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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교서(敎書)
태조의 공적을 치하하는 교서
4월,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아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才)를 기다리게 되며, 만세(萬世)의 공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한이 없는 보수(報酬)를 받게 마련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는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대실(大室)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거의 5백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현릉(玄陵)에게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인도하여 상상(上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임금에게 원망을 돌아가게 하여 마침내 갑인년의 변고를 초래하여 사자(嗣子)가 없게 하였다. 인임(仁任)은 이에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도적질한 계책을 써서, 현릉조(玄陵朝)의 요망스런 중[僧]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로써 거짓으로 현릉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고 일컫고 이를 왕으로 세우니, 현릉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고 했으며,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의 종친(宗親)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인임이 따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했으며,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에 차 있어 햇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禑)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현릉을 장사할 적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으며, 증제(烝祭)를 주관할 적엔 올빼미가 대실(大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했으며, 그가 현릉의 아버지인 의릉(毅陵)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적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과 번개하며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작(爵)을 물려받을 적엔 바람이 조묘(祧廟)와 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대실(大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廩)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禑)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를 죽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없애었는데 사평(司平)의 새 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죽은 후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장사하여 우(禑)의 어미라 하였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룻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萬歲)에 우(禑)가 반야(般若)의 아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우(禑)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세상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마는,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하여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현릉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가 우(禑)는 왕씨(王氏)가 아님을 황제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선뜩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禑)의 아내는 인임(仁任)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으니, 이에 왕씨(王氏)의 흥복(興復)될 희망은 끊어졌다.
인임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었는데, 우(禑)가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징발하여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卿)과 부관(副官) 조민수(曺敏修)가 행군(行軍)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卿)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매여 있다는 계책으로써 깨우쳐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우리 백성들의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살게 한 것이오.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다만 경에게 힘입었소.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에 높았으며, 공명(功名)은 세상에서 뛰어났으나 자랑하지 않았소. 《강목(綱目)》과 《연의(衍義)》를 읽기를 좋아하여 유후(留侯)ㆍ 강후(絳侯)ㆍ 무후(武侯)ㆍ 양공(梁公)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으로, 군사를 돌이켰던 그 즈음에 흥복(興復)을 의논하니, 민수(敏修)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소.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 친척 인임(仁任)과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경(卿)의 의논은 저지시키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총재(冢宰)가 되었으니,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일이 한 번의 큰 기회를 잃게 되었소. 경은 속으로 견디고 참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공의(公義)로써 민수(敏修)를 개유(開諭)하고, 이에 대간(臺諫)의 인선(人選)을 철저히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켰소. 이에 헌사(憲司)에서 민수를 탐욕이 많아 법을 남용(濫用)했다고 탄핵하여 쳐서 제거하였소.
경은 밤에 생각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마름과 같이 하며,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조그만 이익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조그만 해로움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며, 언로(言路)를 열어 민정(民情)을 통하게 하고, 일민(逸民)을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소.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奔競)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휘권[鉞]을 주고,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출척(黜陟)을 행하매, 번진(藩鎭)이 감히 구적(寇賊)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감히 백성을 해하지 못하며, 여러 소인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사전(私田)을 여러 도(道)에서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하여, 넉넉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지경으로 올려 놓았소.
규전(圭田)ㆍ 채전(采田)의 법을 채용하여 서울에 벼슬하는 사람에게 전지(田地)를 공급함으로써 군자(君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하게 하니, 관작을 주되 사정(私情)이 아니고, 형벌을 쓰되 노(怒)한 것이 아니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명백하여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함께 보는 바이니, 그 경영해 하는 일이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터전이 아닌 것이 없었소.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으로 보낸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고려의 왕위는 자손이 끊어져서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로 꾸몄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위(官位)에 있어 군신(君臣)의 본분(本分)을 지킨다면, 비록 수십 대(代)나 조회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엇이 걱정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싫겠는가? 동자(童子)는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현릉(玄陵)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제사(祭祀)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王氏)의 신자(臣子)에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소.
창(昌)의 외조부(外祖父)인 이임(李琳)이 총재(冢宰)로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여, 흉악한 꾀가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신씨(辛氏)의 변고는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발생하게 되었소. 왕씨(王氏)는 이미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만번 죽을 고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소 대의(大義)를 잡아 지켜, 우리 왕씨(王氏)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하니, 덕부(德符)ㆍ몽주(夢周)ㆍ용기(湧奇)ㆍ장수(長壽)ㆍ석린(石璘)ㆍ조준(趙浚)ㆍ박위(朴葳)ㆍ도전(道傳) 8명의 장수가 서로 따라 도와서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의 정비(定妃)의 뜰에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후사(後嗣)로 삼아, 한 사람도 처형(處刑)하지 않고 새벽에서 조반(朝飯) 때가 되기 전에 16년 동안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제거하였소.
그 인친(姻親)과 지당(支黨)들이 온 나라에 뿌리가 서려 얽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떨어져 면모(面貌)를 고치고 향순(向順)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며, 햇빛은 봄과 같았소. 위로는 31대(代)를 서로 계승하던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千萬億) 대(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열어 놓았으니, 경의 흥복(興復)한 공은 강후(絳後)와 오왕(五王)에게 비길 바가 아니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요,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홀로 도타이 낳았[篤生]으니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바이오.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을 수복하고, 요망스런 중[僧]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하게 하고, 나씨(納氏)을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패퇴시켜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을 겁내게 했는데, 경은 현릉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에 통하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祖宗)에 통하였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대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애(仁愛)하고 지극히 은혜로움은 만백성의 환심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은 이에 현릉의 지우(知遇)를 진실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에 훈공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얼굴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에게 무궁한 세대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오.
아아! 경이 우리의 억조 백성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하게 한 공로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는가? 경이 중흥(中興)의 원신(元臣)이 되어 명망은 배태사(裵太師)와 같으나,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보다 무겁도다! 경륜(經綸)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의 법칙으로 삼고, 준수한 인재를 좌우로 구하여 우리 조정을 무겁게 함으로써, 나의 덕이 적은 사람을 보필하였소.
우리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하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이 만년 동안에 조상의 제사와 함께 제향(祭享)하게 된다면, 나의 덕이 적은 사람도 함께 빛이 있겠소!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忠良)을 법받아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고서, 나의 후사왕(後嗣王)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경사를 누린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포장(褒奬)하고 전지(田地) 1백 결(結)을 내려 주었다.
조선 태조의 즉위 교서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ㆍ기로(耆老)ㆍ군민(軍民)들에게 교지를 내리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군도(君道)가 득실(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人心)이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天命)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을미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말을 합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기를,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國運)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장수(將帥)의 힘에 힘입어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으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나, 곧 혼미(昏迷)하고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반(離叛)하여 능히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폐하는 바이므로 누가 능히 이를 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직(社稷)은 반드시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고, 왕위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는데, 공로와 덕망으로써 중외(中外)가 진심으로 붙좇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이에 건국(建國)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후면(後面)에 열거(列擧)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1.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王瑀)에게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妻子)와 동복(僮僕)들은 그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고,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 힘써 구휼(救恤)하여 안정된 처소를 잃지 말게 할 것이다.
1.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중앙에는 성균 정록소(成均正錄所)와 지방에는 각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덕행을 닦은 사람을 뽑아, 연령ㆍ본관(本貫), 삼대(三代)와 경서(徑書)에 통하는 바를 잘 갖추어 기록하여 성균관장이소(成均館長貳所)에 올려, 경에서 통하는 바를 시강(試講)하되 사서(四書)로부터 오경(五經)과 《통감(通鑑)》 이상을 통달한 사람을,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알아낸 사리(事理)의 정밀하고 소략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하고, 입격(入格)한 사람은 예조(禮曹)로 보내면, 예조에서 표문(表文)ㆍ장주(章奏)ㆍ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하고, 책문(策問)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할 것이며,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상고하여 이조(吏曹)로 보내면, 이조에서 재주를 헤아려 탁용(擢用)하게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할 것이다.
그 강무(講武)하는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鍊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입격(入格)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탁용(擢用)에 대비하게 할 것이다.
1. 관혼 상제(冠婚喪祭)는 나라의 큰 법이니, 예조에 부탁하여 경전(經典)을 세밀히 구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일정한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것이다.
1.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가까운 직책이니 중시(重視)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대간(臺諫)ㆍ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얻어 이 임무를 맡겨서 만 30개월이 되어,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나타난 사람은 발탁 등용시키고, 천거된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면 천거한 사람[擧主]에게 죄가 미치게 할 것이다.
1. 충신(忠臣)ㆍ효자(孝子)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勸奬)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순방(詢訪)하여 위에 아뢰게 하여 우대해서 발탁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 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賑恤)하고 그 부역(賦役)을 면제해 줄 것이다.
1. 외방(外方)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함이 기인(其人)과 막사(幕士)와 같이 하여, 선군(選軍)을 설치함으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매 폐단이 생겨서 노역을 노예(奴隷)와 같이 하니, 원망이 실로 많다. 지금부터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의성창(義成倉)ㆍ덕천창(德泉倉) 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의 회계(會計) 출납(出納)하는 수효에 의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監察)은 풍저창(豐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例)에 의거하여 할 것이다.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지금부터는 차견(差遣)하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官)에서〉 급료(給料)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공급(供給)을 정지하게 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주객(主客)을 모두 논죄(論罪)하게 할 것이다.
1. 배를 탄 군사[騎船軍]는 위험한 곳에 몸을 맡기고 힘을 다하여 적을 방어하니,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해야 될 처지이다. 그 소재 관사(所在官司)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게 하고 조호(助戶)를 더 정하여 윤번으로 배를 갈아타게 하고, 그 생선과 소금에서 나는 이익은 그들이 스스로 취(取)하도록 허용하고 관부(官府)에서 전매(專賣)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의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그 각도에서 구은 소금은 안렴사(按廉使)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1.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음죽(陰竹)의 둔전(屯田)을 제외하고는 일체 모두 폐지할 것이다.
1. 고려의 말기에는 형률(刑律)이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ㆍ순군부(巡軍府)ㆍ 가구소(街衢所)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형조는 형법(刑法)ㆍ청송(聽訟)ㆍ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ㆍ포도(捕盜)ㆍ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며, 그 형조에서 판결한 것은 비록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을 취(取)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선왕(先王)의 법을 만든 뜻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형(刑)을 판결하는 관원은 무릇 공사(公私)의 범죄를, 반드시 《대명률(大明律)》의 선칙(宣勅)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게 하고, 자산(資産)을 관청에 몰수하는 것에 해당되어야만 가산(家産)을 몰수하게 할 것이며, 그 부과(附過)해서 환직(還職)하는 것과 수속(收贖)해서 해임(解任)하는 것 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폐지할 것이다.
1. 전법(田法)은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에 의거할 것이며, 만약 증감(增減)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할 것이다.
1. 경상도(慶尙道)의 배에 싣는 공물(貢物)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감면할 것이다.
1. 유사(有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현보(禹玄寶)ㆍ이색(李穡)ㆍ설장수(偰長壽) 등 56인이 고려의 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해서 맨처음 화단(禍端)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 나는 오히려 이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니, 그 우현보ㆍ이색ㆍ설장수 등은 그 직첩(職帖)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禹洪壽)ㆍ강회백(姜淮伯)ㆍ이숭인(李崇仁)ㆍ조호(趙瑚)ㆍ김진양(金震陽)ㆍ이확(李擴)ㆍ이종학(李種學)ㆍ우홍득(禹洪得)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崔乙義)ㆍ박흥택(朴興澤)ㆍ김이(金履)ㆍ이내(李來)ㆍ김묘(金畝)ㆍ이종선(李種善)ㆍ우홍강(禹洪康)ㆍ서견(徐甄)ㆍ우홍명(禹洪命)ㆍ김첨(金瞻)ㆍ허응(許膺)ㆍ유향(柳珦)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ㆍ안노생(安魯生)ㆍ권홍(權弘)ㆍ최함(崔咸)ㆍ이감(李敢)ㆍ최관(崔關)ㆍ이사영(李士潁)ㆍ유기(柳沂)ㆍ이첨(李詹)ㆍ우홍부(禹洪富)ㆍ강여(康餘)ㆍ김윤수(金允壽)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장(杖)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金南得)ㆍ강시(姜蓍)ㆍ이을진(李乙珍)ㆍ유정현(柳廷顯)ㆍ정우(鄭寓)ㆍ정과(鄭過)ㆍ정도(鄭蹈)ㆍ강인보(姜仁甫)ㆍ안준(安俊)ㆍ이당(李堂)ㆍ이실(李室)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ㆍ이윤굉(李允紘)ㆍ유혜손(柳惠孫)ㆍ안원(安瑗)ㆍ강회중(姜淮中)ㆍ신윤필(申允弼)ㆍ성석용(成石瑢)ㆍ전오륜(全五倫)ㆍ정희(鄭熙) 등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홍무(洪武) 25년(1392) 7월 28일 이른 새벽 이전으로부터 이미 발각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어찌 극형(極刑)에 이르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
하였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 한산군(韓山君)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
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
여러 도의 안렴사에게 관원의 상벌을 정확히 하여 정사를 보필토록 명하는 교서
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9월11일 (기축)
여러 도(道)에 안렴사(按廉使)를 나누어 보냈다.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이문화(李文和)와 우도(右道)의 삼사 좌승(三司左丞) 이고(李皐)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신민(臣民)들의 추대로 인하여 마지못해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있다. 무릇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푸는 것은 오히려 중앙과 지방의 담당 관원에게 힘입고 있다. 더군다나 경기(京畿)는 왕실에 매우 가까우니, 덕택을 선포하는 데는 마땅히 사방(四方)보다 먼저해야 되겠도다. 이에 그대들을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니, 나의 정치에 부합(符合)하게 하라. 내가 생각하건대, 상(賞)과 벌(罰)은 공이 있는 사람을 권장하고 죄가 있는 사람을 징계하는 것이다.
무릇 대소(大小)의 군관(軍官)과 민관(民官)으로서 군사를 독려하여 승리를 거두거나, 〈나라의〉 이익을 일으키고 폐해를 제거하거나, 군사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사람은 마땅히 권장해야 될 것이니, 장계(狀啓)에 갖추어 보고해야 할 것이며, 혹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군사를 지체시키거나 탐욕하고 부정한 짓을 하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거나, 군율을 어기고 법도를 어긴 사람은 마땅히 징계해야 될 것이니, 양부(兩府) 이상의 관원은 감금(監禁)하고서 보고하고, 가선(嘉善) 이하의 관원은 마땅히 즉시 처결(處決)해야 할 것이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사조(事條)가 있으면 적당한 데 따라 거행(擧行)하여 나의 새로운 정치를 보필하게 하라.”
양광도(楊廣道)로 가는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과 경상도로 가는 사헌 중승(司憲中丞) 심효생(沈孝生)과 전라도로 가는 호조 전서(戶曹典書) 김희선(金希善)과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가는 대장군 직문하(直門下) 정탁(鄭擢)과 서해도(西海道)로 가는 사농 경(司農卿) 정당(鄭當) 등에게 교서를 내렸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마지못하여 여정(輿情)에 따라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못에 떨어진 것 같이 하고 있다.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번갈아 정돈하여 나의 정치를 보필하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에 오히려 힘입어 태평에 이르기를 기약할 뿐이다. 대체로 장수는 군사를 통하므로 만 사람의 생명이 그에게 달려 있으며, 수령은 백성들에게 가까우므로 한 고을의 기쁨과 근심이 그에게 매여 있는데, 진실로 상주고 벌줌을 명백히 하여 권장과 징벌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기강을 세워서 성과를 책임지겠는가.
무릇 대소(大小)의 군관(軍官)과 민관(民官)으로서 만약 기계(奇計)를 내어 승리를 거두거나, 강한 적군을 힘을 다해 막거나, 정사를 공평하게 하고 송사(訟事)를 잘 다스리거나,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한 사람은 모두 이름을 써서 보고하라. 내가 장차 벼슬의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하여 쓸 것이다. 만약 군사의 행군에 군율(軍律)을 어기거나 풍문(風聞)만 듣고 도망하여 달아나거나, 탐장(貪贓)하여 직무에 게을리 하거나 관직에 있으면서 조심하지 않은 사람은, 양부(兩府) 이상의 관원은 감금(監禁)하여 신청(申請)하고, 가선(嘉善) 이하의 관원은 마땅히 즉시 처결(處決)하여, 내가 공(功)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주고 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준다는 뜻을 밝힐 것이다.
만약 그 백성들에게 편리한 사의(事宜)가 있으면 스스로 성문법(成文法)이 있으니 힘써 이를 시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