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지 / 황선영
마지막 학년 개강을 앞둔 2월 어느 날. 몇몇이 송해성 차를 타고 임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동기 정상도 집에 갔다. 종일 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전주로 출발했다. 도착지까지 30분 정도 남았을 때쯤, 한지현이 깜짝 놀란다. 열쇠 꾸러미를 놓고 왔단다. 집 열쇠뿐 아니라 온갖 열쇠가 다 있어 꼭 필요하단다. 내 생각엔 오늘은 열쇠공 불러 들어가고 다음에 찾으면 좋겠더만. 가난한 자취생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 송해성은 망설이지 않고 차를 돌린다. 아, 눈이 온다. 임실로 들어갈수록 더 많이, 더 커다란 송이로. 다시 정상도에게 열쇠를 받아 나설 때는 발목 넘게 쌓였다. 자고 가라고 하지만 모두 다음 날 일이 있다. 또, 송해성이 운전병 출신으로 실력이 믿을 만했다. 그새 밤이다. 눈이 빛을 내지만,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깊은 시골이다. 나서고 10분쯤 되었을까. 우회전하는데 "어, 어, 어" 차가 미끄러져 길 아래 논으로 굴렀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괜찮아? 괜찮아?" 어찌어찌 문을 열고 기어 나왔다. 다행히 저속이었고, 푹신한 눈밭에 떨어져 괜찮은 것 같다. 미끄러질 때는 몇 바퀴를 구른 것 같았는데, 보니 반 바퀴 굴렀다. 일단 다섯 명 모두 멀쩡하다. 아니, 너무 놀라서 아픈지 어떤지 감각이 없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송해성이 말한다. 몸에 이상 없으면 눈도 많이 오고, 시간도 늦었으니 정상도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사고처리 하잔다. 찬성이다.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다시 되돌아간다. 열쇠 주인공 한지현이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해한다. 작은아버지 새 차인데 어떻게 하냐고. 어머, 본인 차가 아니라니? 작은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데 학교 편하게 다니라고 내주셨단다. 덩달아 우리도 죄인처럼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나 송해성은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누구 잘못도 아니라고. 사고 대비해서 다 보험 드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다. 부러 농담하며 분위기를 웃게 만든다. 철딱서니 없는 우리는 곧이듣고 이 상황을 안주 삼아 놀았다.
아침에 가보니 차 꼴이 말이 아니다. 저 속에서 멀쩡히 나왔다는 게 감탄이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는 하나님께 감사가 절로 나왔다. 송해성이 차주인 작은아버지에게 전화한다. 우리 앞에서 당당하고 차분하게. "작은아빠, 여차여차해서 여차저차 했어요. 죄송해요. 보험회사 전화할게요." 수화기 너머 사람도 별 요동이 없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일 처리 됐으니 병원부터 가자고 한다.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반했다.
이전에 송해성이 호감의 표시를 두어 번 하였으나,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크지 않은 키에, 몸무게는 나보다 적게 나갈 것 같은 깡마른 몸. 거기에 옷차림새는 쌍8년도 보다 더 앞으로 간다. 나이도 나보다 여섯 살이 많다. 지금이야 같이 나이먹는 처지지만 그 당시 오빠는 어림없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며칠 지나, 내가 먼저 이메일을 보냈다. '아저씨, 괜찮아요?' 편지에 답장도 없이, 전화도 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치열한 사랑. 하하. 징하게 싸우기도 싸웠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 내일을 위해 집안을 단정히 한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다. 모든 등을 끈다. 사랑의 종착지는 평온인가? 이 때가 참 좋다. 잠든 그이 옆에 가 눕는다.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팔베개해 주며 나를 자기 쪽으로 당긴다. 세상에 이 사람과 나만 있다. "자기야, 나 사랑해?" 답이 왔다. "제발, 자."
첫댓글 저도 길 옆 도랑으로 미끄러져 차를 옆으로 눈 위에 사뿐히 눕힌 적이 있어요. 꺼내 놓고 보니 엉망이더군요.
반전이 재미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눈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읽었어요.하하
하하하
멋진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정말 멋진 사람이었군요. 송해성 씨.
그때는요. 하하
우리는 모르는 송해성, 정상도가 자연스럽게 등장해서 다 아는 연예인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반전이네요. 결국 남편이 됐다는 사실.
네, 남편이 트롯트를 좋아해서, 가수 이름만 가져왔어요. 하하
소설같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단편 한 편을 읽었네요. 표현이 너무 재밌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조잡한데 바로잡을 능력이 없어요.
저도 소설인 줄 알았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하.
그래요? 소설 쓸 생각이 전혀 아니었는데, 어디가 문제인지.
하하하! 우리집과 비슷하네요. 무주에서 광주를 13시간 운전하고 왔습니다. 그 댓가(?)로 한지붕에서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