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유배문화 체험촌(포항 장기 서촌리)1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사인보드)2
유배와 장기-장기는 신라 때는 只畓縣으로 현재 구룡포와 호미곶까지
관장하던 동해안의 요충지였다.관내에는 고대산성(시령산성.만리성)과
장기읍성(1011년(고려 현종2년)-1439년(세종21년)이 있다.
장기는 조선시대 유배와 관련있는 중요한 곳이다.세종 때 配所詳定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경성에서 유3천리의 빈해(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유배인은 모두 149회(남172명.여자39명 합211명)
으로 확인된다.이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유배의 형기는 종신형
정치적으로 단죄된 유배자는 임금의 사면 이외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홍(객사함).이시애 난으로 유배와서 복권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을 간직한 채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형벌제도로서의 流配-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낸다라는 뜻이지만 流는
아주 먼곳으로 보내 살게 한다는 의미이고 配는 자유로이 할 수 없도록 어느
곳에 짝지어 배속시키는 의미가 있다.장기는 濱海各官에 해당되었다.
조선시대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한양-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
-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이길은 서울에서 860리 하루에 95리를 걸어서 9일반이 걸렸다.현감은
배소.보수주인을 정하고 정기적인 감시를 하게된다.정기적인 감시(월2회
-點考) 아전.군교.관노.지역유지가 보수주인을 맡았는데 송시열의 보수
주인은 (선비 吳道全).정약용의 보수주인은 (군교출신 成善封)이었다.
조선 최고의 논객을 품었던 장기-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은 지역에서
인재들을 양성해서 독특한 유배문화를 낳았다.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
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120년 먼저온 우암 송시열은 4년여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세력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
학양성에 힘을 썼다.좋은 정신을 이어 받았기에 장기에는 무려 서원이
17개로 경북에서 가장 많은 고장이 되었다.특히 임란 때 경주성 탈환에
일조한 이대임.서방경.서극인 등과 의병장 장헌문.정치익같은 구한말
의병.애국지사 엄주동같은 선열들이 있었다.
죄수의 이동수단(소달구지)3
죄수들의 형기(곤장형틀.곤장.칼)4
형구의 종류(칼.곤장.곤장형틀)5
장기 유배지의 돌다리6
다산의 벽(다산의 유배생활)7
다산은 1801년 1월19일에 터진 冊籠事件 즉 신유박해라고 부르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류되어서 장기로 유배되었다.다산은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의 집에서 약 220일 동안 머물렀다.
다산은 220일동안 기성잡시27수.장기농가10장.고시27수 등 60제
130여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기해방예번.삼창고훈.이아슬.촌병혹치 등을 저술하고 아들에게
3통의 편지글도 남겼다.
다산의 벽(장기와 유배)8
유배과정은 유배길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고 개인적으로
노비를 거느릴 수가 있었다.유배인은 관직자일 때에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
하고 유배길목의 수령들은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양반 관료들인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유배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이동을 하는데 며칠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하루에 평균 80리-90리 정도가도록 규정이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지는 않았으며 신분 및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
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
장기는 조선시대 때 제주도.전남 강진.경상 남해 등과 함께 주요 유배지
중의 한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장기현은 서울과 8백64리 떨어져 신라 멸망
이후 변방에 속해 있었다.
유배형의 종류는 유2000리.유2500리.유3000리가 있으며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영조21년.영조31년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장기는 기장.영해와 함께
유3000정도의 거리라서 유배오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초의 유배인은 1392년(조선 태조1년) 설장수
이고 이후에 이름을 날린 사람만 해도 조말생.송시열.김수홍.정약용
등이 속속 장기로 유배를 왔었다.
신라 멸망이후 장기는 基層文化(고유문화)를 가진 고을이었지만
조선조 실제로 정객과 학자들이 유배를 와서 중앙의 고급문화와 학문을
유포해 유향으로 변화했다.
그리하여 동일지역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창건되었다.
유배인들은 고난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선비
들을 교육시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남겼다.이런 풍토는 은연
중에 학자 내지는 관직 지향적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1591년(선조24년)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
홍성민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6섯필과
의식을 장만하는데 가산을 털어야만 했다고 한다.
장기는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다산 등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으로 우암은 아내의 부음 그소식을 접하고도 애통한
마음만을 슬픈 제문에 실어 손자에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다산의 벽(매화병제도.다산심상)9
매화병제도는 아내 홍씨에게 받은 낡은 치마에 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축하하는 매조도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시와 이를
만든 사연을 적었다.
다산의 벽(다산의 배소.고시27수)10
다산의 배소-다산은 장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01년 3월10일부터 마산리
구석골에 사는 늙은 莊校 成善封의 집을 배소로 정하여 있게 되었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馬峴에서 출생
했다.그후 40년만에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과 뜻을 가진 馬峴에 귀양살이를
왔다.
다산의 유배생활(다산의 유배지 장기)11
다산의 적거지(打麥行을 모티브로 재현)12
打麥行은 보리타작을 하는
장기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
망향정13
장기로 유배를 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1392년(태조1년) 문화시중 楔長壽는 장기로 온 최초의 유배자로 설장수는 원래 위그루인으로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했다.공양왕을 세우는 병란을 주도해
이른바 9공신으로 불렸다.하지만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우현보.이색 등과 함께
도당을 결성해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로 장기로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15년) 영의정 金壽興은 원자 책봉문제(기사환국)로 송시열과 같은 노선에 섰다
가 왕의 미움을 사서 장기에 귀양와서 약1년간 머물다가 1690년 장기에서 객사하였다.
1723년(경종3년) 申思喆은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자 김창집의 당으로 연루되어 장기로
유배되었다.
우암의 벽(우암 송시열)14
우암 송시열(1607년-1689년)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75년(숙종원년)
6월19일조에 기술된 감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1675년 6월10일 장기에
도착해 성동문밖 마산리 士人 吳道全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1679년 4월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4년여 장기에 머문 우암은 17
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정치.문화.사상적으로 지배했던 國老巨儒답게
변방의 범속한 풍습(기층문화)을 가졌던 장기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儒鄕으로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4년동안 우암의 인맥들이 장기를 무수히 방문했다.1676년 2월3일 소론의
영수 윤증의 방문이었다.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정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를 조성했다.이것은 영남지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암의 벽(우암의 유배생활.우암의 배소)15
우암의 유배생활-松子大典 행력과 부록 제7연보에 따르면 우암은 장기 유배동안
수많은 문인들과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우암은 당시 부실.아들
손자.증손자까지 함께 했는데 이는 비록 유배객이지만 그의 입지가 대단함을 반증
하고 있다.
귀양 중에도 동생 시도.시걸 아들 기태 손자 주석.증손자 일원 및 유원이 자주 드나
들며 수발을 들었다.
우암 형제들은 우애가 깊었다.우암은 동생들과 함께하면서 깊은 학문은 이루지 못
했으나 근심을 잊고 낙이 있었다고 한다.
우암의 보수주인 吳道全은 4년간 우암의 문하에서 상당한 학문을 이루었다.이로서
오도전은 장기현의 훈장이 되어 후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원명은 吳道傳인데 정도전과 전자가 같아서 吳道全으로 고쳤다고 한다.
늦은 봄 어느날 어떤이가 암꿩 한마리를 선사했다.암꿩을 여러번 쓰다듬다가
우암은 지금 한창 꿩이 알낳고 새끼를 칠 시기인데 잡아먹을 수가 없다고 방생
할 것을 요구했다.가져온 사람은 감동하면서 놓아 주었더니 얼마후 수많은
새끼를 데리고 산간을 왕래했다는 일화가 있다.
장기현내에 와서 마을이름을 물었더니 馬山이라 대답했다.읍호에 鬐(갈기기)
자가 馬자와 관계가 있다.윤휴가 조사기.이무 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로 옮기
기를 청하여 웅천으로 정했다가 장기로 옮겨 위리안치 되었다.심양필이 가시
울타리를 치는 것을 감독했는데 자제들이 전례를 끄집어 내어 후문설치를 요구
했지만 허락치 않았다.
이 터는 현재 장기초등학교로 추측된다.우암이 심은 은행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암은 채전밭을 만들어 약초와 생각도 심고 행단도 일구고 우물도 파서 붕어도
키웠으며 창밖에 벌을 치면서 조석으로 즐겨 구경을 했다고 한다.
우암의 벽(부인 이씨에게 올린 제문)16
송자대전153권에 망실 이씨에게 올린 제문은 우암이 1677년
(71세)였던 3월22일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다.
우암의 적거지17
우암은 제2차 예송사건으로 덕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기로 유배되어
있다가 1679년 4월10일 거제도로 가기 전까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의 벽을 배경으로 인증샷18
(201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