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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달밤’
남남쪽 머나먼(섬의 나라)나라 월남의 달밤
십자성 저 별빛은 어머님 얼굴
그 누가 불어주는 하모니카냐 아리랑
멜로디가 향수에 젖네 가슴에 젖네
♩♪♬ ~ ♩♪♬ ~
열대어 꼬리치는 사이공 항구
산호등 아롱다롱 물에 어리면
카누에 실어보는 그 님의 노래 떠나온
수륙만리 아득한 고향 그리운 산천
반야월 작사, 김성근 작곡, 윤일로가 1966년에 발표한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되던 무렵에는 월남 파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특히 한국전 당시 UN군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한국군 사상 처음으로 해외로 군대를 보내는 파병국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64년 9월에 의료진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보낸 것이 시작이었다.
건설 지원이 주 임무인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부대’를 필두로 전투부대인 ‘맹호부대’가 파병되었다.
이어서 해병부대인 ‘청룡부대’도 파병되었다.
마지막 파병 부대는 ‘백마부대’였다.
이렇게 1973년까지 3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당시 대한뉴스에서는 ‘월남소식’을 통해 시시각각 월남소식을 전해왔다.
초, 중, 고등학생들에겐 ‘파월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위문편지 쓰는 것이 숙제이기도 했다.
골목에서 벌어지는 전쟁놀이의 주제가처럼 울려 퍼지던 ‘맹호는 간다’, ‘우리는 청룡이다’, ‘달려라 백마’ 같은 노래들은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나에겐 아직도 생생한 추억이다.
‘월남의 달밤’은 크게 히트했다.
‘메콩 강’에 달이 뜨고 정글에 별이 지는 열대의 나라 월남 땅 병사들에게 이국 만 리 고국을 그리워하며 향수를 달래주는 벗이었다.
이 노래의 발표 당시 노래가사는 ‘남 남쪽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으로 되어 있었다.
베트남이 섬나라로 묘사된 것이었다.
처음 이 노래를 접한 나는
'월남이라는 나라는 섬이 많은 나라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노랫말에 대하여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모 초등학교 시험문제에
‘월남이 섬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가 출제되어 틀린 답이 속출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결국에 이 가사는 ‘섬의 나라’에서 ‘머나먼 나라’로 바뀌었다.
1966년 3월에 ‘종군연예인단(단장 박시춘)’이 발족된다.
과거 군에 종사한 일이 있는 연예인들로 구성된 이 종군연예인단은 군 위문공연의 일원화를 꾀했는데 해군 군악대 출신인 그도 연예인단에 합류하여 간사 직을 맡았다.
월남 파병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위문공연도 줄을 이었다.
그 역시 1967년 2월에 청룡부대 위문공연을 시작으로 69년과 71년 세 차례 위문공연을 다녀왔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주관한 이 연예위문단에서 그는 코미디언 백금녀와 함께 MC로 활동하여 원맨쇼까지 맡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펼쳤던 위문공연은 대단했다.
모든 군인들이 ‘월남의 달밤’을 합창하며 울고 웃는 모습은 절정이었다.
‘월남의 달밤’을 실제 부른 주인공이었던 윤일로는 방문할 때마다 장병들과 사진을 찍느라 파김치가 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그에 따른 에피소드 또한 많다.
어느 날 위문공연 중 빨랫줄에 널어놓은 공연단의 여자속옷이 없어졌다.
장병들이 훔쳐간 것이다.
‘여자 속옷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부적처럼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 이후 위문단원들은 아예 여성속옷을 따로 몇 벌씩 챙겨가서 장병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 그는 파월 병사들에게
“저는 가장 인기 있는 여자연예인인 백금녀씨와 함께 MC를 보는 윤일로입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왜냐하면 팬티 한 장으로 여러 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전쟁터의 젊은 군인들에게 춤과 노래, 오락과 쇼는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역설적으로 힘들고 고달픈 현장일수록 노래와 춤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슴 아픈 장면도 많았다.
공연을 마친 뒤 장병들을 안아주며
“꼭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고 격려를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중 한 장병이 헬리콥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수경례를 하고 있어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다.
베트콩들이 도처에 숨어있는 이 위험한 전쟁터에 그 장병을 두고 간다는 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그런가 하면 여성들 사이에서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고무줄 치마, 일명 ‘월남치마’가 대유행했다.
파월장병들이 귀국할 때 이 치마를 많이 구입하여 들어왔다.
월남치마에 관한 추억 한도막!
1970년대 말 나는 '월남치마'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그 치마를 입은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지금은 김천시로 통합이 되었지만 당시는 금릉군이었던 신혼 시절 나는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내가 거주하던 '조마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황금동에 위치한 '황금시장'이라는 곳을 경유해야 하였다.
생각보다 출장을 일찍 마친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하여 그 시장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버스를 탈 시간 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나는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빙 둘러선 곳에서 옷을 팔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치마가 '월남치마'였다.
내 아내가 입으면 참으로 예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치마 얼마예요?"
그때 였다.
"무슨 남자가 여자 치마값을 물어보느냐?"
고 어떤 아줌마가 무심코 하는 얘기가 들렸다.
"아뿔싸!"
79년 당시만 해도 시골 아줌마들에게 내가 한 말은 참 한심스러운 말이었을 게다.
'남자가 아내 치마를 구입하다니......'
"아 차!"
하고 주눅이 든 나는 치마 구입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 후로 나는 절대로 아내 물품을 구입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후 아내에게 그 일은 비밀로 하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아내가 그 치마 입은 모습이 보기에 좋을 것 같다며 몇 번 얘기를 했었다.
신혼 시절 그 치마를 입은 아내를 보며 나혼자 말못할 사연을 숨기고 아내를 바라 본 기억이 추억 저편 아련하게 있다.
월남 파병 장병들이 많이 구입하였고 이 시기에 유행을 했다고 해서 [월남치마]가 된 것이지 실제 월남에는 이 치마가 없다.
단지 그들의 전통 옷인 [아오자이]가 있을 뿐이다.
사진상에서 접한 [아오자이]는 참으로 예뻣다.
베트남 국영항공의 스튜어디스가 아오자이를 입고 자기 나라를 홍보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던 차 재직 중에 베트남을 찾을 연수 기회가 생겼다.
유럽이나 다른 곳도 희망할 수 있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배트남'을 희망했다.
그 곳을 택한 것은 월남전의 흔적을 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아가씨들의 실제 모습이 궁금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었다.
그러나 웬걸
베트남 국영항공을 탑승해도
[아오자이]를 입은 승무원은 결코 볼 수가 없었다.
농촌마을이나 도시 어느 곳에서도 결코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결국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사람들의 디자인으로 베트남 아가씨들의 곡선미를 잘 살려서 만든 옷이라고 한다.
'월남 치마'는 길이가 길고 화려한 색깔로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일자형 통치마였는데 70년대에 크게 유행하면서 ‘월남치마’로 불리게 되었다.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가서 쉽게 입고 벗을 수 있어서 때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입을 수 있었다.
이 치마는 심지어 시골 아낙네들이 농사일을 할 때에도 간편하게 입을 수 있어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대유행했다.
아래 사진은 201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월남치마를 입은 모습이다.
‘베트콩’이라고 하는 말도 입에 오르내렸는데 남들 몰래하는 행동을 ‘베트콩식’이라 불렀다.
윤일로는 1935년 평양 태생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안남도 양덕군 동량면 하덕리 74번지가 그가 태어난 곳이다.
양덕에서 여관을 하던 집안의 6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평양으로 이사해 11살 때인 1946년 3월에 어머니를 따라 7남매와 함께 월남하여 인천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그는 해군 군악대에 들어가면서 음악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군악대 시절에 행진곡을 하나씩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엄한 제도가 작곡에 눈 뜨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늘 기타와 오선지를 지니고 다니며 틈틈이 작곡을 했다.
본인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곡은 ‘파리의 마돈나’다.
그러나 방송이나 무대에서 잘 부르지 않은 탓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회고한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 해군 제대할 때까지 20여 차례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55년에 '너 없는 세상이란', '그림자 한 쌍' 등을 취입하며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윤일로는 1959년 '기타 부기'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항구의 사랑'(1959), '집 없는 아이'(1961), '월남의 달밤'(1966) 등을 발표했다.
SP와 축음기시대에 ‘내가 울던 파리’, ‘연분홍 로맨스’, ‘재즈봄’, ‘지나간 날’ 같은 모던한 분위기의 노래를 구사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기분파 인생’, ‘항구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히트곡이다.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성격 그대로 젊은 시절의 별명은‘인천 벽돌’이다.
주먹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 별명 그대로 거침없고 매사 적극적인 성격이다.
그는 전화벨이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남들 앞에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 만큼 스타로서의 자존심 또한 강했다.
'일로(一路)'라는 이름은 '오로지 한 길로만 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하지만 한 길로만 가기에는 재주가 너무 많았다.
직접 작사, 작곡은 물론 MC, 그리고 코미디언 보다 더 놀라울 정도의 성대모사까지 구사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60년대 전성기 시절, 대한뉴스 화면을 통해 소개된 선배가수 현인과 함께 부르는 ‘신라의 달밤’ 영상이 화제가 될 만큼 성대모사는 놀라웠다.
그가 만든 곡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는 노래는 ‘강아지 부기’라는 곡이다.
‘강아지 부기’는 음반 취입 중 한 곡을 더 넣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즉흥적으로 만들어 취입했다는 놀라운 일화가 있는 노래이다.
누구라도 이 노래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성대모사가 뛰어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3절로 되어 있는 이 노래의 1절엔 귀여운 스피츠, 2절엔 사나운 세퍼트, 3절에서는 우리나라 토종개 복실이가 등장한다.
이 노래 속에 강아지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바로 윤일로 씨가 직접 내는 성대모사다.
이 놀라운 성대모사가 화제가 되면서 윤일로 씨는 극장무대에 설 때마다 개 짖는 소리를 요청받아 그의 무대 단골메뉴가 되었다.
심지어 박재란 씨가 취입한 노래 ‘강아지 왈츠’에 등장하는 강아지 소리 역시 윤일로 씨가 내는 성대모사다.
취입 당시 작곡가 이인권 선생에게 불려가 ‘왈왈’하며 강아지 역할을 했다는 일화가 그렇듯 그의 성대모사는 신기에 가까웠다.
부기우기, 룸바, 탱고, 왈츠 등 유행을 리드했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던 만능 엔터테이너 윤일로는 분명 멋쟁이다.
매니저 겸 비서 역할을 했던 부인 박수전 여사도 60년대에 ‘사랑의 물새 한 쌍’, ‘희망의 청춘’ 등의 노래를 발표한 가수였다.
박수전(朴秀田)이란 예명은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의미다.
작곡가 김 현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김 현은 ‘못 잊을 대전의 밤(안다성)’, ‘기분 찾는 인생(윤일로)’을 발표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지난 2012년, 박수전 여사가 윤일로 씨와 함께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KTV의 ‘대한늬우스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 인생쇼-윤일로 편’에서였다.
둘이 처음 만나던 때의 이야기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친구인 가수 유성희와 함께 KBS 남산 방송국에 놀러갔다가 나오는 길이었어요.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때 윤일로 씨가 곤색 우산과 장화를 건네주기에 순간 감동 받았죠.”
일종의
‘프로포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고 말하는 부인의 말에 윤일로 씨는 쑥스러운 듯
"우산을 자기만 준 줄 안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인데 그동안 스캔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에
“스캔들이 나지 않은 건 기술이 좋아서 그렇다.”
고 답해 관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부인은 결혼과 함께 남편의 뜻에 따라 활동을 접어야했지만 당시 가요계에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대전 대흥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전여중, 고 나온 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한다.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뜻의 예명이 그렇듯 그녀는 처음 대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60년대 대전에서 활동하던 그룹 ‘덩쿨클럽’에서 활동하며 작곡가 김현씨를 만나 대전방송국 전속가수로 들어간 후 크고 작은 공연무대에 섰다.
서라벌예대에 진학한 후 상경을 했다.
지인의 소개로 서울시민회관 무대에 서면서 만난 가수 유성희씨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유성희씨와는 충무로 대한극장 근처 필동에서 자취를 하며 데뷔 초에 가수의 길을 함께 걸었다.
박수전씨는 데뷔곡 ‘사랑의 물새 한 쌍’을 발표한 데 이어 오기택씨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희망의 청춘(김영광 작곡)’을 발표했다.
이 무렵 ‘명랑’이나 ‘아리랑’ 잡지에 스포트 기사가 오르내릴 정도로 유망주였다.
비록 윤일로 씨의 만류로 결혼과 함께 연예활동을 접었지만 활동 당시에는‘미스 백마’로 뽑힐 정도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윤일로씨 부부 슬하에는 2남3녀의 자녀가 있다.
부인은 그를 자신의 노래제목처럼 ‘기분파 인생’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기분파 인생’은 ‘기타부기’의 2탄 격인 노래다.
그만큼 낙천적이다.
윤일로는 무대에서의 인기 또한 대단했다.
특히 삼천포 공연 당시 무려 아홉 곡의 앙코르를 요청받았다.
“아홉 곡의 앙코르를 받아 노래를 불렀는데 관중들이 마지막으로 한 곡 더 불러 달라고 요청해서 할 수 없이 노래를 부르려는데, 앞에 앉아있던 관객 하나가
"야,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하고 소리치더군요."
그래서
“이 분이 그만하라고 해서 들어갑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관객들이 그 사람에게 몰려가 집단구타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도 그 분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허허…….”
전성기 시절 윤일로 씨는 음반 역시 꾸준히 발표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2백50여 곡을 취입했고 직접 작곡한 곡만도 50 여곡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취입한 곡이 2010년에 발표한 ‘돈돈(유영환 작사, 작곡)’이다.
무려 76세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첫댓글 4시에 일어나 아침밥 예약 해놓고 송이골님 월남의 달밤에 빠져 있습니다.
남편도 백마부대로 월남다녀온 분이라 오늘 아침은 송이골님글로 행복한 추억에 젖어 있습니다.
송이골님 좋은재주로 여럿을 행복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던 그 날, 저는 군복무 중이었지요!
백마부대 출신의 파월장병이라면 감회가 더욱 새로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