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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백수(白水)의 노래 (7)
관중을 만난 그 이튿날 영척(寧戚)은 요산 밑에서 소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지 사흘째 되는 날, 제환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영척은 지난번과 다름없이 짧은 홑바지에 낡은 삿갓을 쓰고 소를 먹이다가 제환공(齊桓公)이 탄 수레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맑은 물 속에 하얀 돌은 빛나고
그 사이로 월척 잉어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도다.
아직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지 못해
짧은 홑바지가 종아리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저녁무렵부터 소를 풀 먹여 한밤중에 이르렀으니
밤은 길고 더디어 언제라야 아침이 될까.
제환공은 영척(寧戚)의 노래 가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시종에게 명했다.
"저자를 이리 데리고 오너라."
시종들이 영척을 제환공 앞으로 데리고 왔다. 제환공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성은 영(寧)이며, 이름은 척(戚)이라 합니다."
"너는 한갖 소를 기르는 촌부로서 어찌 감히 나라 일을 비웃는 것이냐?"
"신(臣)이 소를 치는 농부로서, 어찌 나라 일을 희롱할 수 있겠습니까?"
제환공(齊桓公)이 정색하며 꾸짖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계시고 아래로는 과인이 천자를 도와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다. 요순 시대도 이보나 낫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요순 시대를 못 만나 밤만 길고 아침은 오지 않네'라고 노래하였으니, 이것이 지금 이 시절을 비웃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영척(寧戚)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신이 비록 촌사람이나, 요순 시대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잘 따르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강도 서지않고 교육도 실행되지 않는데, 걸핏하면 요순시대와 다름없다고 말하니 소인은 정말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영척은 이어서 말했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요순 시대엔 모든 제후들이 바르고 깨끗하여 태평성대라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평화롭고 위엄이 섰다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어제 동맹을 맺고 오늘 배반을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은 형을 죽여 임금 자리에 오릅니다. 병사들은 쉴 새가 없고 백성들은 지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태평성대라 하시니, 소인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영척(寧戚)이 말하는 동안에 제환공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몹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소 치는 촌부 주제에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냉큼 저놈을 잡아 목을 베어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영척(寧戚)을 밧줄로 묶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영척은 추호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우러르며 크게 외쳐댔다.
"옛날에 폭군 걸(桀)은 충신 관용봉(關龍逢)을 죽였고, 주(紂)는 비간(比干)을 죽였다. 오늘 영척이 죽지만, 이름은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빛나겠구나."
이러한 영척(寧戚)의 기상은 늠름하기까지 했다.
한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손습붕은 비로소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제환공 앞으로 나갔다.
"주공께서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 사람은 죽음 앞에 섰건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단순한 촌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제환공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군사들에게 밧줄을 풀도록 명령했다. 영척(寧戚)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과인이 잠시 그대를 시험해보았다.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선비다."
영척(寧戚)은 그제야 품속에서 관중이 써준 편지를 꺼내어 바쳤다.
신이 먼저 이 길을 지나다가 위(衛)나라 사람 영척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소 먹이는 촌부가 아니라,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인재입니다. 주공은 마땅히 그를 등용하시어 도움을 받으십시오. 만일 그가 다른 나라에 등용되면 다음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제환공은 편지를 읽고 나서 크게 놀랐다.
"그대는 어째서 편지를 진작에 보이지 않았는가?"
"신이 듣건대, 어진 임금은 신하를 골라서 쓰고, 어진 신하는 주인을 골라 섬긴다고 했습니다. 만일 주공께서 바른말을 싫어하고 아첨하는 것만 좋아하시어 노여움으로 신을 대하셨다면, 이 영척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재상의 편지를 내놓지 않았을 겁니다."
제환공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어서 수레에 올라타시오."
친히 손을 내밀어 영척(寧戚)을 잡아끌었다.
그 날 밤이었다. 제환공은 횃불을 밝히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영척(寧戚)에게 관복을 내주어라."
궁인 수초가 놀라서 물었다.
"영척에게 벼슬을 내리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수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위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영척(寧戚)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고 벼슬을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제환공은 고개를 저었다.
"영척(寧戚)은 인재이다. 과거의 일을 조사해서 벼슬을 주면 전혀 그 영광이 빛나지 않는다. 만일 허물이 있었다 한들 버리지 않을 바에는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너는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라."
이리하여 제환공은 영척(寧戚)을 대부로 삼고 관중과 함께 나라 일에 참여하게 했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일을 놓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짧은 홑바지를 입은 소 치는 촌부가 요순 대신 제환공(齊桓公)을 만났도다. 소 뿔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도 이제 끝났다. 이는 주문왕(周文王)이 위수 가에서 강태공을 얻은 것과 같도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