 빼기 어려워
/ 픽사베이 제공
우리 사회가 체중 낙인을 암암리에 정당화하고 있는 바탕에는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고 의지력이 약하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몸을 좀 더 움직이고 음식을 좀 덜 먹으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실천하지 않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결과는 우리 몸이 그렇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몸무게는 우리 몸이 항상성을 유지한 결과로 개인마다 기준점에 차이가 크다. 즉 어떤 사람은 날씬한 상태가 기준이고 어떤 사람은 뚱뚱한 상태가 기준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유전적 요인과 장내미생물 조성, 소화효소, 식욕호르몬 등 여러 요소가 관여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운동과 식사량의 영향력은 기껏 30%다. 다만 기준점은 평생 정해진 게 아니라 나이 등 이런저런 요인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시점에서 기준점의 범위는 꽤 좁고 상당한 식사량 조절을 통해 이를 의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몸이 바로 저항한다. 예를 들어 뚱뚱한 사람이 강도 높은 다이어트로 살을 빼면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만 곧 보정 메커니즘이 작동해 기초대사율이 떨어지고 허기가 심해진다. 결국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폭식하면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때로는 더 살찐 상태로 기준점이 재조정돼 다이어트 이전보다 몸무게가 더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폭식증이나 이보다는 드물지만 거식증 등 식이장애에 시달린다. 과체중과 비만이 각각 3분의 1인 미국의 경우 식이장애를 겪은 사람이 30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에 이른다. 식이장애는 내분비 체계를 혼란시키는 과도한 다이어트나 스트레스호르몬 코르티솔의 수치를 높이는 체중 낙인이 주요 유발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다이어트 연구에 대한 한 메타분석 결과를 보면 다이어트 실천 그룹은 9~12개월까지는 체중이 줄지만 2~5년의 추적결과를 보면 오히려 평균 1㎏이 더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대조군은 2~5년 뒤 평균 0.5㎏ 느는 데 그쳤다. 만일 신약후보물질이 이런 성적을 거뒀다면 벌써 탈락했을 것이다.
체중보다는 생활습관 영향 더 커
미국의 과학월간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7월호에는 ‘저울 없이 환자 치료하기’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다. 당뇨병 등 각종 대사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 비만일 경우 먼저 체중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며 다이어트를 강력하게 권하는 ‘체중 중심 관점’을 지닌 의사들이 많은데, 이는 십중팔구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자칫 역효과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게 글의 요지다. 환자에게 다이어트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변화의 바탕에는 나이가 들면 과체중인 사람이 오히려 보통체중인 사람보다도 사망률이 낮다는 ‘비만역설’ 현상이 자리한다. 사망률(수명)이 곧 건강 상태를 뜻하지는 않지만 상관관계가 높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절대 사망률이 높은 60대 이상에서 과체중이 사망률이 가장 낮다는 건 체중 자체가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2년 학술지 ‘미국가정의학저널’에 발표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대 연구팀의 논문은 체중과 수명(또는 건강)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연구자들은 장기 추적 연구 프로젝트에 등록된 사람들의 체중과 함께 네 가지 건강습관 실천 여부를 조사한 뒤 사망률과 연관성을 분석했다. 네 가지 건강습관은 금연, 적당한 음주, 하루에 채소와 과일 5종 이상 먹기, 규칙적인 운동이다.
▲ 건강에는 체중 이상으로 생활습관이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비만인 사람에게 성공하기 어려운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것보다 건강습관을 갖도록 유도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체중과 건강습관이 사망률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그래프로, 네 가지 건강습관을 다 지키면 체중이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맨 오른쪽). 반면 생활습관이 나쁠 경우 비만은 사망률을 크게 높이다(맨 왼쪽). / ‘미국가정의학저널’ 제공
이 조사에서는 비만역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과체중이나 비만인 그룹이 보통체중 그룹에 비해 사망률이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건강습관 실천 개수에 따라서는 사망률 차이가 컸다. 네 가지 건강습관을 다 실천하는 그룹에 비해 하나도 실천하지 않는 그룹의 사망률은 3.3배에 이르렀다.
체중과 건강습관 두 가지를 변수로 데이터를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네 가지 건강습관을 다 실천할 경우 체중이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비만이더라도 건강습관만 제대로 실천하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반면 건강습관을 하나도 실천하지 않은 비만 그룹의 사망률은 7배로 뛰어올랐다. 반면 보통체중 그룹은 2배 증가에 그쳤다. 만성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뚱뚱한 사람에게 성공 확률이 낮은 다이어트를 강조하는 것보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건강습관을 갖도록 유도하는 게 더 효과적인 이유다.
가학적 사회 규범 사라져야
▲ 미국의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2012년 TED연설에서 수치심이 심신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했다.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비만 낙인은 특히 여성들에게 큰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있다. / TED 캡쳐
불안과 수치심, 취약성 등 마음의 고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브레너 브라운은 2012년 출간한 책 ‘마음가면’에서 수치심 경험은 보편적이지만 이를 유발하는 외부의 기대와 메시지는 성별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있다며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외모다.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비판적 사고가 확산된 지금도 여자들은 날씬하지 않고, 젊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는 데서 가장 큰 수치심을 느낀다.”
브라운은 2010년 ‘취약성의 힘’, 2012년 ‘수치심에 귀 기울이기’라는 제목의 두 TED 강연으로 유명인사가 됐는데 자신의 강연 영상을 보고 강연 내용이 아니라 자기 외모를 비하하는 많은 독설들을 읽고 “여자다움에 관한 사회적 규범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며 “우리에게서 진정한 삶을 앗아가는 그 규범들을 강제하는 통로가 바로 수치심”이라고 갈파했다.
‘오늘부터 운동뚱’을 계기로 체중 낙인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