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중 「푸른 국화」를 읽고
카렐 차페트 지음 / 정찬형 역 / 모비딕
박은희(2024.3.18.월)
국화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첫 발령 났을 때 일이다. 같은 학년 선생님이 교육감 상을 받게 되었다. 학년 선배가 내가 막내니까 축하 꽃을 사오라고 했다. 생전처음 꽃을 사게 되었다. 꽃집에 갔는데 다양한 꽃들이 있었다. 축하 꽃인 만큼 그중에 제일 크고 환한 하얀 국화를 한 다발 샀다. 꽃을 사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가니 학년 선생님들이 모두 당황해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허둥대기도 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까운 선배 언니가 ‘아이고 이 바보야’ 라고 웃으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어서 다른 선생님이 장미꽃으로 다시 사왔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전혀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고 난처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푸른 국화. 제목은 푸른 국화인데 이야기는 클라라로 시작해서 클라라로 끝난다. 푸른 국화가 클라라고 클라라가 푸른 국화인 것 같다. 흔하지 않고 귀한 존재, 보고 싶고 갖고 싶은 존재 푸른 국화와 클라라. 어떻게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을까?
루베니츠에 있는 리흐텐 베르그 왕자의 정원사인 내가 클라라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일요일에 루베니츠 거리를 하릴 없이 걷다가 마을에 수다쟁이 바보 소녀 클라라가 국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색으로 알려져 있던 푸른 국화를 나에게 안겼다. 나는 소녀에게 동전 한 닢을 꺼내 주고 어디서 났는지 물어 봤지만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푸른 국화를 뽑아 들고 주인에게 달려갔다. 주인은 클라라와 함께 찾아볼 수 있도록 마차를 대령시켰다. 하지만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1시간은 족히 흘렀을 때 싱싱한 푸른 국화 한 다발을 나에게 안겼다. 주인은 지폐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지만 돈이라고는 동전 밖에 몰랐던 클라라가 엉엉 울어서 다시 동전을 주어야 했다.
클라라에게 꽃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1시간 반가량을 달려도 푸른 국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클라라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꽃다발을 가지고 온 것을 근거로 푸른 국화가 있는 곳이 루베니츠에서 반경 2마일 안이라는 것을 추측하고 4명이 나누어서 찾아보자고 주인에게 제안한다. 나는 푸른 국화에 묻은 흙과 잎과 꽃에 있는 단서를 근거로 2마일 이내에 있는 모든 헛간과 오두막을 뒤졌다. 농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푸른 국화에 대해 물었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서 국화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클라라는 다음날 푸른 국화 다발을 가지고 왔다.
클라라를 하루 종일 감시도 해봤지만 그녀는 저녁 무렵이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가 자정이 지나서 팔 한 가득 푸른 국화를 안고 돌아왔다. 그들은 클라라가 푸른 국화를 다 꺾지 못하도록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클라라는 푸른 국화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자유롭게 꺾어 올 수 있다. 그 비밀은 철로 위 보행금지 표지판. 바보 클라라는 제정신이 아니고 글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자와 형사들과 집시들, 수많은 사람들은 끝내 푸른 국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정원사는 클라라가 가져다줄 때만 푸른 국화를 볼 수 있었다. 포기하고 떠나려고 할 때 푸른빛을 따라 가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꽃을 훔쳐서 애지중기 키울 수 있었다. 클라라와 수많은 사람들과 정원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클라라는 보행 금지 표지판이 뭔지도 모르고 꽃받침은 공단처럼 매끄럽고 발그레 했으며, 꽃술은 초롱꽃처럼 탐스러운 푸른 국화만 보였을 것 같다. 그리고 직진. 한 다발 꺾어서 클라라에게 동전을 주는 정원사에게 가져다준다. 정원사가 물어보고 좋아하는 것 같으니 자꾸 가지고 온다. 그런데 철도 관사 경비원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았을 것 같다. 정원사에게 철도를 지나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살짝 피하듯이 클라라가 꽃을 꺾어 가는 모습을 봐도 모른 척 넘어갔을 것 같다. 가만히 보니 클라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푸른 국화가 있는 곳을 말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고, 푸른 국화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해본다.
왕자는 대단한 수집가인데 영국에서 나는 모든 나무를 수입하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7천 종의 화초를 들여올 정도다. 저명인사 왕자의 영향으로 대가를 바라고 배움이 있고 신문 같은 것들도 많이 읽고, 술책에도 능하고 영향력도 막강한 형사들, 집시들, 수많은 사람들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2마일 이내의 모든 땅을 수색했지만 푸른 국화는 한 송이도 찾지 못했다. 철도 경비원들의 작은 관사 정원에는 그들이 평소에 알고 있는 식물이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른 국화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고 당연하다 생각하기 보다는 금지의 벽을 넘거나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할 때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얻을 수 있나보다. 얻기만 하고 그냥 두면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 왕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으려 하고, 충실하고 추리력 있는 정원사를 바보 천치 취급하고 소홀히 해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을 얻은 후에는 정원사처럼 신중하게 애지중지 키워야 흐뭇하고 뿌듯하지 않을까?
정원사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만 푸른 국화를 찾지 않았다. 귀하고 아름다운 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푸른 국화를 찾기 위해 담당 구역을 샅샅이 훑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푹푹 찌는 더위에 농가들을 하나하나 방문하고, 밤늦도록 다리품을 팔았다. 보통 정성이 아니다.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원사는 꽃을 사랑했을까? 클라라를 사랑했을까? 일곱 번의 도둑질로 꽃을 훔친 것으로 봐서는 꽃도 사랑했겠지만 클라라도 사랑한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클라라이고, 푸른 국화 이름을 클라라라 짓고 애지중지 키우고, 돈이라면 동전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마차를 타는 게 너무 좋아서 내리고 싶지 않았던 클라라의 마음을 이해한 것으로 볼 때 분명 사랑이다. 주인이 클라라와 같은 바보 멍청이라고 했을 때 화를 낸 이유는 정원사를 비하해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클라라를 같이 욕하는 것 같아 더 화가 나지 않았을까?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클라라를 떠나지만 그때에 비로소 의지와 상관없이 멈추고 푸른 국화를 만난다.
정원사는 집에 가져온 푸른 국화에 클라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15년 동안 어린아이 돌보듯 길렀다. 푸른 국화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흙을 깔고 제때 물을 주면서 애지중지 키웠다. 클라라는 어김없이 봄에 싹을 틔워 여름이 시작되면 활짝 꽃을 피우다가, 8월부터 조용히 지기 시작한다. 정원사는 클라라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고, 한껏 피어난 클라라가 자태를 뽐낼 때면 세상은 온통 그녀만을 얘기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정원사의 집은 루베니츠에 있을까? 기차를 타고 떠난 지역에 있을까? 잘 모르겠다. 정원사의 집에 보행 금지 표지판이 있을까 없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누군가 정원사의 집에서 푸른 국화를 훔쳐갈 때 정원사는 어떻게 할까? 그것도 궁금하다.
그런데 푸른 국화를 모두 훔쳐온 것은 아쉽다. 정원사의 집이 루베니츠가 아닌 곳에 있다면 철도 경비원 관사 정원에도 푸른 국화가 있고 정원사가 살고 있는 집에도 있으면 더 풍성하지 않을까? 귀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지고 온통 집중하기 때문일까? 너무 흔해지면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일까? 정원사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어쩌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처럼 정원사의 욕심으로 푸른 국화가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클라라처럼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필요한 만큼 가져다 나눠주면 소중하고 귀한 것을 지킬 수 있고 오래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푸른 국화는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다. 푸른 국화를 찾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고민해봐야겠다. 모든 사람들이 푸른 국화에 열광할 때 하얀 국화와 노란 국화도 봐야겠다.
첫댓글 나의 푸른국화는 뭘까? 고민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