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경주박물관은 2021년 특별공개 전시로 '전傳 황복사 터 출토 신자료'를 개최합니다.
황복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625-702)이 출가한 사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과 탑을 돌면서 계단이 아닌 허공을 밟고 올랐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런데 황복사터를 황복사라 단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적 주변에서 황복사皇福寺라고 씌어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사찰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파악하기 어려워 명칭 앞에 전傳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유적에서는 기단석으로 사용되던 십이지신상이 확인되어 1920년대 후반부터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42년에는 절터 내 삼층석탑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후 몇 차례의 부분적인 조사가 더 진행되었고, 이러한 관심이 이어져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은 201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차에 걸친 정밀 발굴조사로 다수의 금동불입상을 포함한 불교조각, 명문자료, 공예품 등 2,700여 점의 유통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건물터, 담장, 배수로, 회랑, 연못, 도로 등의 유구도 확인되어 높은 신라 왕실사찰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많은 출토품 중 32점을 선발하여 특별 공개합니다. 여전히 많은 궁금증이 남아있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새로운 자료들이 황복사의 역사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실마리가 되기도 기대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보고
신라천년보고는 경상도 지역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전용 보관시설입니다. 내부에는 관람이 가능한 전시 수장고와 일반 전시실, 소장품 등록실, 열람실이 있으며, 9개의 수장고와 문화재 소독실, 촬영실, 아카이브 자료 보관실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국립대구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소장 발굴품들도 이곳에서 보관되고 있습니다.
전傳 황복사 터 출토 불교조각
금동불입상은 10m 내외의 소형으로 모두 7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소형 불상은 가지고 다니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배하기에 안성맞춤으로 개인적인 예배 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동이 쉬워 부처의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할 때나 불상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발견된 금동불입상은 크게 U자형과 Y자형, 두 가지 유형의 옷주름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상이 오른손을 들어 두려움을 없애주고(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을 내려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손 갖춤(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습니다.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상은 장식이 달린 목걸이와 함께 왼손에 깨끗한 물을 담는 병(정병淨甁)을 쥐고 있습니다.
돌에 새겨진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있는 무장武將의 모습입니다. '악귀'라고 불리는 '생령生靈'을 깔고 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장상의 옷자락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전傳 황복사터 출토 명문자료
글자를 새기거나 적은 유물은 절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전傳 황복사 터에서는 '봉奉. 교敎'와 '신神. 궁窮. 진眞'이 새겨진 비석 조각이 수습되었습니다.
현재 절터에는 2기의 귀부가 남아있고, 비각 터로 추정되는 곳도 확인됨에 따라 이 비석 조각들과의 연관성 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전佛前' 그릇 조각에는 가로·세로로 칸을 내어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앞을 가리키는 '前'자와 무언가를 담는 용도라는 점을 볼 때, 불상 앞에 두거나 불단에서 사용하는 불교 의식용 그릇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간木簡은 나무를 깎아서 그 위에 글을 쓴 것을 말합니다.
연못 터에서 출토된 목간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적외선 촬영 결과 ‘上早(軍)寺迎詔(談)沙弥卄一年’이라는 10글자의 묵서가 판독되었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목간 끝부분에 구멍이 있어 승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증 또는 물품의 꼬리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외 '정(선)원사鄭(禪)元寺' '인백사仁佰寺' 등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습니다.
전傳 황복사 터 출토 공예품
공예품은 기능과 장식의 양면을 조화시켜 일상생활에서 실용적 이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게 만든 물품을 말합니다.
특히 절터에서 발견 되는 공예품들은 불교의식과 신앙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당시 공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전 황복사 터에서도 다양한 장식품과 생활용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사찰 건축물 내·외부를 아름답게 장엄 하고, 거처하는 스님들이 사용한 생활용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원모양 금동장식들은 안쪽에 큰 축이 있어 나무로 된 건축물이나 가구 등에 고정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꽃모양 금동장식은 작고 둥근 난간 위에 부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동으로 만든 장식은 뒷면 위아래에 각각 촉이 달려 있는데, 이와 흡사한 형태의 유물이 황룡사 터에서도 출토되어 주목됩니다. 이외에도 발이 세 개 달린 청동 솥, 청동그릇, 청자병, 녹유벼루 등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이 건물 등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선이 노니는 복 받은 땀, 낭산狼山을
413년(실성왕 12) 가을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마땅히 이곳은 복 받은 말이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실성이사금」조
우리는 살면서 행복바라고, 죽은 사람을 위해 명복을 빌며, 새해 덕담으로 ‘복’을 빌어 인사를 나눕니다. ‘복’은 그만큼 우리 삶과 가깝게 맞닿아 있습니다.
‘복’을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옛사람이 바랐던 ‘복’은 '황복사'라는 절 이름에서 잘 나타나며, 절터 내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라갖춤에서도 확인됩니다.
1942년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 발견된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승하한 신문왕(재위 681- 692)을 위해 왕비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692년에 석탑을 세웠고, 이후 700년에 신목태후가 돌아가시고 702년에는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재위 702-737)이 706년에 사리갖춤을 석탑에 넣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낭산에는 전황복사터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의 대표적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 터가 남아있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석조 관음보살입상과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낭산 서쪽 기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릉과 능지탑 터도 전합니다.
낭산은 신라 왕실과 관련된 성스러운 장소였습니다.
낭산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관람하고, 가을 정취를 벗 삼아 신선이 노니는 복 받은 땅, 낭산에 자리한 전傳 황복사 터를 찾아 보시시를 바랍니다.
전傳 황복사 터를 발굴하다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은 「경주 낭산일원(사적 제163호)」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016년 6월부터 2021년 4월까지 5차에 걸쳐 전 황복사 터를 발굴 조사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건물터, 담장, 배수로, 화랑 연못, 도로 등의 유구와 불교조각, 명문자료, 공예품 등 2,7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출토 유구의 유물에 대한 정리가 현재 진행 중이고,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요 성과를 소개하자면 우선 조사 지역의 북쪽 경계에서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진 도로가 발견되었습니다.
신라 왕경 내에서는 월성을 중심으로 너비 23m의 남북대로, 너비 155m의 동서대로가 확인되었습니다. 이 도로는 너비 16-17m로 활동사 터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이한 형태의 건물터도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면석을 기단적으로 사용했으며, 한쪽 면에 놀로 큰 단을 만든 후 전면 중앙에 돌계단을 설치하고 내부에 회랑을 두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 경주 지역에서는 다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입니다. 절터 내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왕실의 종묘에 대한 추복追福적 기능과 왕실사원의 역할을 한 건물로 추정됩니다.
글 : 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