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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과
성령과 함께하는 사도 바울의 생애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은 자신이 정말 모범적인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이며 자신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신앙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가고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하고있는 신앙이 정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인지, 내가 하고있는 신앙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신앙인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혹시 나는 부족함이 많으면서도 무엇이 부족한지를 모르고 신앙하고 있지는 않는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인지 깨닫지 못하고 신앙하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계 3:17-18)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신앙인으로서 가장 큰 위기는 예수님이 없는 위기이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큰 부족은 예수님이 없는 위기이다. 지금 예수님은 나에게 어디에 계시는가? 과연 나에게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계 3:19-20)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문밖에 서서 정말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아직도 문밖에 계시게하고서 예수님도 없이 다메섹으로 가고있지는 않는가?
사도행전의 선교의 역사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 없이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 모든 생애를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십자가 외에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며 자기자신은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빌 3:8-9)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복음 선포에 따른 성공으로 매우 자극을 받았던 유대 지도자들 중에서 특출한 이는 다소 사람 사울이었다. 사울은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으나,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랍비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빌 3:5, 6). 랍비들은 사울을 크게 유망한 청년으로 간주하였고, 그가 유능하고 열심이 있는 고대 신앙의 옹호자라는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으로 등용되어 권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행적, 112)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모든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부족함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유대인이었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이 모든 조건에다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까지 갖췄었던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깨닫지 못하고 교회를 잔멸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행 8:1-3)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바울은 교회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교회 지도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결정이 옳고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교회 질서요 옳은 신앙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확실히 옳다고 결정하고 나자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친 교리에 대하여 매우 가혹한 반대자가 되었다. 거룩한 남녀들을 재판정으로 끌어다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도 하고, 심지어 사형에 처하게 선고한 사울의 활동으로, 새로이 조직된 교회는 슬픔과 침울에 잠기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도망하게 되었다.”(행적, 113)
이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결정에 따라 반대자들을 재판정으로 끌어오기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였다. 그 일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인줄도 모르고 그 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줄도 모르고 남이 세운 기준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었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다메섹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일에 권세를 받고 그 사명을 좋아하듯 충성을 다하였다. 그는 충성을 넘어 그 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위협적이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 일을 수행하러 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역사도 깨닫지 못했다. 혹 우리의 신앙이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처럼 예수님 없이 성령의 임재도 없이 가고있지는 않는가? 나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멈춰서 점검해보아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가는 길을 멈추게해야만 하셨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사울의 길이 얼마나 어리석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를 멈추게하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일을 막으셔야 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를 멈추게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충성을 다하는 그에게 새로운 사명에 눈을 뜨게하셨다. 헛된 일에 목숨바쳐 충성하고있는 그를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하는 자로 거듭나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다메섹에서 그를 멈추게 하셨다.
(행 9:3-5)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투옥시키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종으로서 사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예수님의 종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그를 멈추게 하셨다. 헛된 사명을 따라 가는 길을 막으시고 이제는 의로운 일에 이끌려 참 사명을 따라가는 자가 되도록 택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 사울의 육적인 눈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셨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비취는 예수님의 강렬한 빛을 보자 그는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엎드려질 수 밖에 없었다. 참 빛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비춰주시는 빛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을 해야할 것인가? 엎드려 내 자아는 죽고 그 빛에 굴복하는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강렬한 빛에 굴복한 사울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셨는가?
“공포에 사로잡히고 강렬한 빛으로 거의 눈이 먼 사울의 동료들은 어떤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들은 말을 깨달았으며, 그에게 말씀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울은 그의 앞에 서신 영광스러운 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보았다. 그 상처받은 유대인의 영혼 위에 구주의 얼굴 모습이 영원히 인각되었다. 그분의 말씀은 놀라운 힘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행적, 114)
강렬한 빛에 굴복된 사울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의 어두운 마음 구석에 큰 빛이 비쳐 들어와 과거 생애의 무지와 과오, 그리고 현재 성령의 교화하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 이제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함으로 실은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의와 의무에 대해 가졌던 그의 확신은 모두 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한 맹신에 크게 기초되었음을 알았다”(행적, 115)
사울은 이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성령의 역사에 무지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고있었던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단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얼마나 잘못된 맹신에 빠져 영적인 눈을 뜨지못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된 것이다. 헛된 것을 버리게하시고 그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하셨다.
이제 영적인 눈이 뜨인 사울은 하나씩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되었다.
“하늘의 빛이 비추이고 있는 그 시간, 사울의 마음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성경의 예언을 깨달았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거절,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고,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행적, 115-116)
“이 모든 것은 박해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이제 사울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은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사람들에게서 거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또한 구주께서 무덤에서 의기 양양하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알았다.”(행적, 116)
이제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사울은 중대한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다메섹을 갔었다.
“사울은 대제사장이 그에게 준 신임장으로 인하여 자족하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에게 중대한 책임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다메섹에서 새로운 신앙이 퍼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유대 종교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그의 사명을 성공리에 완수하고자 결심하였고, 그의 앞에 있으리라고 예상한 그 경험을 열렬한 기대감으로 바라보았다.”(행적, 117-118)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고서 참된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사울의 생명을 아끼셨을 뿐 아니라 회개시키심으로 그 용사를 적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편으로 옮기셨다. ”(행적, 124)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란 사람을 불러서 가던 길을 멈추게하고 하나님의 일에 눈을 뜨게하여 한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바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마지막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참 진리를 깨닫고 돌아오는 사람들 중에서 사도 바울처럼 필요한 인물로 사용하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열과 교회들, 심지어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빠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의 열성은 지금까지 자리를 채우면서 진리를 선포해 온 자들의 열성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마지막 사건, 211)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선교사역을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1. 눈이 회복된 즉시 다메섹에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행 9:18-20)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 핍박을 피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갈 1:17-18)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행 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아라비아는 어느 위치인가?
“다메섹에서 얼마간 전파한 후에 바울은 아라비아로 물러갔다.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 전파했을 때 유대인들의 부추김으로 그를 붙잡으려는 시도가 일어났기 때문에 비우호적인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재림교주석, 갈 1:17절 주석)
“하늘에서 온 사자가 당분간 떠나라고 명하였으므로 그는 “아라비아로” (갈 1:17)가 거기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다. 이 한적한 광야에서 바울은 조용히 연구하고 명상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의 과거의 경험을 조용히 회고하였고 완전히 회개하였다. 그는 그의 회개가 가납되어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 때까지 마음을 다하여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았다. ”(행적, 125)
다메섹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다.
(행 9:23-25)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3. 예루살렘에 있다가 다소로 갔다.
(행 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 9:28-30)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4.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갔다.
(행 11:25-26)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5. 성령께서 드디어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선교의 사명을 지시하셨다.
(행 13: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울이란 한 사람을 택하여 사명자로 부르셔서 보내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온 생애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산 생애가 시작되었었다. 사명자로 부르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준비되어지는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할 일꾼을 부르신다.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눅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할 시기이다. 속히 추수할 일꾼으로 준비되어 일해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교회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는 탁월한 설교와 믿음이 있었고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도르가까지 살리는 기적을 베풀었다.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도 환상을 통해 누구보다 먼저 이방인 전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 베드로이다. 그런데 이방인 선교를 위해 베드로나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지않고 바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호한 목적과 불요 불굴의 용기를 가진 웅변가요 통렬한 비평가인 바울은 초대 교회가 필요로 한 모든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다.”(행적, 124)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지만 초대 교회에 필요한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 단호하고 불굴의 용기를 가졌으며 웅변가로서 이방 땅에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인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헛된 것만을 위해 하나님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할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필요한 자격을 구비한 인물들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시고 계신다.
바울은 어떤 신앙을 산 사람이었는가?
1. 바울은 자아를 희생하는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였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참된 신앙인의 모본이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멈추게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 없는 신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하고 주의 사업을 한 것이다. 자아를 굴복시키고 주의 사업을 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문 안인가? 문 밖인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문 안에 모시고 산 생애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애를 살았다. 자신은 없어지고 예수님이 자신의 안에 오셔서 살게하신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삶으로, 말씀으로 가르쳐준 신앙의 교과서와 같은 인물이다. 기독교 신앙의 원칙을 세우는 위대한 교사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바울만큼 신실하고, 힘있고, 자아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 사람은 없다. 그는 세상에서 위대한 한 교사였다. ”(4증언, 409)
“그 사람들 중에는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요셉과 다니엘, 가장 현명한 입법관인 모세, 가장 충실한 개혁자인 엘리사가 있었고, 또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던 예수님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교사였던 바울 같은 인물도 있었다.”(교육, 51)
예수님 이후 세상에서 가장 큰 교사가 바로 바울이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게하신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사시도록 자신의 집을 비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었다.
2.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엄격한 신앙인이었지만 남에게는 관대한 신앙인이었다.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엄격한 신앙을 따라 산 사람이었지만 남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신앙인이었다.
(고전 9:20-22)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3. 사도 바울은 겸손한 신앙인이었다.
(고전 15:8-9)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사도바울만큼 위대한 사도가 없다. 기독교 역사를 바꾼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함이 몸에 베여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여기며 신앙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여기며 신앙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이 꿈꾸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할 것이다.
4. 오직 선교에 사로잡힌 신앙인이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보다 더 마음을 기울여 끈기 있게 정력적으로 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결코 이 땅에 없었다. 그는 한가지 목적만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멸망하여 가는 영혼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과 그들이 세상의 구주와 친분을 맺도록 하는 것이었다”(성연1-3, 제3편>12. 복음 사역자의 사명)
사도 바울은 오직 선교사명을 위해 살았다.
선교사명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았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산 생애였다.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며 목숨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명을 위해 살았다. 나를 살려주신 그 분, 예수님! 참 신앙을 깨닫게해주신 그분,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에게 그 예수님을 알게해주신 은혜와 사랑이 자기 목숨보다 귀한 것임을 깨달았기때문일 것이다.
선교사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핍박과 고난은 전혀 장애가 되지않았다.
(고후 11:23-28)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
(고후 11:23-27)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마치 선교를 위해 태어나 선교밖에 모르고 선교를 위해 살다가 선교하다 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선교를 위해 당하는 모든 위험은 그에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며 선교를 위해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험과 핍박들은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선교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5.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신앙이었다.
(빌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삶이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위해 산 사람이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모든 자만심과 이기주의와 의견을 주장하는 교만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1기별, 41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살지않았다. 그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해 모든 자만과 이기주의와 교만은 버리고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처럼 자신을 비운 사람이었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아를 굴복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자아를 굴복하는 생애이어야 한다. 우리는 죽고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하는 것이 신앙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분만을 닮아가고자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서 가장 큰 결점은 무엇이었을까?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유대인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 사도 바울에게 가장 큰 결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삶 속에 예수님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없었고, 예수님의 마음이 없었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고,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 하나 예수님을 몰랐었다. 많은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점검해보아야할 것이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있는가?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가? 지금까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고있는지 점검해보아야할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잠시 모아져있는 웅덩이의 물에 불과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잠시 그릇에 담겨진 물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증발하여 사라질 것들이다. 생명의 샘물로부터 생명수를 공급받지않는다면 지금은 있어 보이나 잠시 후에는 아무것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될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신앙의 삶은 마르지않는 생명수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야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고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과거의 삶은 예수님 없는 삶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없으니까 그의 삶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적이었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수님이 없었기때문이다.
예수님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 사는 삶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바뀌게된 것이다. 이제 그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빌 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엡 4:13-14)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오직 목표는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지는 것이었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가 평생 닮고자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가 평생 따라가고자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이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목표가 되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결점들이 나타난다. 사도 바울에게도 결점이 있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도 그에게 여전히 육체에 가시가 있었다. 그러한 결점이 있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천사들을 통하여 당신의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으시나 이것은 그분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도구로 선택하신다. ”(선교, 7-8)
우리들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나약한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보지아니하고 예수님만 푯대를 삼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며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있다. 불완전한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 자신도 역시 불완전한 존재요 다른 사람도 역시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로 연합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불완전한 모습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연합될 때 불완전한 모습들이 보완이 되어서 하나로 연합될 수 있는 것이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한 특성만 가진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지체로서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각 지체들이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한 몸에 많은 지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두가 혼자 있을때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지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지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의 이루어야할 목적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할 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러 다녔던 자라는 인식 때문에 기존 성도들로부터 편견이 있어서 하나가 되기에 힘든 시간이 있었다.
(행 9:26-29)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교회 안에도 인간적인 편견과 장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만난 자요 예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자라면 하나로 연합하여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면 연합되어 갈 것이다.
(빌 2:2-8)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6. 사도 바울은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시작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요 성령께서 주도하신 사역이었다. 성령께서 이방땅 선교사역을 위해 보내실 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순종하여 선교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므로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행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성령께서 그의 길을 막으실 때에는 순종하였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못하게 하실 때는 순종하였다. 자신이 하고자는대로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밤에 환상을 통해 주신 마케도냐의 부르심에도 순종하였다.
(행 16:9-10)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3차 선교여행 때에 에베소에 도착하였을 때 에베소 교회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였었다. 이는 그가 성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사역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직접 성령께서 자신에게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음성을 들었다.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성령과 함께하는 사역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령을 거역하거나 “결박과 환난”을 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가 성령의 음성을 전해주면서 예루살렘을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렸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의 위협을 당해왔었던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나아갔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에게 로마에서도 전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셨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자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선교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끝나지않았으며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모든 생애는 자신을 위한 삶이 없었고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 안에서 선교사역을 마쳤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생애는 예수님을 위해 살았고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았던 생애였다. 우리의 삶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생애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기위해 성령을 간구하며 성령과 함께하는 생애를 살아가야할 것이다.
(눅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로마에서의 사도 바울의 순교
바울의 생애는 어떻게 마쳐지게 되었는가?
“로마에 도착하자 바울은 공의와 성실의 사람인 황제의 근위대장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그의 너그러움으로 바울은 비교적 자유스럽게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행적, 485)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면서 무죄로 선언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바울의 심문의 때에 그에 대한 고소는 기각되었으며, 네로는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품성과 전혀 모순되게 공의를 존중하여 죄수에게 무죄를 선언하였다. 바울의 속박은 제거되었고 그는 다시 자유인이 되었다.”(행적, 486-487)
그후 네로는 사도 바울을 그럴듯한 죄목으로 다시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바울이 로마에서 무죄 석방된 후 여러 교회에서 행한 그의 사업은 그의 원수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로의 박해가 시작된 이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배척받는 종파였다. 얼마 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로마의 방화를 선동한 죄를 씌우고자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한 순간이라도 바울이 죄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이라도 그럴 듯하게 조작하면 이러한 비난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바울은 다시 체포되었고, 그의 최후의 감금은 서둘러졌다.”(행적, 489)
“로마에 도착하자 바울은 침침한 토굴속에 갇혔으며 생애가 마쳐질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었다. 그 도시와 국가에 대한 가장 비열하고 가장 무서운 범죄 가운데 하나를 선동하였다는 고소를 당한 바울은 만민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행적, 490)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난 네로는 그럴 듯한 구실을 발견하는 대로 사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그 후 오래지 아니하여 네로는 바울로 순교자의 죽음을 하도록 정죄하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로마 시민은 고문형에 처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바울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형장으로 옮겨졌다. 몇 사람밖에 그의 형 집행을 하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감화가 확대될 것을 우려한 그의 박해자들이 그의 사형 장면을 목격하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는 자들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행적, 509)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복음전파를 위해 힘썼던 결과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퍼지게 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들어온 것을 막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그럴듯한 죄로 사도 바울을 죄수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참수형을 선고하여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을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사로잡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온 생애는 마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라는 장엄한 곡을 연주하고 끝마쳐지는 생애와 같다. 그 장엄하고 숭고한 생애의 곡은 보고 듣는 청중들의 가슴에 큰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고 끝나는 연주처럼 느껴진다. 비록 연주는 끝났지만 그 감동과 여운은 사라지지않고 우리의 가슴에 계속 남아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는 사도 바울의 생애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계속하여 연주가 이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