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트렁크
박우담
구름이 여자를 어둠으로 포갠 후
마을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임산부 침대 위에서
여자가 빗방울로 녹아내릴 때
가냘픈 몸은 여행 중이었었다
가죽 가방의 지퍼가 이음새 없이
여자를 여닫았으므로
흘러가지 못한 빗물이 좁은 몸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물방울이 터질 때마다
들고 있던 구름의 주소지가 지워졌다
겨울이 메스처럼 여자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여자는 보이질 않고
마을엔 얼음 우는 소리만 쩡쩡 들리어 온다
카프카의 개
박우담
여인은 햇살을 쓰고
애완용 개는 파라솔을 쓰고
건널목은 스위치를 거머쥐고
붉고 푸른 길을 만들고
헐렁하게
개가 여인을 데리고 건너간다
개의 두개골에
저장된 소리는 꽃잎이었다가
이파리였다가
여인의 절정이었다가
다시 꼬리를 흔드는 의성어가 된다
여인이 개를 쓰다듬으며 건너간다
전생과 후생이 엇갈리는 미로 속으로
개와 여인이 흘러들어간다
광고판이 기다란 혀처럼 그림자를 내리깐다
파라솔에 반쯤 가려진 채 신호가 바뀐다
점멸하는 신호등 사이에 묻힌 시간의 도면 위로
개도 여인도 보이지 않는다
내원골
박우담
나는 검은 수화를 배우고 있다
은행잎들이 서로 눈꺼풀을 부딪칠 때 확장되는 내 눈동자
빠르게 도는 영상처럼 실핏줄의 가지가
완전치 못한 검은 기호들을 떨구는 은행나무
눈꺼풀은 리셋버튼이다
빗방울이 은행알과 함께 떨어진다
가지가 잎을 붙잡을 때 동시에 잎도 가지를 붙잡는 것처럼
나는 너의 검은 손을 붙잡고 있다
죽음이라는 찰나의 상형문자
수의를 입은 흑백사진처럼 상처로 뒤덮인
무덤에 애도의 합창이 시작된다
같은 선율로 또는 옥타브 차이가 나는 선율로
떨리는 잎의 언어가 내 눈동자 속에 잠자고 있다
나는 검은 수화를 배우고 있다
눈 깜빡하면 무덤 하나 생겨난다
리셋되는 수화가 속눈썹에 매달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