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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비치었도다
말씀/마태복음 4:12-25
요절/마태복음 4:16, 찬송가/514장, 264장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스라엘의 목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역을 시작하십니까?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세례요한은 그동안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며 백성들을 준비시켜왔습니다. 그는 잠자는 자들을 깨우는 시대의 나팔수요, 선지자였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의를 이룬 중요한 일꾼이었습니다. 일을 하려면 앞서서, 일을 준비해 주고 섬겨 주는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헤롯의 부정을 지적했다가 미움을 사서 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시작부터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요한을 끄집어내어셔, 그와 함께 일을 해 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나셨다’고 했습니다. 뉘앙스가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어떻게 되든지 갈릴리로 피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이 사건에 담긴 하나의 메시지를 읽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전통을 갖고 새 시대의 문을 두드려 온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잇는 연결고리였습니다. 이런 그가 잡혔을 때, 예수님은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제 역사의 전환점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옛 시대에 메이지 않고,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구속 역사 편에서 볼 때, 요한의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갈릴리로 물러나신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는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을(9:12)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4).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15,16) 스블론과 납달리 땅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스블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분배받았던 땅입니다. 이곳은 유대의 북쪽 국경지역입니다. 우리로 하면 평안북도, 함경북도와 같은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침략도 많이 당하고 이방인들과 많이 뒤섞였습니다. 이런 갈릴리를 유대인들은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면 취업도 안돼, 결혼도 거절당해, 한마디로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갈릴리는 어둠의 땅이요, 절망과 한숨의 땅이요, 눈물의 땅이었습니다. 몇 년 전, 카렌족을 방문한 한 목자님의 아들이 카렌족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한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들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연일 전쟁과 재해에 시달리며 절망과 한숨으로 사는 민족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에 태어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다들 멀쩡해 보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어둠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흑암에 앉아 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의 고통이 끊이질 않습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올해는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선거시즌입니다. 세계 76개국에서 선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2024년을 가리켜 ‘선거의 해’, ‘빅 정치의 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한국정치인들은 말합니다. “청년들이 절망하는 것은 주택문제다. 그러니 공공주택을 반값에 공급해 주겠다.”, “출산율저하 대책으로 자녀를 낳으면 얼마를 주겠다.” 하며 공약을 쏟아냅니다. 아무튼 선거도 중요합니다. 좋은 정치인을 뽑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선거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어둠과 절망의 땅에 예수님께서 와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또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곳에 사신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 큰 빛이 비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빛이 비치지 않으면 습해지고, 곰팡이가 피게 됩니다. 또 눅눅하고 냄새가 납니다. 썩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햇빛에 쫙 비치면 곰팡이가 사라집니다. 바싹 마르고 아주 뽀송뽀송해져 새것이 됩니다. 마치 이와 같이 운명의 곰팡이가 피고, 절망과 슬픔으로 찌든 갈릴리에 큰 빛 되신 예수님이 짝 비치니까 이들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절망과 어둠이 이들에게서 싹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을 통해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에게 시대의 절망을 나타내는 말로 3포 세대, 5포 세대, 하더니 이제 N포 세대까지 등장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탕핑족’이라고 합니다. 탕핑은 한자로 ‘편하게 드러눕다’는 말입니다. 좋은 말일까요? 이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예 드러누워 버리는 절대절망을 표현합니다. 돈을 벌면 뭐해? 취업하면 뭐해? 운동하면 뭐해? 다이어트 하면 뭐해? 어차피 다 마찬가지인데...다 그만 두자! 그리고 편하게 드러누워 버립니다. ‘탕핑’. 탕핑족의 세대는 그야말로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끝판이고, 절망의 끝판입니다. 누가 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시진핑이 바뀌면 될까요? 몇 사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절망의 세대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빛이 비치면 됩니다. 절망이 떠나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통해 어둠에서 나를 일으키시는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빛으로 내게 있는 어둠, 내 안에 있는 운명의 슬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고통들이 해결되고,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 빛을 어떻게 비취기 시작하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비취신 빛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세례요한이 전파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복음이요, 이 복음이야말로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일으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 말씀자체가 모든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구원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복음 자체이십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어둠이 떠나갑니다. 절망이 사라집니다. 누워있던 자가 일어나 새 삶,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복음을 각 사람에게 전파하십니다. 그 첫 번째가 갈릴리 해변에서 만난 어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셨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바다가 아니라 민물호수인데, 유대인들이 좀 뻥이 심합니다. 여기 두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신 것은 절망의 어둠에 눌려 사는 자들에게 빛이 비취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부에게 빛이 비취는 것이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고기를 잔뜩 잡는 것이 아닐까요? 잡아도 큰 고기를 잔뜩 잡아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임대해서 쓰던 배를 자기소유로 바꾸도록 해 주는 것이 이들에게 빛이 비취는 것이 아닐까요? 더구나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들에게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말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이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연관성이 있고, 어찌보면 같은 이야기를 이들의 상황에 맞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회개가 무엇이고, 복음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흔히 회개를 가리켜서 ‘삶의 방향전환’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이들은 고기를 잡아서 자기들의 삶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십니다. 이를테면, 물고기를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방향전환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물론 계속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삶의 방향과 목적은 물고기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 이들에게 임하는 천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들에게 임하는 천국, 이들에게 변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은 이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막연히 멀리 있는 환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죽어야 갈 수 있는 극락 같은 그런 나라도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의 내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가치를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나도 살고 가족도 사는 그런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식 공부시켜, 명문대라도 보내면,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게 대부분의 인생이고, 이것이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안타깝지만 사망의 땅과 그늘의 앉은 자의 삶의 연속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살다 끝나는 인생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삶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빛을 나누어 주는 삶으로 예수님이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부 인 이들에게 상당한 도전이고, 부담이고, 한번도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던 비전입니다. 그래도 이 삶은 이제껏 단지 살기 위해서 살 때와는 전혀 다른 생명을 나누고, 빛을 나누는 삶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며, 천국의 감동
과 가치와 기쁨과 빛을 나누는 삶, 이것이 바로 천국을 얻는 자의 모습이고, 천국을 얻은 자의 당연한 삶의 방향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르심은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라, 이들을 향한 구원의 초청이요, 새로운 삶의 도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들이 얻은 천국을 나누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지금 이들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천국을 주시고, 이 천국의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돕는 영혼의 어부요, 위대한 전도자요, 목자로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시간 없어요, 지금 바빠요, 다음에 오세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곧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거나, 핑계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곧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 출발은 이들이 회개하고 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나누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두셨던 약속대로, 마침내 이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 천국복음의 전파자요, 영혼의 목자요, 빛의 증거자들이 되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예수님은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어부의 삶은 단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찢어진 그물도 깁어야 하고, 구멍 난 배도 고치며 계속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고단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들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이들도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달리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함께 있던 아버지 세베대를 두고 떠나야 하는 더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습니다.
이 응답이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고, 천국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아들된 자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셨습니다. 졸업 후 취직해서 돈을 벌어, 가정 경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연히 제가 장남으로서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장남인 저를 위해 부모님은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라는 큰 짐이 제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자로서 결단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어머니와의 관계가 멀어졌고, 오랜 시간이 지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종하기 전 8년 동안, 늘 병원에 모셔다 드리며 임종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지금 세베대는 한 아들도 아니고 둘 다 가버리면 그는 참 슬플 것입니다. 셋이 그물을 깁다가 혼자 하려면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짐시 힘들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두 아들이 예수님을 따라감으로 아무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의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둘씩이나 제자를 둔 아버지로서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아들이 떠날 때, 아버지는 힘들었겠지만, 그 이상의 넘치는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5대째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손자들 중에 꼭 목회자가 나오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외할머니의 기도의 응답으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나중에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을 인정하시고, 원룸을 지을 때,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주님께 받치는 아픔이 있었지만, 노년에 목회자가 된 아들의 돌봄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픔 그 이상의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 고단한 어부로서의 삶으로 끝났을 이들의 인생에 빛이 비취며 천국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열 두 사도로 초대교회를 이룬 위대한 영혼의 어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초청을 듣고 따라가는 데에는 인간적인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상으로 채워주십니다. 부모님들에게 형제들에게 내가 인간적으로 줄 수 있는 그 이상을 주시며 도우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주의 부르심에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데, 그 방식은 계속 사람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곧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복음이 막연한 메시지가 아니라, 각 사람의 삶에 구체적인 도전과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 복음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일으키는 빛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어둠에서 일어납니다. 삶의 무게에 눌리기보다,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엮어가는 사명인으로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천국복음의 전파자요, 영혼의 어부로 살며 천국을 누립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오늘날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힘들고, 중년들은 중년들대로 힘듭니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물으면 한숨을 푹 쉰다고 합니다. 먹고는 사는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아픕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의 모습이 각 세대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세대를 향해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십니다. 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천국을 얻습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인생,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절망에 있던 자에게 빛이 비취입니다. 회개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는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천국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수리아(시리아)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이방 땅까지 퍼진 것입니다. 소문들은 들은 사람들은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이제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팡 터진 것입니다.
가장 무시 받는 땅,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 있는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이제 갈릴리를 넘어서서 온 유대와 이방인의 땅까지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비치시는 빛이 그만큼 강력하게 퍼져나간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빛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calling, teaching, preaching, healing! 네 가지는 예수님의 사역의 요약입니다. 또 이것은 복음사역의 사중주요, 하나의 천국복음이 네 가지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수 있도록 강력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시대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70-80년대 한국의 교회는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단순한 메시지로 교회마다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선교단체들도 절망한 청년들에게 말씀을 통해 비전을 심고 승리의 신앙을 심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자 될 사람은 부자 되고, 병은 병원에 가서 나으면 됩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면 상담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이 설 자리, 교회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고 더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사회 병리현상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모든 목자들의 오랜 고민이고 갈증일 것입니다. 저도 이 고민을 해결하고자, 성경을 학생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해 새 번역으로 바꾸어 보기도 하고, 또 홍콩 수양회도 학생을 보내 보기도 하고, 직접 양들과 카렌족 봉사활동에도 다녀왔습니다. 혹자는 저에게 우리의 목적이 카렌족 봉사활동이냐?고 묻습니다.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뭔가, 또 목자님들에게 뭔가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역할에 대한 어떤 무대를 만들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카렌족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가운데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이면우 박사가 주장한 송곳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끝이 뾰족해야 종이를 뚫을 수 있습니다. 즉 복음전파의 선택과 집중, 어떻게 하면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어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여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더 힘들고 더 사나운 일이라도 도전해 보고자 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이 어둠과 절망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을 때, 시몬과 안드레에게 예수님이 오셨을 때, 또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제게 오셨을 때, 여기 앉아 계신 목자님들에게 오셨을 때, 정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고 믿고 있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면 달라진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만, 동역자들도 고민하시고 답을 찾아봐 주세요.
예수님만이 이 어둠의 땅, 절망과 한숨의 N포 세대, 탕핑족이 가득한 이 시대 청년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한숨 쉬며 앉아 있는 자들, 힘들게 고기가 잡던 어부들, 찢어진 그물이나 깁던 자들을 위대한 영혼의 어부로 만든 것처럼, 이 시대의 청년들을 예수님은 바꾸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희망이요, 답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새로운 도전과 비전과 희망으로 새로운 부르심을 쫓아 일어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받은 천국, 내가 얻은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 시대의 영혼의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