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鄭氏의 묘지명
우리 (聖上:선조임금)성상께서 (大統)대통을 이어받으신 뒤 (喪制)상제를 다 마치고 (中宮)중궁을 세우시고 나서,(隆慶)융경 신미년(1571년,선조4)에 명족의 규수를 뽑아 (淑儀)숙의 2명을 (冊納)책납토록 하였는데, 그 때에 (鄭貴人)정귀인도 여기에 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계유(1573년)에 이르러 (天子): 명나라 神宗皇帝)의 등극에 따른 은사를 받고 소의(정2품 내명부의 직위)로 올랐으며, 정축(1577년)에 인순왕후의 상제가 끝난 뒤에 그야말로 귀인의 명을 받게 되었다,
정씨의 관향은 영남 (迎日)영일인 이다, 먼 조상으로는 고려 문하평장 정균지(鄭均之)와 정당문학 문정공 정사도(鄭思道)가 유명하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지의정부사 정홍(鄭洪)이 있었다,
증조부 정위(鄭爲)는 건원릉 참봉이었고, 조부 정유침(鄭惟沈)은 돈녕부판관 이였으며, 부친 정황(鄭滉)은 안악군수 였다,
모친 한씨는 모관 모씨의 딸로서, 가정.정사년(1557년)10월 을유일에 귀인 정씨를 낳았다, 귀인은 용모가 아름답고천성적으로 영민 하였다,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되면서 부터는 어버이를 공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깨달아, 날씨가 차고 더움에 따라 의복과 이부자리를 마련해 드리면서 반드시 문안을 드리고 보살펴 드리곤 하였다, 그릭 무슨 일이 있어도 맛있고 연한 반찬을 하여 드리려 하였으며, 비록 자신에게 주시는 일이 있어도 생각이 없다하시며 사양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조금 장성해서는 여자가 지켜야 할 법도를 마음에 새겨 몸가짐을 단정하게 지니고서 실없이 장난하는 일은 전혀 좋아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궁중에 선발될 즈음에도 나가고 돌아오는 것과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과 몸을 꺽고 돌리는 행동 등을 모두 원래부터 훌륭한 법도가 있는 집 가문에서 익힌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배운대로 행하였으므로,내정(內庭)에서 이를 보고 탄식하며 모두가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일단 궁중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소학 小學]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면서 그 의리를 몸소 알고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었는데,그런 뒤로부터는 더욱 엄숙하게 자신을 단속하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과묵한 자세를 견지하였다,그리하여 매일 아침마다 위의(威儀)를 잃는 일이 없이,종일토록 나태해지려는 뜻이 깃들이지 않도록 함으로써, 한번 앉고 한번 서는 순간에도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하는 일이 전혀 없게 하였다,
또 上의(선조임금) 총애를 받게 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마치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황공한 태도를 취하였고,물러 나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때나 시비(侍婢)와 함께 있을 때에도 절대로 웃거나 떠드는 일이 없었으며,무성하게 쏟아져 나오는 별이별 이야기들도 귀담아 두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지엽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구차하게 취하려 하지를 않았으니,,,
맛이 야릇하면 맛보려 하지않고,색갈이 변했으면 입에 대려 하지않고,출처를 물어서 온당치 못할 경우에는 먹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대할 때의 안색이나 목소리는 온유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 나왔으므로,귀인과 함께 처하는 자들은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편으로 속으로 꺼리는 바가 없게되어,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上이 귀인을 매우 끔찍이 총애하여 어서(御敍 시침(侍寢))하는 일이 가해질 때에도 더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면서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행동하였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개인적인 편의를 도모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감히 입을 열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부모 외에는 문안을 하거나 선물을 보내 서로 통하는 경우가 없었으며,궁중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비록 부모라도 전혀 들일 수 없도록 하였다,
일찍이 病이 들어 말미를 얻고 사실(私室)에서 쉬고 있을 때, 上이 보낸 중사(中使:환관(宦官))가 위문하러 올 적이면,문득 세수하고 머리빗고 의복을 갖추어 입고 일어나서,마치 처음부터 병고(病苦)를 격지않은 사람처럼 중사를 맞이하곤 하였으며,上으로부터 음식과 약물을 하사받는 일이 있게 되면,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고서 근심하는 것이 오히려 병든 것보다도 더 심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임신하여 달수가 차자,上이 궁중에 산실(産室)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는데,이런 때에는 모친인 한 부인이 궁중에 들어와서 도와주도록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귀인 정씨는 외부의 부인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예법상 안 될 일이라고 극력간청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짐에 따라 크게 마음을 상하게 되자,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부인을 궁중에 들어오게 하도록 권했으나 귀인은 끝내 그 말을 들으려 하지않았다,
이에 上이 궁 밖의 사저(私邸)로 나가 조리하도록 명함으로써 이제는 모부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그때는 이미 귀인이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친인 군수공 역시 바야흐로 임소에 가 있는 때였다,
기묘년(1579,선조12년 4월 임인일)에 부음 하시니,그때 귀인 나이가 23세요, 아들은 끝내 두지를 못하였다, 上이 부음을 듣고 슬퍼해 마지않으면서 염습(殮襲) 때 부터 잇따라 세 차례에 걸쳐 치제(致祭) 토록 하였다,
귀인은 궁중에 있었던 9년 동안 누구 보다도 검약을 신조로 삼아 스스로 지켜 나아갔다, 그리하여 죽고 난 뒤에 보니 의복도 겨우 염습할 것만 갖추어져 있었고 재물 역시 남겨 놓은 것이 없었으므로,內外의 사람들이 모두 일컬으며 탄식하였다,
그해 6월 임인일에 예법에 따라 경기 고양 조묘(祖墓)의 옆에 장사 지냈다,
귀인 정씨에게 銘은 다음과 같다,
산과 못에 주옥이 있게 되면
그 주위가 한결 돋보이듯이
이제 귀인이 이곳에 묻혔으니
신령스런 이적(異跡)이 당연히 보이리라
아~아~ 천년만년 토록
감히 훼손치 말지어라,,,
山
기묘년(1579) 崔立 撰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옥이 산에 있으매 초목에 윤기가 나고,
못이 구슬을 나게 하매 양쪽 언덕이 마르지 않도다,,라고 했다,
첫댓글 감무집인가요?
ㅎㅎ 우리집에는 조선왕에 대군께나 후궁으로 들어 가신 선조 왕고모님은 단1분도 없구요,
모두 감무공파의 왕고모님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