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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애 / 사 9:1-7
어느 청년이 앞으로 결혼할 대상으로 바라는 여인상을 적어보았다. 1) 나만 존경하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 않는 여자, 2) 부모님 잘 공경하고 시동생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여자, 3) 요리 잘하는 여자, 4) 옷사는데 돈 많이 안쓰는 여자, 5) 부지런해서 집안을 늘 깨끗하게 정돈하는 여자, 6)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주는 여자, 7)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여자, 8) 내가 아무리 늦어도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리는 여자, 9) 밤 늦게 친구를 데려와도 불평하지 않는 여자, 10) 밤에 도둑이 들어와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 이런 조건을 다 들어줄 여자가 몇 명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자 여자가 자기가 원하는 남편 상을 적었다. 1) 언제나 하루 3번씩 ‘자기 사랑해’라고 말할 것, 2) 식사를 할 때면 언제나 ‘지금까지 식사해 봐도 역시 당신이 만든 음식이 최고야!’라고 말할 것, 3) 저녁 때 퇴근할 때는 시장에 들려서 반찬거리를 사오는 남자, 4) 매주 한번씩 외식시켜주는 남자, 5) 식사 끝나면 언제나 설거지를 해주는 남자, 6) 언제나 두둑한 월급봉투를 주는 남자, 7) 매일 아이들과 가족과 놀아주는 남자, 8)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수 있는 남자, 9) 언제나 존경과 사랑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남자, 10) 친정식구들에게 언제나 최고의 예의로 대우해주는 남자 11) 말을 안해도 알아서 척척 부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남자. 우리는 보통 이런 요구사항을 가지고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기대사항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처도 많고 실망도 많게 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인생이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럴 때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는 자가 바로 자녀이다. 자녀을 낳으면 부부간에 거는 기대를 아이를 통해서 만족할 수 있다.
성서를 보면 인생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상하리만큼 기다리게 하는 수가 많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그렇게도 울부짖었다. 재료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어 내라고 한다. 재료를 달라고 하면 게으른 백성들이라고 회초리로 때린다. 이렇게 해서 수백년을 압박받아서 한 맺힌 사연을 부르짖는다. 그러면 즉각 응답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출 2:1절 이하를 보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당장 내려오셔서 해방시켜 주셔야 하는데 우리 주님은 한 남자 레위인이 한 여자 레위인과 결혼하게 함으로 역사를 진행하신다. 성질 급한 우리로서는 굉장히 답답한 일이다. 또 신약에서도 보라. 우리말로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95%가 영세민이다. 소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인 바리새인, 서기관, 헤롯당원들 합해야 5%정도이다. 그러면 빨리 떡을 풀어서 경제문제를 해결해 주고, 또 군인을 동원하여 로마에서 해방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시고, 저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결혼시키므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것도 아기를 마굿간에 잘 수 밖에 없도록 가난한 사람, 그것도 아직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기를 임신한 사람, 그래서 사회로부터 오해받을 만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언제 그 아기가 커서 민족을 구원하나? 기다리다 못해 속이 터져서 때려치우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그걸 아시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유대땅에 오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아기로 오시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팻머스문화선교회가 지난 한달간 서울 경기지역 크리스천 중고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크리스마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61%가 ‘산타클로스, 캐럴, 루돌프’라고 대답했다. ‘예수님, 교회’는 24%에 그쳤다. 또 ‘크리스마스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40%가 ‘이성친구와 데이트’를, ‘교회행사 참여’는 23%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이 분이 오늘 내게 누구신가를 깊이 상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땅 말구유에 나셨다는 것은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란 말씀같이 하나님의 임마누엘 사건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사에 내려오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임마누엘 사건을 통해 성탄의 의미를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700년경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이다.사 7:14절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사 7-12절은 임마누엘장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란 뜻이다. 주전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예수님은 이 땅에 어떤 분으로 오시나? 이사야가 본 예수님은 9:1-2절에 보면 고통과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마태복음에서 해석을 해 준다. 마 4:12-16절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곧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다.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의 빛으로 오셨다. 그러나 요 1:5절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한다. 이 세상은 빛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을 중거해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살펴보면 한가지 특징이 있다. 3절에서 보듯이 바로 즐거움이다. ‘주께서...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 거했다. 이제는 그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어떤 즐거움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그 즐거움을 두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추수하는 즐거움이다. 여러분 농사짓는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때는 언제이겠나? 추수할 때이다. 농사가 잘 되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다. 그리고 즙틀에는 새 포도주가 넘치고 있다. 그러니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겠나? 둘째로,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이다.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때는 언제인가? 탈취물을 나눌 때이다. 전쟁터에 나갔다.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리품을 나눌 때의 그 기쁨, 그 즐거움이 얼마나 대단하겠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추수할 때의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 바로 여러분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
3절하를 보기 바란다.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즐거움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밝혀주는 말씀이다. 그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추수의 즐거움을 거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잘싸웠기 때문에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도 다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 흑암, 멸시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끝이 있다. 일시적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로와의 열심이 우리를 고통 가운데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라.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마라. 믿음의 눈을 열어서 고통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라. 그리고 흑암 너머에 있는 큰 빛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어라. 멸시 너머에 있는 영화로움을 보기 바란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열심이 반드시 여러분들을 승리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라.
곧 이어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할 때처럼, 탈취물을 나눌 때처럼 즐거움에 싸일 수밖에 없나?
첫째 이유는 4절이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제자의 손에 의해서 종처럼, 짐승처럼 아주 심한 학대를 받아왔다. 목에는 무거운 멍에를 메어야 앴다. 어깨에는 채찍이 가해졌다. 압제자는 그들의 등을 막대기로 내리쳤다. 그들은 짐승 취급을 받았다. 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모든 학대에서 구원해 주셨다. 그들이 멘 멍에를 부수셨다. 압제자의 채찍을 찢으셨다. 그리고 막대기고 꺾어버리셨다. 그리고는 학대당하던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셨다. 해방을 주셨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지 아니할 수 있겠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어느 때와 같이 하셨다고 했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사기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을 때 미디안인들이 칩입해 들어왔다. 13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이었다. 그때 그들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3만 2천명이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많다고 하시면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다 되돌아가게 하시고 불과 3백명만 남게 하셨다. 그리고는 그 적은 숫자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제자의 멍에와 째직과 막대기에 벗어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누리는 것도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자유함을 즐겁게 누리기만 하면 된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해서 구원의 즐거움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둘째 이유는 무엇인가? 5절을 보라.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군인이 무엇을 입고 싸우나? 갑옷을 입는다. 그리고 적과 어지럽게 싸운다. 정신 없이 싸움을 하다 보면 그 복장에 무엇이 묻는다고 했나? 피가 묻기 마련이다. 자기의 상처에서 난 피도 묻을 것이고, 적이 흘린 피도 묻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필요없다. 모든 전쟁 장비를 ‘불의 섶 같이 살라지리니’라고 했다. 왜 그런가?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가 왔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샬롬, 곧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나와 너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 뜨리셨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란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편함을 다 씻어주시고, 대신 하늘의 참 평화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셋째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함을 주시고, 참 평화를 주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그 분이 누구이신가? 또 어떠한 분이신가? 이사야는 6절에서 그 분의 모습을 세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분의 이름을 다섯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 분이 오떤 모습으로 오시는지 보라. 6절이다. 6절상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첫째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다. 메시야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 분은 장성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다. 사람이라야 죽지,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해 주는 구절이다. 둘째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자기 아들을 세상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셋째는,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이다. 정사라는 말은 영어로 ‘Govern ment’ 곧 정부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어깨에 정부를 담당하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통치자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스는 만왕의 왕이시다. 이 세가지가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모습이다. 그는 참 사람이시다. 참 하나님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다.
곧 이어 이사야 선지자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의 속성과 그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메시야의 이름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6절상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메시야의 첫째 이름은 ‘기묘자’이다. 기이하고 묘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영어성서에는 이것을 ‘Wonderful’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모두 놀랍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동정녀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그분의 모든 삶이 다 놀랍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면서 사역하시는 일도 놀랍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일, 그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일이 없다. 그러면 왜 메시야가 이 당에 오셔서 그 놀라운 일을 행하셨나? 그 목적은 무엇인가? 둘째 이름이 설명해 준다. ‘모사’ 여러분, ‘모사’라는 뜻이 무엇인가? 영어에서는 ‘Counselor’라고 번역했다. ‘상담자’라는 뜻이다. ‘보혜사’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떠한 문제라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늘나라 국선 변호사이다. 실감나게 말하면 ‘백그라운드’ 빽이란 말이다. 빽, 참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빽을 참 좋아한다. 이어령 교수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줄문화라서 그렇단다. 세상 빽은 변하지만 우리의 백 그라운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히 13:8절 말씀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도록 동일하신 분’인줄로 믿는다. 셋째 이름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실 수 있다. 바람과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도 있다. 중풍병도 고치시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도 고치신다.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넷째 이름은 무엇이라고 했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감싸주신다. 우리는 연약하다. 그래서 때로는 실족한다. 믿노라 하면서도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버리는 법이 없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가 그분을 멀리 떠났더라도 탕자가 두손 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우리도 뉘우치는 심정으로 그분께 돌아오면, 그분은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다섯째 이름은 ‘평강의 왕’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평강을 허락하신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참된 평강, 곧 ‘Shalom’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기묘자로 오셨다. 우리의 모사로 오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오셨다.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거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의 모든 짐을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 내려놓기 바란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을 괴롭히는 고통과 흑암과 멸시,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벗어버리고 마음의 천국을 이루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분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메시야 왕국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그 정사는, 그분의 다스림은, 그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다. 아울러 평강의 더함도 무궁하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분은 평강의 왕으로 이 다엥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무력으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평강으로 다스리신다. 그분의 나라에는 언제나 평화가 넘쳐 흐른다.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우리 예수님으 누구의 자손으로 오셨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셨다.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세상 나라는 쇠약했지만, 그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다.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각 나라마다 통치이념이 있기 마련이다. 건국이념이 있다. 메시야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신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다. 이 세상에는 불의한 일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존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노력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7절 끝부분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열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집념이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 과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은 이것을 이루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한지 약 700년 후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다.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의 몸으로 탄생하셨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셨다. 죄의 권세에 얽매여 고통당하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다. 사탄에 매여서 종노릇하면서 멸시당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영화롭게 만드셨다. 천국의 백성으로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다.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되나? 그 나라의 시민답게 공평과 정의를 이념으로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의로운 삶, 깨끗한 삶, 정직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연약하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믿음 가운데 주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날마다 누리면서, 매일매일의 삶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06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