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26-39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하게 하라.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광야에서 전도가 가능할까? 물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있는 바다/저수지/호수로 가야하고, 사람을 전도하려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가야 한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광야로 갔다. 드넓은 광야에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전도할 수 있겠는가! 전도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곳에서 한 영혼을 전도했다. 그것도 고위 관리를. 단 한번에. 도대체 어찌된 까닭일까? 전도에 능통한 자이기 때문일까? 일가견이 있기 때문일까?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성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사마리아 성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마술사 시몬을 따르는 자들은 없어졌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나았다. 사마리아 성은 큰 기쁨으로 가득 찼고,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무렵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나타나 말했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26) 그 길은 짧은 거리가 아니다. 70km나 떨어진 곳이다. 또한 그곳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광야였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마리아는 이제 막 예수의 꽃을 피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앙으로 안정되려면 양육도 해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도 키워야 한다. 이런 중대한 과제를 남겨두고 미지의 광야로 가라니…! 빌립은 이런 저런 이유로 주의 사자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청중> 우리에게도 빌립과 비슷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설교를 통해 아니라고 말씀하시거나 가던 길을 가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다. 피곤하고 지쳐서 쉬고 싶은데 기도하라고 하고, 책 한 장 볼 여유도 없는데 성경을 하루에 10장씩이나 읽으라고 하고, 바빠서 동영상 볼 시간도 없는데 성경적 재정 강의를 들으라고 하고, 오래간만에 쉬고 싶은데 목장예배며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주님은 목회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또한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져서 내가 이기고 싶고, 비판하며 분노를 내고 싶은데, “사랑해라.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견디라”(고전 13장)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고 말씀하신다. 물질/질병/관계문제가 풀리지 않아 염려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때 짜증을 내며 불평한다. “왜 나만 이렇게 해야 하는가?” 억울하고 분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 또한 의구(疑懼)심도 생긴다. ‘과연 이렇게 말씀대로 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래서 말씀을 실제로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빌립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비상식적인 광야 길을 제시하고, 사마리아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핑계를 대면서 주님의 뜻을 거절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두말하지 않고 일어나서 갔다(27).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나의 감정, 환경, 여건을 먼저 고려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뜻)이 우선이기 때문에, 말씀이 떨어지면 모든 감정, 환경, 여건을 변경 취소시켜서라도 주님의 말씀을 먼저 행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인 설계도를 제시하셨고, 재료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해 주셨고,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씩, 생물은 암수 한 쌍씩만 방주로 들어가도록 하셨고, 양식도 저축하라고 말씀하셨다(창 6:13-21, 7:2-3). 그런데 그는 “잠깐만요”, “내일 하면 안 돼요?”, “부담스러워요”,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몇 년이나 걸리죠?”라고 따지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창 6:22).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래저래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 *다윗도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정면 승부를 하라고 하시면 정면 승부를 했고, 매복을 하라고 하시면 매복을 했고, 참으라고 하시면 참고 용서했다. *모세도 쓴 물에 나무를 던지라고 하면 그 나무를 던지고, 반석을 한번 치라고 하면 한 번 치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걸어놓으라고 하시면 그대로 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대로 움직였지, 자신의 사정과 감정과 환경을 따라 변명하거나 명령을 유보시키거나 불순종하지 않았다. 저와 여러분도 여러 가지 사정/계획이 있고, 마음과 감정이 있겠지만, 주님이 아니라고 하면 즉시 내려놓은 성령의 사람,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축복한다.
빌립은 주의 사자가 시킨 대로 무작정 가봤는데, 그 타이밍에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관리]가 수레를 타고 고국 에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었다. 드넓은 광야에서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로 미리 사전 약속을 하여 만난 것인가? 아니다. 이 타이밍은 주님께서 맞추신 것이다. 빌립은 수레로 접근했다. 본인의 생각인가? 아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29)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때그때마다 지시/명령/응답하신다. 처음 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 빌립과 내시 사이엔 어떤 공통분모도 없었다.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시에게 바로 거절당할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로 볼 때, 같은 수준[레벨]이 아니다. 내시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고위관리이고, 빌립은 평범한 시민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빌립은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성령의 지시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수레 쪽으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달려갔다.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는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시는 이사야서를 크게 읽고 있었다. 빌립은 순간 소름이 끼쳤을 것 같다. ‘주님께서 이 영혼을 구하고 싶어서 나를 보내셨구나!’, ‘나를 통해 이 말씀을 풀어주길 원하시는구나!’ 그래서 내시를 향해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물었다. 에디오피아의 고위 관리가 처음 본 빌립의 질문에 어떤 반응을 내놓을까? 불쾌한 듯이 빌립의 질문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내시는 그런 질문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처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빌립을 수레로 청했다(31). 청하다(παρεκαλεσεν;파레카레센)의 원형은 “παρακαλεω;파라카레오”인데, “오도록 간절히 애원하듯이 초청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내시는 이사야 53:7-8절에 나온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누구냐? 선지자 이사야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34)고 물었다. 내시는 읽고 있는 이사야 말씀을 풀고 싶은 영적 욕심/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은 이런 거룩하고 경건한 이방인의 영적 호기심을 해결해 줄 사람으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빌립을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잘 받는 사람에겐 하나님은 이런 전도대상자를 붙여주신다. 주님의 지시/응답/지도/감동에는 무조건 뜻이 있다.
빌립은 그 양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쳤다. 성경에 대한 답답함이 빌립의 설명으로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빌립 집사는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시에게 “죄를 회개하고, 그 증표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내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예수로 가득 찬 내시는 세례를 받고 싶었던 속마음을 물 있는 곳을 보자마자 드러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6) 빌립은 그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자, 주의 영이신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갔다. “이끌어간지라”(ηρπασεν;헤르파센)의 원형은 “αρπαζω;하르파조”인데, 뜻은 “재빨리/성급하게 강제로 채어가다”이다(29). 세례 후 그들은 더 대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령은 여기에서 마무리를 지으셨다. 내시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에디오피아로 갔다. 기쁨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성령이 충만해졌다는 뜻이다. 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희락[기쁨]이기 때문이다(갈 5:22).
<청중> 빌립처럼 주의 영이신 성령의 지시/지도/응답/감동을 받아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❶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먼저 기도하면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성경/설교를 자세히 생각하고 들어보라. 말씀과 일치한다면 무조건 순종하여 행하라. 왜? 성령은 말씀과 늘 함께 하시니까. 또한 ❷말씀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의도를 기도로 말씀드려보고 마음이 평안/기쁘면 행동으로 옮겨라. 왜? 평안과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니까.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불편한가? 그렇다면 성령이 근심하는 것이니 중지하라. 그래도 여러분의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거나 잘 모르겠다면, 기도하는 심정으로 행동해 보라. 만약 행하는 과정에서 말씀과 반대로 가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생기면 즉시 그만두길 바란다. 기쁘고 평안하면 계속하라. ❸내 스스로 성령의 지시/감동을 잘 모르겠다면, 믿음이 좋은 몇 명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일명 ‘지인찬스’이다. ‘하나님, 내가 몇 사람에게 물어볼 테니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라고 기도 한 후, 물어보면, 겹치는 말들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대로 행하라. 왜? 그들은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어온 신실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시작과 과정과 끝이 누구의 작품인가? 빌립 집사의 계획인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시다. 빌립은 주의 영이신 성령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것밖에 없다. 주의 영이 주체가 되어 빌립을 사용하셨다. 순종하는 빌립은 주님의 계획에 순조롭게 쓰임 받았다. 빌립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빌립이 이렇게 성령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증거들이 많이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행 6:3,5).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여 그에 따른 증거를 많이 수집하라. 증거부자가 되라.
<청중> 열심히 하면, 주님이 한 것으로 생각한다. 착각이다. 예전에 빵, 콩나물 나눠주고, 매일 밤늦게까지 전도했다. 작은 교회에서 한해 54명이 등록을 했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두 번 왔다가 다 떠났다. 열심히 했는데 왜 결과는 참담했을까? 물론 주님이 말씀하신 전도를 하긴 했지만, 그 열정의 시작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고, 결과 또한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냈어야 했는데, 어떤 인도도 지시도 받아내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열심히 했다. 남은 것은 절망과 피곤뿐이었다. 주님의 인도와 지시와 감동을 무시한 결과다. 빌립과 매우 대조적이다. / 주님의 지도/지시/감동/응답 없이 움직이는 것은, 마치 비 오는 저녁에 선글라스를 쓰고, 짙게 선팅 된 차를 운전하되, 눈감고 시속 100km로 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다. 주님의 지도/지시/감동/응답도 없이 질주하는 것은 무모하다 못해 위험한 일이다. 다툼과 분노, 분쟁이 항상 일어난다.
주님의 지시, 인도, 감동대로 하고 싶은가? 개인, 가정, 직장, 학교, 사업, 교회, 목장, 전도, 돌봄 등 모든 생활의 전부가 주님의 지시, 인도, 감동에서 시작되길 바란다. 내 감정과 경험 및 다른 사람의 조언으로 내린 결론을 다시 하나님께 묻고 성경으로 답을 얻어내라. 주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하고 싶어도 그 욕구를 절제하라. 기도로 다시 묻고 심사숙고하며 주님의 결정을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