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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수필이란 무엇인가-성기조
저- 성기조
출- 학문사(1994. 6.30. 292)
독정-2019. 10. 12.토
· 전기 형식 수필에서는 특수한 경우(문학세계 문학과 인간론)를 제외하고는 현존 인물일 경우에는 실명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고 현존 인물이 아닌 경우에는 실명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예술성과 철학성의 관계를 장미같은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인생에게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사상성을 지녀야 하는 글로 비유한다. 아름다움과 사상성이 언어로 융합하여 하나로 나타내어야 한다. 꽃이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면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뿌리를 내릴 땅이 필요하다. 비옥한 땅은 수필의 사상성 또는 철학성을 뜻한다. 거름이 풍부한 땅은 꽃을 위해 존재하고, 꽃은 비옥한 땅으로 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산한다. 새로운 의미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수필을 쓴 지은이의 인생관이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성과 함께 예술성을 지닌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없다.
우리는 보람 있는 생을 원한다. 누구나 보람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보람 있는 일생을 마치고 싶어 한다. 우리 인생ㅊ의 희열과 행복을 주는 것은 진실로 보람이다. 생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한다. 인간의 생에 빛과 기쁨을 주는 것은 곧 보람이다. 보람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쁨도 크다.
행복에의 의지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지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인생의 사실이다. 행복한 생을 원하거든 먼저 생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보람 있는 생을 살 때 꽃의 향기가 찍히듯이 행복이 저절로 따른다.
나는 행복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말을 연상한다.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행복은 인생의 알파요 오매ㅔ가디 서양 신화에서는 행복의 여신은 짓궂은 신이다. 좇아가면 도망한다. 냉정한 태도로 멀리하면 유혹하려고 든다. 단념하면 배후에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 너무 행복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 행복에 개의하지 않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 애쓰고 또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일하노라면 뜻밖에도 행복의 여신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찾아올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의 객관적 요소라고 한다면 행복감은 행복의 주관적 요소다. 행복은 이 두 가지 요소의 종합에 있다.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 ”고 링ᄏᅠᆫ이 말했다.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마음의 어떠한 문제일까? 양치는 목자가 들에서 기도하는 그림은 우리에게 경건을 가르쳐 준다.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서 밀레의 그림을 직접 눈 앞에 보았을 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가슴 속에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인생의 시와 진실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나는 밀레의 그림의 태마가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일생동안 일하는 농부들을 그의 화제로 삼았다. 동리 사람들이 푼푼이 모아 준 노자로 파리에 가서 그림공부를 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밀레는 위대한 화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밀레의 소박하고 정직한 그림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와 진실의 세계를 가르쳐 준다. 반 다이크는 밀레의 <만종>을 “사랑과 노동과 신앙을 그린 ㄹ인생의 성ㄹ화”라 했다. 마는 만종에서 행복의 메타포(은유)를 발견한다. 나를 사랑해 주는 자가 필요한 동시에 내가 사랑할 생명이 필요하다. 사랑은 행복의 열쇠다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을 받는 보람을 가질 때 우리는 지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싶고 축복하고 싶어진다. 나의 분을 알고 나의 분을 지켜서 인생에 지나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슬기롭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사랑과 노동, 신앙, 인생의 참된 행복은 그런데 있다. 예술성과 심미성을 지닌 문이란 점에서 특성을 갖는다.
정도전은 문학을 도를 싣는 그릇이라 하였는데 이런 그의 문학이론은 사대부계층의 지배적인 문학관이라 할 수 있다. 문이란 효용적인 관점, 성인이 밝힌 우주의 원리를 인사에 적용하는데 쓰인다는 그런 관점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인격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타인의 인격은 말할 것도 ㅇ벗고 자신의 인격까지도 소홀히 대접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인격을 인격으로서 존중하는 마음가짐에는 두 가지 뿌리가 있다. 그 뿌리의 하나는 사리를 따라서 공정하고 냉철하게 사우하는 ㅈ비성의 작용이요. 그 또 하나는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대하는 따뜻한 감정이다. 이 두 가지 분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뻗어가는 성질이 상한 심리인 까닭에 이 두 가지 심성을 모두 갖추는 일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삶에서 값진 일은 대개 어려운 일이다.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감정을 아울러 발휘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노력을 통하야 접근할 수 있는 목표이며. 그 목표로의 접근과정에서 우리의 자아는 착실하게 실현된다.
<쾌락적 기능>
보통 재미-라고 하면 첫째로 이야기 줄거리가 아기자기하고 굴곡과 변화가 맣아서 흥미진진한 그런 재미를 말한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 올리브 트위스트
스릴 재미-이야기 줄거리에 모험과 드릴.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재미도 있는데 주로 탐정소설 같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르블랑의 탐정소설. 영국 코난 도일의 소설류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 소설의 내용이 몸시 감동적이어서 소설 주인공이 행하는 일이나 당하는 일이 흡사 독자 자신이 당하는 일같이 생각되어 일을 때 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안나 카레니라. 등
문학작품애서 재미를 문제 삼는 것이 문학의 쾌락적 기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 하더라고 극히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 라고 모방의 쾌감을 말한 이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반복되어 온 주장이다. 문학에서의 쾌락은 독자를 대중 흥미나 저급 오락에 이끄는 것이 아니라 폭 넚고 깊은 정신적 기쁨으로 이끄는 복합적 고차적인 것이며 영속적인 쾌락이다. 쾌락적 기능은 독자를 카타르시스 시키고 감동 시키는데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다.
또그닥 또그닥 또각또각 한창 석양 노을이 내려 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도로위에서 이 두 음양이 속 모르는 싸움을 자못 그 순정에 달아혀 있었다.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휭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 빠져 들어갔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부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이 서글프다.
<스승과 제자의 총겨누기>
유럽 스승과 제자가 서로 같은 전선에서 적군과 아군으로 만났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요란한 총성,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 단말마의 비명소리, 이 속에서 서로 만난 그들의 머릿속엔 순간적으로 그들의 학교, 교실, 그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교정의 벤치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서로가 총을 겨누게 될 적군과 아군이라는 것을 알았다.
“쏴라!”
스승의 말했다.
“먼저 쏘십시오.”
제자가 말했다. 둘 다 쏘지 못했다.
“같이 쏘자.”
“같이 쏩시다.”
“하나, 둘, 셋.”
요란한 총 소리, 그러나 쓰러진 것은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스승이 쓰러졌다. 제자는 쓰러진 스승에게로 달려갔다. 제자의 팔에 안긴 스승은 그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스승의 이름을 울부짖는 제자의 목소리만 골짜기를 울렸다. 전쟁리란? 이데올로기란? 우리 민족은 누구를 위해 이 비참한 전쟁을 감수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훗날 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한 가지 알아내게 되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 학교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님, 과연 그들은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인가. 씨 뿌리는 사람들, 씨 뿌리고 키운 후 멀리 떠나고, 버리고 마는 쓸쓸한 농부, 씨를 뿌리되 스스로 거두지 않고 떠나 버리고 마는 것이 참된 인류의 교사들이 가는 길이 아닐까. 한 전선에서 적과 아군으로 만났지만, 이데올로기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자의 가슴에 심어 준 것이다. 확실하게 믿고 있는 그들의 사상, 그들의 정의를 위해서는 피차간에 용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비정하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스승은 결국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자기의 죽음을 택했다. 자기의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제자의 생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결국 제자에게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일러 준 것이다. 사상보다 정의보다 더 숭고한 것,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인간의 모랄, 그것은 사랑이다. 제자에 대한 사랑. 지고한 인간의 모랄을 가르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으리라. 제자를 가르치는 교사의 참된 자세, 교사라는 인간의 생존양식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씨 뿌리고 떠나는 사람, 그 모습은 바로 같은 사람이었다. 스승은 죽었지만 그 제자의 가슴에는 그로부터 스승이 뿌려 주고 간 씨앗이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자가 다시 모교로 돌아갔다면 그 옛날 스승이 서서 가르치던 교단과 흑판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스승의 이름을 불렀으리라. 그리고 그 제자들 가슴에도 메아리치는 스승 상을 심어주었으리라. 저속한 욕망을 극복했다는 것은 누가 이기느냐 하는 것, 남들이 그토록 탐내는 저속한 욕망들을 극복했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승리인가? 사랑이라는 것을 죽음으로써 가르쳐 준 그런 스승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같은 승리자로서 우리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 여름이 되면 난 오래 앓았다. 알 수 없는 꿈으로 뒤범벅이 된 얕은 잠에서 눈을 뜨면 신열과 현기가 온몸을 내리쳤다. 그런, 난 단 한 번도 그것을 고통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절망과 안락이 적당히 합류하고 불안과 허무가 어깨를 스치는 아스피린적 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막과 관통한 채 언제나 뜸부기가 울었다. 울음을 멈추기 위해 땀내나는 베게로 얼굴을 돌렸을 때, 난 왜 뜸부기는 황홀한 오리나무 숲이 아니라 더러운 논둑에 얼굴을 쳐박고 혼자 울도록 운명 지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엔 일생 동안 푸른 숲을 소유할 수 있는 뻐꾸기 같은 새와, 한 평생을 철회색 진흙투성이인 논둑에 숙소를 정한 채 성대를 다해 고독을 과시해야 하는 뜸부기 같은 두 종류의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오빠 생각>강유일
돌아가신 아빠의 옷 한 벌에 엄마 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채곡채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닫이에 넣으시던 엄마의 모습과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 나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겠다던 엄마의 모습이 중첩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엄마> 피천득
꽃을 그림으로써 신의 자태를 본다했고 꽃을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신비를 엿본다고 시인 묵객들도 그랬다.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상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기보다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하늘을 우러러 항상 묵도하는 것.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는 자기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가고 있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간 재목이 혹 자길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정의 현인이다.
김소월도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고 말했듯이 저만치의 거리는 서 있을 자리에 서 있어 꽃을 피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거리가 바로 꽃이 서 있을 자리가 된다. 이웃과 어울러져 피어나는 꽃밭에는 그 꽃밭 특유의 어우러짐이 있어야 한다.
· 음성언어는 시, 공간적 제약을 받으며, 기억하기 힘들고, 재음미가 불가능하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음성언어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문자기호 즉 문자언어이다. 문장이란 언어의 기록이다. 문장은 문자로 말하는 언어이며, 문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문자는 문장을 전제로 하는 문자요. 그 점에서 문자와 문장은 공동운명체가 아닐 수 없다.
· 수필은 머리로 쓴 글이라기보다 마음으로 써가는 글이다. 수필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글임에 사실성에 충실하고 그 사실을 바르게 전달하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 품격이란 인간이 자기는 절대적 가치로서 스스로 존경을 요구하는 특질을 말한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문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져야 한다.
자기 약방에는 약제가 없고 약 살 돈도 당장 없다고 했다. 사실 낡은 약장에는 서랍이 많지 않았고 서랍 하나에 걸려있는 약 저울도 녹이 슬어 있었다.
약구 천장을 쳐다봐도 먼지 앉은 봉지가 심여 개쯤 매달려 뿐이었다. 어째서 내 마음이 그에게 끌렸던지 그 이튿날 나는 그 한위와 같이 4,50리나 되는 청양이라는 곳에 가서 내 돈으로 나 먹을 약재를 사고 약국을 해 먹으려면 꼭 있어야 한다는 약재를 사도록 돈을 주었다. 약의 효험인지, 여름 시냇가에 날마다 낚시질을 다니고 밤이면 곤히 잠을 잔 덕택인지, 몸이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그 후 세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속에서 로미오가 약을 사는 약방, 머지 앉은 병들과 상자들을 벌려 놓은 초라한 약방이 나올 때 비상조자도 없을 충청도 시골 약국을 회상하였다.<시골 항약국>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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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 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ㅊ이는 소리가 들릴 때 당신은 불현 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밭과 논, 술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ㅈ징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붇은 서류를 뒤척이는 처녀의 가드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빈곤, 방랑, 노동이 주제. 굶줄힌 어린아이의 모습, 창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은 하얀 누송이- 이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시나크
· 이상한 관상쟁이는 관상봄이 사람의 감추어진 이면을 말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얼굴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는 것이 모두 그 반대였다. 장님을 보고는 눈이 밝소라고 말하고, 예쁜 부인을 보고는 때로는 아름다고 때로는 추하오라고 한다. 이것은 스스로의 길을 버리고 그저 상례에 따라 거룩한 체하는 그 당시 학자들을 풍자한 비평으로 독창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이규보 자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피교육자를 다루는 식의 오만한 글을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범상한 사건에서 진실을 응축해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온기 서린 뭄ㄴ제로 적어 내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예지는 선천적이고 숙명적으로 타고 태어난다. 수필이 지식의 나열로 채워진 것이 안기고, 예지의 글로 우리를 일깨울 때 그 글은 한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 영역을 초월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문학은 공감대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것인 만큼 현실의 나를 점검하고 대중이 무엇을 갈구하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세심하게 살펴 그 견해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냉철히 비판하는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
·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측면에서 보기도 하고, 뒷면에서 보기도 한다. 정면에서 본 사물, 현상이란 누가 보아도 비슷하고, 눈에 익은 것이므로 별 신통한 주제를 찾아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앵글을 측면에 대는 것이다. 껍질이 있으면 한 꺼풀 벗기고 속을 맛보는 일이다.
· 외국 방문객은 한국 네거리에 신호등이 작동하는 데도 교통경찰이 있는 것을 보고 놀ㄹ한다. 교통 신호가 있는데도 때론 교통경찰이 교통 신호등 관계없이; 차를 가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가지 못하게 지시한다. 교통경찰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으면 교통 신호기를 끄면 된다. 그러나 경찰은 신호등이 작동하는 데도 청신호 때 차를 가지 못하게 한다. 이리하여 교통경찰은 교통 신호보다 우위에서 교통을 좌지우지한다. 교통 신호가 법이라면 그것을 자의로 좌우하는 교통경찰은 교통의 독재자이다. 우리는 나름으로 교통 신호에서 우리 문화의 하부구절을 읽어보았다. 에코는 처음 기호학 이론서를 낸 뒤 그의 기호론을 응용한 두 소설을 썼다. <장미의 이름>에는 세 가지 언설형태-문학-역사적, 신학-철학적, 통속-문학적-가 섞여 있다. 수필 합평회에서 수필을 무슨 평론처럼 설명투로 썼느냐고 혹평이 내려질 때 수필가는 자기가 적합하다고 여기는 형태로 쓸 자유가 없느냐고 되물었다. 서정적 언설과 설명적 언설의 엇갈림이었다.
헤리 골든의 수필집 하나는 수백의 소설집보다 값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필가가 쓴 버려진 글을 읽고 갑자기 인생과 천지를 바라다보는 마음의 눈에 활짝 열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읽는 이의 넋 깊숙이 그 자기 깨달음과 자기비판과 자기 성찰을 때려 넣어야만 한다. 즉 독자의 넋에 호소해야 한다 깊은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에서 출발하는 것이 수필이다 독ㅈ바를 울리려면은 쓰는 이가 먼저 울고 써야 한다.
저널리스트란 오피니스트 즉 기회주의자를 말함이고 수필가란 삐딱한 눈을 가진 개성적 에너지를 가진 글을 이룩해내는 이들이다. 수필이 하나의 문학 스타일을 지니고 쓴 이의 개성이 뚜렸이 나타나게 될 때는 어느 문학 분야보다도 수필문학이 으뜸이다. 마크트웨인 말같이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주면 그 개는 먹이준 이는 안 문다. 인간과 개의 주된 차이는
바로 이점이라고 한 인간 개인의 불신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보는 거다. 개인의 시대로 자꾸 접어들면서 문학에서도 개인의 개성은 스타일과 합칠 때 가장 으뜸으로 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활자 빙하기에 들어섰다. 혹 활자 읽는 것이 몹시 고통이 되는 세대에 들었다는 학설이다. 전자매체인 컴퓨터, 비디오, 반도체를 통한 책의 형태 스스로가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는 문제다. 현대 상황은 객관적 소설보다도 주관적 해석과 고백에 의한 수기류가 더 독자에게 실감을 독두어 준다. 거기다 소재의 신기성이라든가, 드릴, 서스펜스, 섹스, 눈물 같은 것이 극치를 이뤄 주효했다. 독자들은 문인의 넋두리 같은 수필보다도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생활인들의 체험의 이야기들에 더욱 관심 갖는다.
콜웰“독자와 작자의 두 마음이 만나도록 쓰는 것과 진실만을 서술하는 큰 차이가 바로 문학 장르로서의 에세이와 해설적 소설로서의 에세이의 차이‘란 것을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