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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막9:33-41)
33. They came to Capernaum, and after going indoors Jesus asked his disciples,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road?”
34. But they would not answer him, because on the road they had been arguing among themselves about who was the greatest. 35. Jesus sat down, called the twelve disciples, and said to them,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place himself last of all and be the servant of all.” 36. Then he took a child and had him stand in front of them. He put his arms around him and said to them, 37. “Whoever welcomes in my name one of these children,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not only me but also the one who sent me.”
38. John said to him, “Teacher, we saw a man who was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old him to stop, because he doesn't belong to our group.”
39. “Do not try to stop him,” Jesus told them, “because no one who performs a miracle in my name will be able soon afterward to say evil things about me. 40. 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41. I assure you that anyone who gives you a drink of water because you belong to me will certainly receive a reward.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수없이 많은 말씀을 나누며 여행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시행착오를 밥 먹듯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베드로가 이 놀라운 깨달음을 고백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막8:31)
주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것보다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실 그 시점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간 3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런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며, 물 위를 걸으시며 제자들의 입에서 그리스도 고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기적이 예수님을 통해서 더 일어나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는데 헛발을 디딘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는 불사조 같은 분입니다.
죽음과는 상관이 없으신 분입니다.
로마 정도는 맥을 못 추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결국은 부활로 승리를 하신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합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그 능력을 가지시고 왜 악인을 용납하시는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의 머리 위로 마른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쳐야 옳습니다.
군인을 몰고 가서 양민을 학살한 놈의 머리 위로!
자기만 식구대로 챙기고 300만 명을 아사시키는 자의 머리로!
하지만 대적들이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죽인다는 것입니다.
악당들이 대낮에 대로를 활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는 왜 이처럼 다른가.!
누가 제대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말인가!
예를 들자면 부흥사들이 복 받으라는 설교를 하면 감동하고 아멘 할렐루야를 연발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들을 두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눅6:20-22)
복이란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피 울고, 배척당하고, 뜬금없이 욕 듣고, 모함 받고.......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다 모아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두고 할렐루야 아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날마다 부자가 버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러 부잣집 앞에 출근했던 나사로가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은 영락없이 하나님의 징계로 보이는 그 일을 두고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흥사가 복 받았다던 부자는 엉뚱한 불 위에서 지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정의가 잘못되면 주일마다 모여서 무당 굿을 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생명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 죽음을 말하지 않은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점집입니다.
원로 목사가 무당에게 안수해 주는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그곳은 전혀 엉뚱한 것을 찬양하며 엉뚱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사용되는 국어사전이 하나님의 나라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것이 되다 보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는데 사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꺼리는 죽으심으로 설명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경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죽으심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또 죽음이란 하나님 나라 사전에는 최고의 영광을 이릅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32.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요13:31,32)
목회자들은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변화산의 사건을, 나병 환자의 치유를, 눈 뜨고, 일어나고....... 수없는 기적을 나열하며 예수님을 설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이런 기적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6: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복음을 완벽하게 전했습니다.
알고 보니 사탄이 베드로로 하여금 가짜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죽음의 희생이 없는 그리스도!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사탄을 통해 죽으심이 없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보고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는데 제자들이 또 그 소리를 했습니다.
6.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1:6)
주님께서는 왜 자꾸 그 말을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할 말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1:7,8)
여러분이 꿈꾸는 종교적인 비젼이 성취된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인격이신 성령이 임하실 것이며 사도들을 통해 성령의 생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목회자의 소명도 주님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운 감정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회피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을 말씀하셨을 때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막9:32)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두려움에 묻지도 못하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탁월하신 계시의 책인 성경은 이 주제를 어떻게(How) 다루시는가?
성경은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이 주제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가족은 아담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2:16,17)
아담이 잠을 자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로 그의 짝을 만드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보니 사랑스러운 아내가 옆에 있었습니다.
뽀뽀해 주고
안아주고.......
아담은 새 식구에게 하나님께 들은 말씀부터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 말씀을 아내에게 대수롭지 않게 전해 주었는지 아니면 이브가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지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그 말씀을 외우고도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죽음이 별거 아닌 줄 알았나?
대충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되는 줄로 알았나?
그 맛이 좋았던지 그것을 남편에게 들고 간 것입니다.
아담이 그 과일을 보는 순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살짝 했습니다.
하지만 한 입만......
아담은 아내와 그것을 함께 나누어서 먹었습니다.
이것은 아담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 첫 가정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사람이 죽음의 존재가 되었는지를 전해 주십니다.
이 가족의 이 사건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노아 가족 이야기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탕자의 이야기.......
성경은 가족 이야기들을 계속 들려주시면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죽게 되신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가족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성경은 윤리 시간에 교수님이 강의하는 식으로 칠판 위에다가 구원을 알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림책에다가!
이것은 구원을 설명하는 쉬운 방식이기 때문 만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관계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제 글을 읽기 시작하는 손자의 그림책입니다.
8월 14일 신문을 보니 어린이 놀이터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부산에서 놀이기구가 고장이 나서 60m 상공에서 그것이 뒤집힌 모양입니다.
식구 중 5명이 죽고 할아버지와 손녀만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위기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손녀를 껴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손녀는 살아야!
할아버지의 손은 피에 흥건히 젖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윤리 교수를 능가하는 윤리 의식을 가져서 이 손녀를 살린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그 할아버지의 손녀였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분은 친할아버지야.!
손녀가 놀이터 기구에서 죽게 생겼을 때 그 일은 할아버지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죽게 되자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앉은뱅이 일으키시러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망한 사업을 흥하게 하려고
혹은 자녀를 일류대에 붙여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죽을 처지였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할아버지야 우리는 바로 그 손자 손녀이지!
이런 쉬운 내용인데 베드로가 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주제가 중요하다 보니 주님은 3번에 걸쳐서 죽음을 언급하시는데 이번이 그 두 번째의 예고입니다.
이전에 베드로도 그랬는데 제자들은 또 엉뚱한 행동을 했습니다.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첫째 예수께서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이 지금 60m 상공에서 뒤집어져 매달려 있는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놀이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셋째 그 일이 일어나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부활의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는데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손녀를 팽개치면 수월하실 텐데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죽게 생겼는데 손녀까지 껴안고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 화를 벌컥 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죽으심의 두 번째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3. They came to Capernaum, and after going indoors Jesus asked his disciples,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road?”
그리스도인이란 무엇보다도 행위의 동기가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것을 이릅니다.
생명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이 추악함으로 뒤집혀진 놀이 기구에서 사랑과 정의를 회복하여 죽을 사람을 살리는 길은 할아버지의 길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처럼 손녀를 살리겠다는 동기로 죽음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을 여태껏 본 적이 없습니다.
손에 피가 흐르며 손녀를 껴안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당장 내가 즐길 소유를 추구합니다.
생명을 배신합니다.
언제나 같은 주제입니다.
누가 더 크게 되느냐로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 다투었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사는 길은 경쟁 우위에 서는 일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가 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해수면의 상승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너나 나나 내 집 마당에 구멍을 뚫어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기 때문입니다.
장삿속으로 3개를 한 번에 뚫으면 할인해 준다니 여기저기 뚫은 것입니다.
지하수가 그렇게 빠져나가니 땅이 침하 한다는 것입니다.
자카르타에서 생존 방식은 내 집에 샘을 파고 물을 퍼내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사람 수대로 가진 차가 자랑이듯이 그 나라에서는 마당에 우물 개수가 집안의 자랑거리일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내 가정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정마다 샘을 파다 보니 자카르타 수도가 가라앉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살려고 하려다가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죽음의 방식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공멸의 방식을 택한 셈입니다.
죄인들은 당장에 제 집에 물 나오면 아멘 할렐루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 집이 가라앉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만 살고 오늘만 살면 됩니다.
그 미친 짓이 자카르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미친 짓이 오늘 바로 옆 나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핵사고수를 바다로 계속 버릴 것입니다.
에어컨 켜고 세상 여행 다니고 그 일을 위해서 그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려니 우리 후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가 되고 눈이 하나가 되고.......
예수께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내가 아닌 이웃을 중심으로 생각하시며 행동하십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 하나님을 둔 한 가족입니다.
백인도 흑인도 함께 챙겨야 하는 가족입니다.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들도 챙겨야 할 가족입니다.
현재의 행위로 미래를 파괴하는 자는 무지한 것입니다.
우리 후손조차 챙기지 못하는 자들이 사탄이 아닙니까!
우리 후손조차 나의 생존 방식으로 삼는 자들은 공멸을 택한 것입니다.
나만 물 퍼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수도 자카르타를 물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4. But they would not answer him, because on the road they had been arguing among themselves about who was the greatest.
제자들은 자신들의 주제에 대해 정말로 치열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식과 우리 죄인의 지식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출생하였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모조리 죽음의 지식뿐입니다.
생명의 지식은 오직 하늘에서 오신 분에게 있습니다.
주님뿐입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지식을 따르는 것이 우리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신뢰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그 가짜 신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처음 만나셨을 때 그 가짜들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1. The Lord had said to Abram, “Go from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to the land I will show you.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장 신뢰하는 것만 골라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다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살고 있는 땅
네가 난 곳
아버지의 집
또 미래의 청사진들입니다.
네가 내일을 알아서 뭐 하겠느냐 그 얄팍한 청사진은 필요 없고 내 말을 따라서 당장 떠나라!
일단 내 말을 믿고 오늘 떠나고 나면 십 년 후에(the land I will show you, 미래형 will show) 그 장소를 알려주겠다.
내 말을 믿고 떠나라!
다음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으로 말하자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입니다.
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22:1,2)
하나님이 주셔놓고 왜 이러십니까.!
질겁할 말씀인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 말씀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5. Jesus sat down, called the twelve disciples, and said to them,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place himself last of all and be the servant of all.”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두고 고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고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내가 크고 보자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자녀에게까지 이 주제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자를 또 야자가 끝이 나면 학원을 보냅니다.
누가 더 크냐!
자신을 죽임으로 세상을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 처음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첫째가 첫째입니다.
꼴찌는 여지없이 굶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서 첫째가 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의의 경쟁이라고 부르면서.......
그런데 이 땅에서 사람들의 선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의 내용입니다.
쟈카르타처럼 침몰하는 일입니다.
마치 깡패의 의리와 같은 것입니다.
깡패의 의리가 그 무리 안에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만 그 밖에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다.
이것에 별표 다섯 개 해라.
첫째가 꼴찌다.
딴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보여 주려고 이 땅에 온 것이다.
정말 안 믿겨지지!
첫째가 꼴찌다.
세상과 정확하게 엇박자로 돌아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첫째가 꼴찌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판을 뒤집는 일이셨습니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7-11)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6. Then he took a child and had him stand in front of them. He put his arms around him and said to them,
그리고 예수께서는 다시 손자를 껴안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의 눈에는 나만 빼고 사람이 모조리 개 돼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이없는 것은 그 사람의 눈에 제 자식조차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표현이 자극적이며 너무 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의 왕 므낫세라는 작자가 왕자인 제 아들을 죽여서 우상에게 바치고 있었습니다.
6. 그래서 그는 자기의 아들들을 불살라 바치는 일도 하고,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도 하고, 마술사를 시켜 마법을 부리게도 하고, 악령과 귀신을 불러내어 물어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많이 하여, 주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왕하21:6)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로 만든 우상의 팔에 제 아들을 떨어뜨려 불태워 죽이는 왕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이 왕은 무엇을 바라고 이따위 짓을 했을까?
제 자식을 불살라서 죽였을까?
더욱이 므낫세는 선왕 중에 선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누구의 아들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 원인은 자명합니다.
무당이 판을 쳤기 때문입니다.
무당이 판치게 되면 도무지 제 자식조차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제 자식을 우상에게 불살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면 피부 색깔만 달라도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피부 색깔이 검으니 사람을 제 집의 소 한 마리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소 대신에 제 집의 밭을 갈기 위해서!
그들은 일억 명의 흑인을 잡아왔습니다.
오다가 죽으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빨이 좋으면 100달러 더 받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그들의 눈앞에서 어린이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를 데려오신 후에 사람 보는 데서 껴안으셨습니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37. “Whoever welcomes in my name one of these children,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not only me but also the one who sent me.”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은 이제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이릅니다.
전에는 누더기를 걸치면 사람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흑인이면 동물인 줄 알았습니다.
돈으로 사고 팔았습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십일조 감사헌금 많이 하라는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되먹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로 더 많이 끌어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지어대면서 그것을 화려하게 장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의 날 바로 너는 살아 있을 때에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했느냐 그것을 물으실 것입니다.
35.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마25:35,36)
사람을 돈으로 가르고
가지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가르고
피부 색깔로 가르고
저만 사람인 줄 알고
하지만 가장 고귀한 하나님과의 접촉점은 이 땅의 가장 낮은 자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설교를 하면서 고귀한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동화를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아버지가 계셨는데 첫째 아이는 흑인 둘째 아니는 황인 셋째 아이는 백인이었습니다.
어려운 윤리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셨습니다.
복음은 고장난 놀이기구에서 손자를 껴안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족 간에는 첫째 둘째가 없습니다.
첫째가 첫째라는 생각부터 고쳐야 합니다.
주님의 가족 안에서 첫째가 꼴찌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카르타처럼 가라 앉고 말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또다시 심각한 두 번째 주제를 다루실 것입니다.
이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면 이 세상이 자카르타처럼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38. John said to him, “Teacher, we saw a man who was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old him to stop, because he doesn't belong to our group.”
요한은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한은 소명감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12명처럼 예수님과 한 무리가 아니지 않소!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당신은 분명 우리 12명에 속하지 않습니다.
명심하시오.!
앞으로 확인해 보겠소.
알았지요!”
그 보고를 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이차 대전 때 우리가 일본놈들에게 얼마나 당했습니까?
그 놈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쥐로 여겼습니다.
아이를 가진 우리 할머니의 배를 산 채로 가르고.......
그런데 그 놈들은 아직도 그 죄를 시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그 놈들이 제 죄를 시인해야 용서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 순사놈보다 더 악질적인 것들은 한국 순사놈이었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 순사놈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거짓을 입에 달고 사는 자들!
제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
그런 자에게 용서는 없습니다.
본인이 죄를 시인하지 않는데 어디 용서가 있다는 말입니까!
좌우간에 파쇄기를 가지고 죄의 증거물을 없애버리고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은 스스로 용서의 기회를 없애는 자들입니다.
검찰의 영수증 잉크는 제 불리한 내용만 휘발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파멸을 경험할 것입니다.
지글거리는 불 위로 던져질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시인하지 않는 행위는 더 악질적입니다.
그 짓을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본놈들의 범죄 행위는 첫째가 첫째라는 생각을 가진 놈들의 범죄 행위입니다.
둘째 사람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사람 생명을 경시하는 독재자들은 마귀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그 이차 대전의 딴 주인공 독일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죄를 시인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의 방식입니다.
주님을 죽였으니 600만의 유대인을 죽여도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12 명의 편에 속해 있으면 무슨 일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의 후손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학살!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학살!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9. “Do not try to stop him,” Jesus told them, “because no one who performs a miracle in my name will be able soon afterward to say evil things about me.
물론 주의 이름을 시험하고 과시하기 위한 장난질도 있었습니다.
13.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14.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15.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16. 그리고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서,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행19:13-16)
하지만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이 병들거나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기적을 일으켜보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교적 과시 행위가 아니라 진지했으며 장난질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아들을 고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이름의 역사가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사람이 자신의 무리에 포함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소명감을 가지고 그들의 행위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0. 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무리에 속한 사람들만의 전용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신앙의 내용을 떠나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했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다니는 이들입니다.
기독인들에게 그런 내용성은 없습니다.
독일인의 경우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 살인의 근거를 나는 예수님의 후손이라는 곳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3:8)
예수님은 유대인을 죽일 빌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손에 못박히신 것은 유대인을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하나님은 원수를 살리시기 위해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원수로 자신의 한계를 목격하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한 생각은 사람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니 별수 없이 사마리아에 간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눅9:53-55)
그런 말이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자 예수께서는 단호히 반대하셨는데 주님의 사마리아 전도는 그 사람들의 머리에 불벼락을 내리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선행이 악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학살의 빌미로 삼은 것은 사탄입니다.
학살은 학살일 뿐이며 도둑질은 도둑질일 뿐입니다.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롬2:22)
유대인들은 이방의 종교 시설을 혐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값나가는 이방 신전의 유물을 챙겨서 그것을 팔아 돈을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면서 그 행위는 도둑질이라고 했습니다.
이방 사찰의 물건이니 도둑질해도 성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깃발을 내걸고 아무 여자나 마녀로 몰아 죽이면 그것이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내 걸고 전쟁을 일으켜서 기독교 나라의 땅을 넓히는 것을 두고 거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세우면서 사찰을 일곱 바퀴를 도는 종교 시위행위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더한 사람은 사찰을 불 질러 버리는 강도짓을 합니다.
십자가를 들었다고 모두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우리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일본놈들은 그 일이 성스러운 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십자가의 깃발 밑에 우리나라의 양민이 엄청나게 학살되었을 때 그것을 두고 누가 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친일파만 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녀로 지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영적 전쟁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전쟁의 방식은 원수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방식이셨습니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름으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1. I assure you that anyone who gives you a drink of water because you belong to me will certainly receive a reward.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을 배척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마녀사냥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 한 잔의 배려가 있을 때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일로 주님은 그 사람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