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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장 16-17절. 디도의 마음에 간절함을 주심 (바울의 훌륭한 조력자 디도)
1. 모범적인 헌금이란 내가 드린다는 자세가 아니라, 부요하신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시고 목숨까지 나를 위해 주신 것에 감격하여,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가난하고 괴롭고 어려운 형제를 위해 내가 가난하게 되려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물질이 부족해서 헌금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부유한 우리가 헌금하여 도움으로써 사랑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하고, 또 받는 사람도 은혜와 사랑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의 흐름뿐만이 아니라, 실제는 사랑이 흐르는 것을 목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서로 평균케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돕는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고, 아니면 후손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2. 오늘의 말씀은 헌금을 취급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하려 함이라.” (21절)
헌금하는 일은 아주 선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방법은 조심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일수록 절제하고 조심해서 해야 지속적으로 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불투명하면, 교인들이 헌금을 할 마음을 잃게 됩니다.
헌금하는 데 있어서, 한 사람이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보다도, 여러 사람이 적은 돈이지만 매달 얼마씩 지속적으로 헌금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또 헌금을 관리하는 사람은 명세서를 세세하게 적어서 보내고, 규모있고 절제있게 쓸 때, 헌금하는 사람이 기쁨으로 헌금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3. 선교사들도 선교 금을 규모 있게 쓴다는 신뢰심을 주어야 합니다.
헌금이 쓰여진 확실한 증표를 보지 못하면, 후원자가 기쁨으로 바치지 못하게 됩니다.
개교회에서도 헌금이 올바르게 사용된다는 확신을 교인들이 가지게 될 때, 더욱 많은 헌금이 드려집니다.
이처럼 헌금은 지극히 선한 일이기 때문에, 규모있고 투명하게 쓰일 때, 지속적으로 헌금이 바쳐진다는 것입니다.
4. 절기 헌금 같은 경우에는 큰 헌금이므로, 온 가족이 다 알도록 하여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이 자기가 번 돈이라고 해서, 부인 모르게 바쳐도 안 좋습니다.
남편이 안 믿는다고 부인 혼자서 몰래 드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말했다가 믿음도 부족한 데, 드리지 못하면 어쩝니까?” 하고 염려하시지겠지만, 기도하고, 정정당당하게 드리는 것이 자기에게도 은혜롭고, 안 믿는 식구들에게 전도도 되고, 또 예수 믿으면 의례껏 그렇게 헌금하는 것인 줄 인정하게 하는 좋은 태도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교회가 생명 같으니까, 저 정도는 바쳐야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흐지부지하게 하는 사람이 헌금만 많이 드리려고 하면, 싸우게 됩니다.
불신 가족과 함께 생활하시는 분들은 평소에 철저히 신앙생활을 하셔서, 헌금할 때, 거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16절.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anks be to God who puts the same earnestness on your behalf in the heart of Titus.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Χάρις δὲ τῷ Θεῷ, τῷ διδόντι τὴν αὐτὴν σπουδὴν ὑπὲρ ὑμῶν ἐν τῇ καρδίᾳ Τίτου,
thanks but to the God, who giving the same earnestness for you in the heart of Titus
‘주시는’(διδόντι)는 현재분사로서(giving) 현재 주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1. 본 절에서 간절한 마음이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열성적인 마음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가 신뢰하는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에 가서 구제 헌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을 찾던 바울 사도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동료인 디도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한데, 이 간절한 마음은 디도가 스스로 마음 먹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these good motions in the heart of Titus were not merely natural, or the effects of human power and free will, but were of God)
즉 디도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바울을 스승으로 추종한 것만이 아니라, 디도 자신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만일 디도가 인간적으로 바울의 눈치를 보아 일시적으로 간절한 마음을 먹었다면, 디도가 바울의 면전을 떠나갈 때는 이런 간절하고 진지한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디도의 마음에 이 고린도 교인들을 정성으로 대할 간절한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2. 한편,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의 열정을 상기시킴으로써( 7:13-15),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게 합당한 예우로써 영접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함이지, 헌금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10절- 뜻만 보이노니).
3. 디도가 이 헌금을 모금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가지고 가는데, 책임자임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도 함께 가지만, 이 헌금에 대해서 손을 대지 않습니다.
모금은 바울 사도가 제일 힘껏 감당했지만, 실무는 디도가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기가 많은 헌금을 드렸다든지, 모금을 많이 했다고 해서, 내가 꼭 운영을 해야 되고, 간섭해야 되는 줄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태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신 것은 바울 사도가 모금하는 데 있어서 제일 많이 일했지만,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디도가 중요 인물로서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협력해서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제일 좋으니까 내가 감당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도 회계 업무를 잘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믿음이 제일 좋은 분이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데, 장부 정리를 잘못해서 주일마다 수입과 지출과 잔고가 틀립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계산을 못 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인지... 하고.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고 돈까지 취급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이 구제 헌금을 취급하다가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전무하리라”.
돈을 다루는 것은 집사님들이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집사님을 세웠습니다.
여기서도 모든 일을 바울 사도가 주장했으나, 실무는 디도가 감당했습니다.
4. 디도가 왜 실무를 보게 되었습니까?
(1) 디도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1년이나 미루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디도는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2) 왜 디도의 마음이 간절했습니까?
디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고린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데, 이 구제 헌금으로써 불편한 관계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디도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즉, 이때 구제 헌금만 하면, 이방인 중심의 고린도 교회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의 불편한 관계가 잘 해결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것을 디도가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3) 이전에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내분 문제도 결국은 근본적으로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간의 차별화 문제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을 1년이나 미룬 것은 내부적으로 이 두 집단 간의 불화로 인해 지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내분 문제가 해결되고, 바울 사도에 대한 반대 문제도 해결되고,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 문제도 해결되고,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고린도 교회 간의 불화 문제가 해결되는 4중적 절호의 찬스가 이번 구제 헌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4) 또 한 가지, 교회에서 헌금을 하는 경우, 앞장선 분들이 먼저 최선을 다하여 헌금하고 교인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풍성하게 헌금하기를 기도해야지, 자기는 안 하면서 교인들만 풍성히 드리도록 기도하는 것은 가증한 처사입니다.
(5) 한편, 바울 사도가 디도를 앞세워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독려했던 것처럼, 우리도 내가 할 일을 먼저 감당한 후에는, 내가 감당 못 할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헌금할 수 있는 형제들에게 헌금에 동참하도록 권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헌금에 동참시키는 일은 함께 은혜에 참여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6)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디도가 남을 돕는 일,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저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인 것을 보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일에 열심 내고, 다른 사람 일에 무관심하며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데도 시간이 부족해서, 교회 일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자기 일도 피곤할 텐데, 교회 일에 열심이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 일을 돌아보며, 특히 남이 잘되는 일에 열심인 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7) 갈라디아서 2장 6절부터 보면, 유명하다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이가 바울 사도를 인간적으로 지배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지 아니 하신다”고도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직분이 높다고 물질을 더 주시고, 직분이 낮다고 물질을 덜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더 높다고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 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분야가 각각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직책을 각각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도의 분야가 있고, 목사는 목사의 분야, 장로님은 장로님의 분야, 권사님은 권사님의 분야, 집사님은 집사님의 분야가 각각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 말씀 하시다가, 10절에 보면,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셨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 야고보 장로, 요한 사도가 바울 사도에게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생각해주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이 박해하였고, 유대인들이 상업 길드 조합을 카르텔로 동맹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장사를 못 하게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먹고 살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베드로 등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이방인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 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 역시 가난한 형제들 돕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하고, 힘썼다는 것입니다.
(8) 어떤 성도의 믿음이 좋은지 아닌지를 아는 시금석은 남을 얼마나 잘 돕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프고,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제들을 잘 돕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갇혔을 때, 너희가 돌아보았고, 내가 배고플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고 했을 때, “예수님 언제 우리 집에 오셨습니까? 저는 밥을 드린 적도 없고, 옷을 드린 적도 없는데요?” 했을 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신다면 한 상 잘 대접하겠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하면, 찡그린다는 것입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는 마음부터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도와줍시다.
평소에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주님을 대접하기도 할 것입니다.
돕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려고 하는데, 힘들게 되면, 정말 진실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응답받는 기쁨이 커지고, 더욱 믿음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삶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9) 앞서간 성도들 중에, 물질 문제를 많이 다룬 분이 <죠지 뮬러>입니다.
이 분은 목사님으로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소책자 운동 즉 말씀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영도 돌보고 육도 돌보았는데, 이 고아원생들 중에서 목사님만 600명이나 나왔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만 준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말씀으로 훈련된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난한 사람을 돕고, 화목하게 하는 일을 잘했더니, 그에게서 배운 디도가 역시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는 일과 교회의 화목을 위해 일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는 일을 잘못하는 사람도,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 옆에 있다 보면, 닮게 마련입니다.
우리 가정은 진리를 전달하는 진리의 보급소일 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많이 주는 생명의 보급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디도는 바울 사도에게서 교회의 화평과 손수 일해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모습을 감명 깊게 보고서, 나중에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를 잘하고,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달마디아 지방에 전도하는 믿음직한 교역자가 되었습니다.
17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he not only accepted our appeal, but being himself very earnest, he has gone to you of his own accord.
그가 권함을 받고
ὅτι τὴν μὲν παράκλησιν ἐδέξατο,
for the indeed exhortation he accepted
‘받고’(ἐδέξ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accepted) 과거에 확실히 받아들인 것을 가리킵니다.
더욱 간절함으로
σπουδαιότερος δὲ ὑπάρχων,
very earnest but being,
직역하면 ‘뿐만 아니라 매우 간절해져서’란 뜻입니다.
동사(ὑπάρχων)는 현재분사로서(being) 현재 간절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αὐθαίρετος ἐξῆλθεν πρὸς ὑμᾶς.
of his own accord he went out to you
‘나아갔고’(ἐξῆλθεν)는 부정과거인데(he went out) 소위 ‘서신적 과거’(epistolary aorist)로서, 디도가 이 편지를 지금 가지고 가는데, 편지를 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과거가 되기 때문에, 서신적 과거로 표현한 것이니다.
1. ‘그가 권함을 받고’란 바울 사도가 이전에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성취시키도록 권한 것은 사실을 가리킵니다(6절).
그러나, 디도는 바울 사도의 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에(7:15) ‘자원하여 나아갔습니다’.
즉 디도는 바울이 시켜서가 아니라, 매우 열정적으로 자원해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he was more ready to engage in it than Paul was to exhort him to it)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자기 문제로 파벌이 생기고, 시끄럽게 분쟁하므로, 바울 사도 자신이 직접 나가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게도 디도가 바울을 대신해서 중재 역할을 잘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분쟁 해결 이후로, 다시금 구제 헌금 문제도 디도를 앞장세워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디도가 구제 헌금 문제도 나서서 해결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도가 고린도에 가기 이전에 디모데가 먼저 고린도 교회에 가서 분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디모데는 바울의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괴로움을 참지 못해서 수모를 당하고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고전 16:10-11,고후 1:1 2:4 참조)
그렇기 때문에 디도도 고린도교회의 분쟁상황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헌금을 수령하러 가기가 매우 난처했을 것입니다. (He was acquainted with the distracted state of the church, and feared that Titus might have some reluctance to engage in the service)
즉, 바울 반대당의 입장에서 보면, 디도도 디모데처럼 바울편으로 보이기 때문에 디도마저도 욕하고 배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분쟁 형편을 잘 알고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래서 디도는 시련을 잘 견디고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화목으로 이끌어냈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도 완수해냈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이 바울을 반대하던 유대주의자들(율법주의자들)을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직스러운 사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디도는 끝까지 바울 사도를 대신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해냈던 것입니다.
2.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달마디아는 어떤 곳입니까?
달마디아는 바울 사도가 최후로 전도한 지역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후 67년 가을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될 때, 바울 사도는 디도와 함께 이 달마디아 지역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디도서 2장 12절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내가 아데마나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나기로 작정하였노라”.
이것은 바울 사도가 체포되기 전 해인 주후 66년 가을에 고린도에서 그레데 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내용대로 니고볼리에서 디도를 만나 66년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에 곧바로 북쪽의 달마디아 지방에 디도와 함께 전도하러 갑니다.
그래서, 66년 봄과 여름에 그곳에서 전도하다가, 가을에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2차 투옥) 바로 직전에 전도했던 달마디아 지방 교회들의 형편이 궁금하여, 디도를 파송하여 교회들을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68년 4월에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를 끝까지 도와서 선교 사역을 했던 사람이 바로 디도입니다.
이때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후서에 나타난 대로, 디모데는 바울과 떨어져 있었고,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도 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전도자라기보다는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주치의로서의 역할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디도의 위치가 참으로 바울에게 최후로 도움을 주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3.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배척하는 고린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유대주의자들)을 위해서 사랑의 구제 헌금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원수같이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히려 사랑으로써 불화하는 관계를 화목하는 관계로 해결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원수의 얼굴에 숯불을 쌓아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도 우리에게 가장 원수처럼 괴롭히는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불교인입니까? 유교인입니까? 아니면, 어떤 이단입니까?
정말 우리도 바울처럼 원수 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가련한 처지에 있는 원수를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정말 기도하는 가운데 찾고,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