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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
2021년 1월 10일,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621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찬송 37장(주 예수 이름 높이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은 롬 12;1-2절(신약 256쪽)입니다.
제목: “그러므로 내 몸을”
코로나 19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WHO가 작년 3월에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한 지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확산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 누적 확진자 수가 8,70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190만 명에 이르렀는데, 지금도 하루에 수십만 명씩 증가하고 있어서 머지않아 1억 명이 넘어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형편이 좀 나은 편이지만, 누적 환자 수가 6만 명이 넘고, 사망자 수도 요즘 많이 늘어나서 1,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새해를 맞이했지만, 마음대로 활동할 수도 없고, 예배도 함께 모여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 가혹한 전염병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기도하지만, 그 날을 우리 인간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선하신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겸손하게 인내하면서 일상생활을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1. 우리는 복음을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러므로’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긴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5,37)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므로, 모든 일에서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므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전염병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항상 ’복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낙심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고, 기쁨이 있고, 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마음과 입으로 늘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입니다.(롬3:24)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행을 하거나 기도나 헌금과 같은 종교행위를 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고 해야 이해가 되고 그런 자신을 의롭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우리의 이해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수고한 대가로 얻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내가 수고한 대가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는 자들’ 이라고 말합니다.(롬3:28)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은혜로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의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많은 종교적 행위들을 행합니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 감염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감염원의 1/3 정도가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함께 모여 부흥회를 하다가, 식사를 하다가, 아이들이랑 모여서 재롱잔치를 하다가 코로나 확진자들이 나왔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자신들은 기쁨이 넘치고 은혜를 받아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모를 따라 왔다가 코로나에 감염된 아이들, 연세 드신 어르신들, 또 그들로 인해서 감염된 이웃과 직장 동료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종교행위들은 비난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정부 방역당국의 지침을 무시하고 요즘 새해를 맞이했다고 특별새벽기도를 강행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자신들은 코로나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믿음을 가졌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새해가 아니어도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고, 반드시 교회에 모이지 않아도 예배드리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예배의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교회들의 행태를 보고 이웃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교회라고 비난합니다. 그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집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자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복음은 죄인들을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주간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주신 말씀입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는 팬데믹 시대가 기독교 성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에 JTBC ‘차이나는 클래쓰’에서 ‘팬데믹 시대와 신앙’이란 주제로 강연하신 것을 들었는데, 팬데믹이 기독교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 아래 있을 때, 로마제국에 두 차례의 큰 팬데믹이 있었습니다. 165년에 발생한 안토니우스 역병과 250년에 발생한 키프로스 역병으로 로마 제국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갈 때, 사람들은 형제들이 죽어가도 두려워서 돌보지 않았고 , 종교 성직자들은 신에게 제사 드리는 제의(祭儀)에만 전념할 때, 유독 그리스도인들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하며 그들을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마침내 313년에 기독교를 믿어도 좋다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도시대에 시작된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약자를 돌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전파에 알렌의 의료 선교가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조선에 온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이 일어나 크게 다친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 인해서 고종 왕의 신임을 얻었는데, 알렌은 왕에게 요청하여 왕립병원인 광혜원을 개설하였고, 이는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3·1운동 독립을 선언한 33인 중에도 기독교인이 16명이나 있었습니다. 복음은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기적이고 율법적인 종교행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복음으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동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삶의 동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라면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심판을 피하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또 복음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나 즐거움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환난이나 역경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고난이 닥칠 때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구나” 하고 낙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8장까지 교리를 강론할 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강한 어조로 진리를 선포했지만,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라고 부르면서 낮은 자세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도 바울도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로마 교회 성도들과 동일선 상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흔들림이 없지만,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은 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자신의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요소를 권고합니다.
한 가지는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약시대와 달리 짐승의 희생제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권세를 얻었지만,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산 제물(living sacrifice)이란 하나님의 뜻에 매일 매일 자신의 삶 전부를 내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제물 전부를 온전히 태워서 거룩하게 바쳐진 번제물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3,24)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늘 순종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과 형편을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되고 합당한 예배,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든지, 아니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 3:18) 바울이 말하는 변화는 겉으로 어떤 것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 곧 근본적인 삶의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주일학교 시절에는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출석도 잘하고 예배를 잘 드리지만, 조금 크면 예배를 싫어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성령님만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녀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세상적인 패턴(pattern)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 세상 풍조는 시대에 따라 늘 변합니다.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원 받은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음 가운데 늘 서야 합니다. 우리는 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을 분별하고 시험해 봐야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움’(sobriety)’ 이란 의미는 술 취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믿음의 분량은 양적인(volume)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기준(measure)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준이 하나입니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믿음이라는 동일한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지금 현재는 사는 형편이 좀 다를지 몰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믿음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평가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준으로 아주 정확하게 실제적으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서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삶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로 굳게 서서, 구원의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과 능력에 따라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 19 팬데믹이 하루 빨리 멈추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그보다도 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을 통해서 타락한 오늘날 이 시대와 세속화된 교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들로 거듭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어렵고 고단한 환경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형편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면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의 삶 전부를 바치는 산 제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찬송가 213장(나의 생명 드리니)을 부르시면서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