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린이가 막힌 변기를 뚫다
지난 연말에 우리집은 좀 괴로웠다. 안방 화장실 변기가 또 막힌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은근히 스트레스를 준다. 다른 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집은 더욱 그렇다.
아침 나절이면 누군가 이제 하나밖에 없는 거실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얼른 나오라’고 고함을 치는 일이 발생했다. 아내는 그때마다 ‘이런 일은 남자가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 막힌 지가 언젠데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느냐’며 나에게 지청구를 한다.
그래서 새해 첫 날 저녁 가족 모두 마트에 간 길에 ‘트레펑’ 2개를 샀다. 그런데 귀가하는 차 속에서 이제 초등 4학년인 막내 선린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빠, 내가 책에서 봤는데 막힌 변기에 비닐을 덮고 물을 내린 후 꾹 누르면 뚫린데”
“응, 그러니?”
라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설마? 이제 트레펑을 샀으니 일단 이걸로 시도해 봐야지’ 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선린이는 어느 새 엄마를 졸라 큰 비닐과 테이프를 찾아들고 내 앞에 선다. 나는 속으로 ‘아이고 귀찮아. 또 쓸데없는 짓을 할 수밖에 없겠네’ 하면서, 앞장 선 선린이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선린이의 지시에 따라 막힌 변기에 큰 비닐을 덮고 밀봉하듯이 테이프로 둘레를 감았다. 선린이는 아빠 작업을 꼼꼼히 살핀 후 ‘잘 되었군’ 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변기 물을 쑥 내린다. 그랬더니 정말 선린이 말대로 비닐이 위로 불룩 올라오는 것이다. 선린이가 “아빠, 이 비닐을 이렇게 아래로 누르세요”하면서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인다. 나도 얼른 선린이 동작을 따라했다. 그러자 변기물이 한꺼번에 아래로 쑥 빠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 된다, 정말 돼” 하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는 밖에 있는 아내와 선형이까지 모두 화장실로 몰려들었다.
그 뒤로 같은 작업을 몇 번 더 반복하자 변기가 완전히 뚫렸다.
그날 선린이는 일기를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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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일요일
제목: 와∼ 내가 영웅!
오늘 나는 집에서 아주 아주 많이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 그 일은 바로바로 책벌레인 나 덕분에 변기를 뚫었다는 것이다. 그 변기가 조금 약해서 저번에도 막혀서 5만원 넘게 돈을 썼는데, 이번에는 10원도 안 쓰고 뚫었다. 뚫은 방법이, 책에서 본 것을 이용했는데, 큰 비닐을 변기에 씌워서 막힌 변기를 내리면 비닐이 위로 올라가서 그것을 누르면 된다. 그 동작을 몇 번 하면 정상적으로 변기가 뚫리게 된다. 우리 아빠는 정말 잘 했다고 하셨다. 나는 역시 우리 집의 영웅이다. 더욱더 책을 열심히 봐서 돈도 하나도 쓰지 않고 바로 해결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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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회>
키워 놓으니 도움이 되네!
<사족 하나>
작년 전반기에 변기가 막혔던 원인은, (변기가 약해서가 아니고) 선린이가 양치질하다가 실수로 칫솔을 변기에 빠뜨리고는 손으로 꺼내기가 싫어서 그냥 물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트레펑을 쏟아 붓는 등 별 짓을 다 해도 해결이 안 돼 결국 전문가(?)를 불러 선린가 일기에 쓴 것처럼 6 만원인가 7 만원인가의 거금을 들여서야 겨우 뚫었다.
(2012. 1. 6.)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키워 놓으니 도움이 되네' 이 말에 선생님 표정이 떠올라 웃었습니다. ㅎㅎ
건강하시고 복된 날들, 즐거운 날들 되십시오.^^
저도 바쁘고 힘들때는 아이들의 말을 듣지 못할때가 있었는데 가끔은 아이들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때도 많아요 어쨋든 참 다행입니다 주말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