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정신이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전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있음의 본래는 반드시 있음이다. 즉 모든 있음은 어떤 있음에서 발생한다. 이는 너무 당연한 참인 명제지만, 우리는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배제해버린다. 가령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있음’의 근저에는 ‘없음’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그런 사례를 단 하나라도 제시해야한다.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은 그저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신(GOD)은 어떤 존재를 상징할 뿐, 그 자체가 존재일 수가 없다. 비문명인에게도 신(GOD)에 대한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령 상징으로써의 토템이 그렇다. 산에 정령이 있다는 말은 곧 그 정령은 전체로서의 산을 상징한다. 특정 나무에 정령이 있다면, 정령은 나무의 살아있음을 상징한다. 상징이 그것과 연결된 실재와 분리된다면, 상징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니라 시뮬라크르가 된다.
본래의 정신은 ‘있음’에서 찾을 수가 있고, 인간에게 내재하는 정신이 그 활동과 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본래의 정신은 외재하는 ‘있음’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나-자아’는 자연의 연장extension이며, ‘나-주체’는 자연의 연속성에 있다. 그렇다면 본래의 정신은 자연에서 찾을 수가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은 총체로서의 자연이며, ‘자연의 원리’가 곧 실체Substance이다. 그 실체를 종교에서는 신(GOD)이라고 한다. 한편 어원에 따르면, ‘breath of a god’이 Spiritus이고 ‘holy spirit’은 Pneuma이며, 이들이 영어로 Spirit이다. 정령이 자연에 대한 상징이었으니, 영혼 즉 정신(상)은 자연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이 가리키는 자연은 곧 ‘원리로서의 자연’이며, 곧 실체가 된다. 이로써 우리는 정신(상)에서 권력의 속성 곧 우열을 배제할 수가 있다. 반문명적 관점에서 이를 우리는 ‘생(生)NATURE’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내재하는 정신은 ‘생NATURE’의 연속성으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원리에 따른 형식이 곧 자연의 속성인 ‘조화’이기에, ‘순수한 마음-정신’은 곧 생의 연속성에 있으며 이를 양심이라고 일컫는 조화주체로 볼 수 있다.
언급한 바, ‘마음-정신’은 반성이고, 반성의 연장이 곧 ‘사유’이다. 정신(하)로 구분된 생각은 일종의 정신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신체기관이 뇌라고 볼 때, ‘뇌의 형식’이 논리이며 사유가 곧 논리적 생각이라는 측면에서 사유도 정신으로 볼 수가 있다. 이때 논리 혹은 사유를 ‘머리-정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권력의 속성 곧 우열을 배제한 ‘본래의 정신’은 자연의 원리와 형식을 표현하는 관념어이다. 즉 정신은 실체로서의 생(生)NATURE의 원리적 측면으로 볼 수 있으며, 생의 속성으로서 형식인 ‘조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생의 양태인 인간에게 속한 정신은 곧 자연의 연속성으로 볼 수 있다. 생의 원리적 측면의 연속성에 사람의 ‘마음-정신’(반성)이 있으며, ‘마음-정신’의 연장이 사유이며 이를 ‘머리-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는 자연의 형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사람에게 있어서 뇌의 형식이 된다. 그래서 논리도 ‘머리-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원리는 곧 총체로서의 자연이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며, 생명을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이다. 이를 상징하는 관념어로는 신(神), 도(道), 진리, 정령(精靈), 영혼(靈魂) 등이 있고, 반문명에서는 이를 생(生)NATURE이라고 한다. 상징의 하나인 Spirit의 의미가 곧 삶(life)이고 생명(the animating or vital principle of man and animals)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상징은 실체와의 연결됨에서 벗어나면 시뮬라크르가 된다. 현상적으로 인간은 이미 시뮬라크르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시뮬라크르와 연결된 인간은 이미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Spiritus나 Pneuma가 시뮬라크르가 되어 실체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breath of a god’나 ‘holy spirit’을 상징하는 관념어가 되었음이 곧 시뮬라시옹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원리로서 생명이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인 본래의 정신을 표현한 우리말은 ‘얼’이다. ‘얼’은 외재한다. 그 ‘얼’이 우리 몸에 깃들어, 우리는 살아간다. 그 얼은 우리 얼굴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얼의 굴’이다. 이로써 우리에게 ‘얼굴에 생기가 돈다.’라는 문장이 어색하지 않다. 또한 ‘얼빠진’이란 단어에서 ‘빠지다’는 ‘빼다’가 아니라 ‘(차)오르다’의 반대말로 존재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상태의 가감(加減)을 나타낸다. 반문명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얼’을 ‘생(生)NATURE’이라고 한다.
정신을 표현한 우리말에는 ‘넋’도 있다. 넋의 파생어인 넋두리는 죽은 자의 말을 대신 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때 넋은 살아 있을 때에 해소하지 못한 미련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넋 놓다’ 혹은 ‘넋 잃다’라는 말은 정신을 잃고 멍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넋’은 사람에게 내재하여, 인생 즉 삶을 지탱하는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얼은 생명의 근원이고 넋은 삶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얼핏 같은 듯 다르게 보인다. 단순히 보자면, 생명과 삶의 근원이 다를 수가 없다. 즉 얼과 넋은 연속성(continuity,연결) 관계이다. ‘얼’의 양태가 곧 자연이니, 자연의 연장인 ‘나-자아’는 곧 ‘넋’이 양태가 된다. ‘얼’이 곧 ‘생(生)NATURE’이니, ‘넋’을 생의 연속으로 ‘나-주체’로 볼 수 있다. 즉 ‘넋’은 주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