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댕이 소갈머리 / 조영안
선물을 받았다. 보라색 지갑이다. 그냥 보아도 좋아 보인다. 맨날 앞치마에 돈을 쑤셔 넣는 것을 보고, 가게에 자주 오는 삼촌이 선물한 것이다. 낯선 지갑을 보고 남편이 샀냐고 물었다. "삼촌이 사 줬어요. 돈을 가지런히 넣어 보라며."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돈을 함부로 다루는 것 같았다. 손님 몇은 지갑에 가지런히 정리된 돈으로 계산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다. 구겨진 돈을 받으면 살짝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럴 때마다 함부로 사용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왜 지갑을 사 줬대?" 은근히 불편한 마음이 묻어 있다. "그냥 사 주더라구." 그렇게 묻는 남편이 싫었다. 나도 모르게 "사 준 게 우째서 삐딱하게 말하냐?" 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그 가방을 맨날 들고 다녀요? 말을 안 하니 속도 없는 줄 아나 봐.”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을 드러냈다. 남편은 학원에서 드럼을 배운다. 얼마 전부터는 하모니카도 익힌다고 했다. 한 달 전 수가 예쁘게 새겨진 천 가방을 가져왔다. 내 맘에도 쏙 들었다. 웬 거냐고 물으니까 학원생이 선물했단다. 혼자가 아니고 모두에게 나눠 줬다는 자랑이다. 갖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여자가, 남자가?’라고 물었다. 여자란다. 악보 책이랑 하모니카를 넣으니까 딱 맞춤이고 어울렸다. 손에 들고 다니던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 한 게 걸렸는지 다음 날부터 다시 두고 원래대로 다녔다. 그냥 모른 체했다. 속으로만 한마디 했다.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고.
어릴 때부터 가방과 모자 모으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는 가방 대신 천 보자기에다 책을 돌돌 말아 다녔다. 손에 들거나, 허리에 두르기도 하였으나 주로 어깨에 사선으로 메고 다녔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가방을 선물 받았다. 외항선을 타던 고모부가 외국에서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부잣집 애들 몇 명만 겨우 들고 다니던 때라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우쭐한 기분이 들어 뽐내기도 했다. 마을에서도 유일했다. 그때부터 내 ‘가방 병’은 시작되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거나, 억지로 뺏기도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서 얻기도 했다. 아쉽게도 명품은 없었다. 지나고 보면 하찮았는데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쓰다가 싫증 나면 하나씩 나눠 주는 재미도 있었다.
드디어 내게도 명품 가방이 생겼다. 아들이 해병대 제대하면서 그동안 모은 돈으로 큰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보기만 해도 명품에 걸맞게 부티가 줄줄 흘렀다. 가게나 시장통에 걸려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멋졌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웬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들지 않고 가만히 모셔둘 때가 많지만 부자가 된 듯 배부르다. 모양이 흐트러질까 봐 평소에는 종이를 가득 채워서 보관한다.
아는 언니가 가게에 들렀다. 멋쟁이 언니다. 평소에 가방이며 모자랑 하기만 하면 예뻤다. 물론 옷도 세련되게 입는다. 그녀의 것이 내 맘에 들면 뺏다시피 졸라서 얻곤 했다. 그런데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뺑소니 사고로 크게 다쳤다. 지금은 유모차 없이는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한다. 오늘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제법 큰 손가방을 들고 들어섰다.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언니, 왜 이렇게 크고 무거워요?" "내 기저귀 가방이네." 그렇다. 그 사고는 그녀의 남은 인생을 모조리 짓밟았다. 날씬하고 멋쟁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들고 다니는 게 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망설임도 없이 ‘내 기저귀 가방’이라고 말하는 그녀가 애처롭기만 하다. 그동안 받은 사랑을 생각해서 예쁘고 실용적인 가방 하나를 선물해 줘야겠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한테 넌지시 물었다. "그 가방 어쨌수?" "무슨 가방?" 시치미를 뚝 떼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학원에서 여자가 선물한 거." 버렸다고 한다. “진짜로?” 되묻는 내게 처박아 두었단다. “편하게 들고 다니셔.”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 뒤에 대고 말했다. 입 밖으로 밴댕이 타령이 나오려는 걸 꾹꾹 눌러 담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