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향초등학교 축구부 전설
안 후 영
본회 자문위원
죽향국민학교 축구부의 조직은 1970년도 4월에 이원종 교감이 3,4,5,6학년에서 학년 당 10명 이내로 약 40명을 선발하였다. 신장 체력 머리가 좋은 학생을 위주로 선발하였다. 축구부 훈련은 방과 후 훈련과 조기훈련, 합숙훈련, 전지훈련으로 5,6학년 대표선수 중심으로 강화훈련을 실시하였다. 분기별로 학급대항 축구대회를 실시하여 우승학급을 시상하였다. 개인기 훈련으로 리푸팅 1,000개 목표로 기록 측정 기록하였다. 또한 60M 와 100M 달리기를 연습하여 15초 이내로 달리도록 강훈련을 실시하였다. 1971년 3월 이원종 교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지도교사로 전북열 교사를 합류시켰다. 전교사는 대전사범 축구부 선수 출신이다.
축구부 영양급식으로 주 1,2회 육식(돼지고기 소고기)을 급식하였고, 겨울에는 개구리와 뱀을 선수들과 같이 직접 잡아서 영양급식을 실시하였다.
체력훈련 및 이론, 작전교육을 수시로 하였고, 담력 기르기의 방법으로 야간에 공동묘지에서 께임을 하였다.
군내 학교대항 축구대회로 삼양초등학교와 영동초등학교 축구부와 수시로 시합을 하여 주로 승리하는 시합을 하였다. 도내 축구대회는 청주 한벌초등학교와 청원 옥산초등학교, 보은, 제천, 충주와 시합을 하였다.
1972년 6월 16일 오후 3시 20분 서울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 전국소년스포츠대회 초등학교 축구 1차전 타임아웃 호각 소리가 길게 울리는 순간 충북대표 옥천 죽향국민학교 선수 11명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교감 이원종(47세)을 얼싸 안았다. 맨발의 축구 1년 만에 압승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날 죽향국교 선수들은 표범과 같은 날쌘 동작과 정확한 헤딩슛 등 탁월한 개인기로 상대팀인 충남 장항 중앙초등학교 팀을 일방적으로 압도 6:0 이란 스코어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원종 교감으로 부터 축구를 배운지 꼭 1년, 경기 출전 경력이라곤 지난번 도 예선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원종 교감이 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은 1971년 4월, 매일처럼 싸움질이거나 학교에 결석하는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공차기를 통해 성실성을 배우게 해서였다. 이들은 축구화가 없어 맨발로 연습에 나서 하루 3시간씩 볼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무룹차기 발등차기 헤딩 등을 1천3백회씩 1년 동안 90여개의 축구공이 닳도록 연습을 되풀이 했다. 지난달 9일은 충북에선 대회에서는 묘기로 청주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의 뒷바라지는 이원종 교감의 부인 김순남 여사(43세)도 한 몫 하였다. 꼬마들의 연습장에 나와 해진 볼을 깁고, 운동복을 빨아주었다. 전교생들은 영양공급을 한다고 메뚜기와 개구리까지 잡아 주었다는 것이다. 주장 최순종 (12세)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고향에 내려가겠느냐” 면서 필승을 다짐했다.
1974년 6월 7일 제3회 전국소년체전에 충북에서 최종 선발되어 충북대표로 출전하였다. 죽향국민학교 축구부 11명선수들은 조그만 체구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우수한 부산 소년의 집 고아팀을 재치 있게 개인기로 대거 6:0 으로 크게 우승하여 갈채를 받았다. 죽향 축구부 선수들을 꼬마 펠레라고 불렀다.
1975년 6월 제4회 전국소년체전에 충북대표로 출전하여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활약했던 축구부 선수로는 최순종(주장), 정기동(국가대표 골키퍼 코치), 최상국(군산 호원대 감독), 남기영, 신상근(개인사업), 홍승훈(홍성여중 교사), 박덕진(개인사업), 전운홍(중고 교사), 전운선(국민은행), 송진무(개인사업), 강석호(개인사업), 홍영운(국가대표), 염상돈(개인사업), 석종성(개인사업), 석종룡(개인사업), 황성문, 김평국(개인사업), 강상원(의사개업), 정해성(서울에서 전학)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나중에 국가대표가 세 명이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6학년 시절 전북열 지도교사가 담임을 맡았던 정기동은 청주 대성중, 청주상고, 포항제철 축구팀을 거쳐서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기량이 뛰어난 충북의 다른 학교 선수들도 합류했는데, 그 중에는 청주 한벌국민학교의 최순호도 있었다.
전국을 제패한 후 귀향한 선수들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시가행진이 죽향국교 학생 학부형 등 지역 인사 여러분이 옥천역에서 부터 출발하여 옥천시가지를 돌아 죽향초등학교 까지 이어졌었다.
축구부 감독으로 이원종 교감과 지도교사로 전북열 선생과 이수남 코치가 수고하였다.
참고문헌: 죽향초등학교 자료전시실
죽향초등학교 100년사
전북열 전 교장
동아일보. 매일경제
전국대회 우승한 죽향초 축구부의 전설
전북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죽향초등학교 교사 겸 축구부 감독으로 활동한 시기(1971~1976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죽향초 이원종 교감이 축구부를 지도할 교사가 필요하다며 요청하는 바람에 부임한 이후 6년 동안 활동했다. 당시 내 나이 37~42세로 의지와 열정이 한창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기간에 죽향 축구부는 전국소년체전 2회 우승, 시도대항 선수권대회 1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원종 교감은 ‘숭배’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정말 존경하던 선배 교사였다. 대전사범 시절 축구부에서 활약한 사실을 거론하며 지도교사로 와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도 축구부 아이들과 어울리며 각자의 특기와 장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원종 교감과 함께 관련 서적을 구해 읽으며 축구 전술도 연구하고 작전도 짰다.
큰 대회를 앞두고 합숙생활을 할 때는 아이들과 동고동락했다. 아이들의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개구리를 직접 잡아와 끓여서 먹이기도 했다.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늦은 밤에 모두 깨워 공동묘지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라이벌 상대팀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북 풍기까지 가서 연습하는 장면을 몰래 살펴보기도 했다. 일종의 정보전이었다.
“계속 움직여라. 절대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지 말거라. 동료가 패스하면 그냥 서서 기다리지 말고 ‘마중’을 나가서 공을 받아라. 항상 상대의 움직임을 살펴라. 그리고 상대에 ‘업히지’ 말고 ‘업어야’ 한다.”
당시 연습이나 경기를 할 때 내가 해주었던 말이다. 선수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마중’이나 ‘업다’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그런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덕분인지 4~5년이 지나면서부터 죽향 축구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4~1975년 전국소년체전에서 충북 대표로 출전해 군 단위 학교로는 드물게 우승컵을 차지했다. ‘죽향 축구부 돌풍 신화’는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었고, 옥천 읍내 중심가에서 시가 행렬이 펼쳐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선수들과 교사를 향해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죽향 만세! 옥천 만세!”
당시 활약했던 축구부 선수로는 정기동, 최상국, 남기영, 신상근, 홍승훈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나중에 국가대표가 세 명이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6학년 시절 지도교사인 내가 담임을 맡았던 정기동 선수는 청주 대성중, 청주상고, 포항제철 축구팀을 거쳐서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기량이 뛰어난 충북의 다른 학교 선수들도 합류했는데, 그 중에는 청주 한벌초의 최순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