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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의 원리와 조선 전기의 회화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6)
‘詩畵一致’ 바탕위에 개성적 화풍 창출
제임스 케일이 쓴 ‘중국회화사’에도 나오지만 동양화의 특징은 서양화보다 무려 700년이나 이른 10세기 무렵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채색화에서 수묵화로, 실용화에서 감상화로 주류가 바뀌었다는 것이에요.
이 때 ‘서화일치(書畵一致)’ 또는 ‘시화일치(詩畵一致)’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도 들어와 서양미술을 봐왔던
미적 기준으로 동양미술을 이해하기 불가능해집니다.
특히 산수화와 수묵화가 합쳐진 수묵산수화는 동양화의 핵심 장르이면서도 그림에 대해 감상안을 갖고 싶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해왔지요.
종래 초상화나 벽화 등 기록화를 그릴 때 전부 광물성 안료를 사용해 청록채색을 진하게 썼는데, 수묵과 담채
라고 하는 번지기 기법을 쓰게 되면서 지(紙)·필(筆)·묵(墨)이 같이 어우러지는 미적 효과까지 덧붙여 산수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수정이 가능한 서양의 유화와는 달리 동양화는 일필로 그려야 하며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격조,
문기(文氣)가 있어야 한다는 독특한 평가기준이 등장합니다.
지·필·묵의 특성 때문에 ‘서(시)화일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소동파가 8세기 왕유의 그림을 평하면서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라고 한 것이 이후 동양화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되지요.
반면 서양미술사에서 감상화란 장르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들어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풍경화 를 그리고 같은
시대에 정물화가 등장하면서부터예요.
이전에는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교회당이나 수도원 식당 등에 벽화로 그린 기록화거나 모나
리자 그림처럼 초상화가 있을 뿐이지요.
동양화가 중국에서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직업화가와 선비화가, 화원화가와
문인화가의 작업이 분리된 점입니다.
때때로 직업화가가 문인화가와 같은 풍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나타나지만 엄연히 화원
으로서 나아가는 길과 문인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달라 북종화와 남종화란 서로 다른 미학을 갖게
됐지요.
이것이 17세기 명나라 동기창이 나와 ‘문인화인 남종화가 직업화가들인 화원이 그린 북종화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동양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남종화 우위론을 내세우면서 문인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며,
동양화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실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사의(寫意), 즉 뜻을 쏟아내 보여주는 그림으로
가게되는 배경이 됩니다.
중국미술사에서 동양화는 8세기 청록산수를 그렸던 화원화가인 이사훈과 왕유가 등장해 쌍벽을 이루면서
각각 북종화와 남종화의 조종이 되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한 점도 없습니다.
이보다 앞선 4~5세기 동진시대 고개지가 궁중의 사녀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그린 ‘여사잠도(女史箴圖)’가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화장하는 여인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치게 구도를 잡은 솜씨가 굉장합니다.
산수화는 11세기 곽희가 등장하면서 양식의 통일이 이뤄지고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나 곽희 부자가 지은 화론집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동양사람들의 자연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교본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와 아침·점심·저녁 때 안개의 모습 등은 물론 산수화의
기본이 되는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의 삼원법(三遠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원은 높고 험한 산악의 기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서 산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으로, 심원은 앞뒤로
겹겹이 들어선 산악의 깊은 형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앞에서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산의 뒤쪽을 조감
하듯이,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먼 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트인 공간으로 시선이 뻗어나가도록 그리는 방법을 각각 말하지요.
산수화를 그릴 때 한 화면 속에 삼원법을 다 집어넣은 곽희의 그림은 소실점이 있는 사실주의와는 어긋나지만
전체 속에서 산수가 갖고 있는 장엄한 모습을 모두 보여줘요.
이밖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처럼 산수화에도 주봉을 중심으로 다른 봉우리들을 배치하는 봉건적 위계질서를
산수화에 반영한 것도 곽희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그러나 사람이 냇가를 걸어가는 모습 등이 개미만하게 표현돼 있는 그의 ‘조춘도’를 보면 거룩한 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가 그림 속의 돌멩이나 폭포, 나무보다 결코 더 귀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바로 얼마 뒤 북송의 휘종황제가 그린 ‘문월도’나 ‘송하관월도’처럼 달을 보고 손짓하는 선비가
나오는 그림에서 보이는 인간이 사용하고 자기 낭만을 반영하는 자연을 그리는 태도와 너무도 달라요.
이 같이 자연의 의미가 바뀌면서 남송 대에 들어오면 화면의 절반 내지 3분의 1을 여백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강조되고 심한 경우 강변에서 낚시하는 모습을 일각(一角)구도로 그린 마원의 ‘한강조어도’처럼 여백이 전체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북송 때 미불이 창안한 여름 산수를 그릴 때 점을 많이 쓰는 미점법(米點法)이나 남송 때 양해가
붓으로 몇가닥의 선을 그려 이태백을 표현한 백묘 또는 감필법, 파묵(破墨)·발묵법(潑墨法), 몰골법(沒骨法)등
동양화의 각종 기법들이 이때부터 하나씩 형성되기 시작하지요.
원나라 때 조맹부는 자연을 이웃집 동산처럼 친숙하게 화면에 끌어들여 표현했어요. 이처럼 위대한 존재인
자연을 그린 산수에서 서정적인 산수로, 다시 조맹부에 의해 친숙한 자연으로 바뀐 산수의 표현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 강남지방에 은거한 황공망·예찬 등 원말 사대가들의 문인화였습니다.
먼 산과 앞 강, 나무, 선비가 사는 집이나 인물 등 18세기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남종문인화의 전형이 이 때
형성됐지요.
명나라에 들어오면 대진 등 저장(浙江)성 출신들이 주축이 된 ‘먹을 강하게 쓰고 자연을 단지 인물의 배경
으로 사용한’ 절파(浙派)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 역전되지만 심주 등 오파(吳派)의 문인
화가들로부터 미친사람 그림 같다고 해서 ‘광태사학(狂態邪學)’이란 비판을 받고 동기창에 의해 남종화
우위론이 나오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17∼18세기에 오면 사왕오운(四王吳?)으로 불리는 직업화가들까지 모두 문인화를 지향하게 되는데,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며 쌓아놨던 교양을 바탕으로 격조높은 정신세계가 우러나온 왕유와 곽희, 황공망,
동기창 등의 문인화가에 비해 직업화가들은 그와 같은 학식이 없이 남종화를 지향하다 보니 그저 형식만
따라가는 것이 돼버리고 말았어요.
19세기 조선에서 박규수가 도화서 화원까지 문인화를 그리는 세태를 비평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반면 명나라 서위나 주원장의 후손으로 청나라 때 팔대산인(八大山人)이란 호로 활약한 주탑, 같은 시대
상업도시 양주(揚州)에서 활약한 8인의 화가를 지칭하는 양주팔괴(揚州八怪)과 석도 등은 주류 문인화와는
다른 개성을 발산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국내로 돌아와 고려말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 잔편은 ‘화원별집’이란 궁중 도화서 소장
화첩에 있던 것으로 조선시대 회화 중 18세기 이전 그림들은 대개 이를 통해 전해진 것들이 많습니다.
일본 덴리(天理)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같이
꿈속에서 복숭아꽃밭을 거닐었던 일을 안견에게 얘기해 그리게 한 것이지요.
곽희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과 안평대군의 발문 및 시, 박팽년·신숙주 등의 시문까지 포함해 전부 펼쳐
놓으면 10m 정도 됩니다.
비단 속에 먹이 스며들어간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견의 그림은 여러 개 전하고 있지만 어떤
그림도 이런 필력을 보여주지 못해 ‘전 안견(傳 安堅)’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같은 시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는 중국 절파화풍의 그림과 똑같습니다.
명나라 절파보다 출현시기가 빠르고 17세기 중국 미술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실린
도상과 같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 사신을 통해 다양한 정보의 교류가 있었고 이 책에 실린 도상이
10세기부터 쭉 내려온 것들을 모아놓은 점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 같은 그림이 나오는게 가능하다고 봐요.
일본 교토 다이겐지(大源寺) 스님 손카이(尊海)가 1539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선물로 받아간 병풍은
‘소상팔경도’ 중 늦가을 동정호에 둥근 달이 뜬 ‘동정추월(洞庭秋月)’과 늦겨울 꽁꽁 언 겨울산하인 ‘강천모설
(江天暮雪)’을 그린 것입니다.
중국 후난(湖南)성 둥팅(洞庭)호 남쪽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아름다운 경치를 사시팔경(四時
八景)으로 묘사한 ‘소상팔경도’는 조선초기부터 많이 그려졌지요.
재일교포 고(故)김용두씨가 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 중에도 ‘소상팔경도’ 8폭의 그림이 있습니다.
남송풍의 그림에 시정적인 것을 집어넣고 곽희풍의 필치가 결합된 이런 그림들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동양화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하나하나 자기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세기부터 1550년 무렵까지의 그림은 우리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대단히 심심하고 변화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겸재 정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광조의 제자인 양팽손의 그림이나 1540년(중종 35년) 이황 등 미원(薇垣·사간원)에 근무한 관리들이 야외
에서 연 계모임 광경을 그린 ‘미원계회도’, ‘호조낭관계회도’ 등도 이 당시 대표작입니다.
16세기초 중국 마원의 화풍을 닮은 노비출신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는 소나무 아래를 걸어가면서 달을 보는
광경을 그린 훌륭한 그림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 전남 영암 도갑사에 있다가 왜구가 훔쳐간 ‘관음32응신도’를 그린 이자실이 이상좌일 가능성이
80% 정도는 됩니다.
15세기 산수화 전통을 불화형식으로 그린 것이지요.
강아지 그림에 있어선 오늘날까지 조선 중종 때 이암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정숙한 여인의 기품과 함께 우리 정서를 표백해주는 느낌을 주지요.
1550년을 넘어 조선중기가 되면 절파화풍이 본격적으로 도입됩니다.
‘동자견려도’와 ‘한림제설도’등을 그린 양송당 김시를 효시로 이숭효·이흥효·이경윤 등이 나와 인간이 자연
보다 앞서는 절파화풍이 유행하고 임진왜란으로 제동이 걸리지만 개성적인 그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정리〓최영창기자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 (7)
연담 김명국과 공재 윤두서
시대를 추월한 화법 ‘神品과 妙品’
조선후기 화가 8명의 전기인 ‘화인열전’(전 2권)을 쓰게 된 것은 저 자신을 비롯, 우리나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에 대해서는 몇 마디 언급을 하면서도 단원 김홍도에 이르면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아는 게 없는 현실이 잘못됐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근 학문조류에 따라 양식분석을 통해 아주 현학적이고 수준 높은 분석력을 보여주는 것을 미술사가의 일로 생각하고 너도나도 그렇게 해서 각광받는 논문을 쓰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서양에서 그런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와 형식사로서의 미술사, 도상학으로서의 미술사가 발달하게 된 근저에는 르네상스시대 이후 축적된 인물사로서의 미술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 반즈앤드노블스 같은 대형서점에 가 보면 인기 있는 책들을 쌓아놓고 ㄱ자로 꺾어진 코너를 볼 수 있는데, 여행책과 전기, 자서전을 모아놓은 곳이지요.
물론 여행책은 단순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같이 수준 높은 기행문학들이 꽂혀있는 곳이며, 전기와 자서전 코너를 통해 오늘날까지 서양 출판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사 또는 전기에 대한 전통과 관심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우리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 서점 속에 있는 전기를 다 찾아 꽂아 놓는다해도 한 쪽 벽 책꽂이를 채울까 말까 하는 양일 거예요.
우리는 이상하게 전기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소설이나 아동문고 외에 이순신을 비롯, 이황, 이이, 박지원, 정약용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주장해온 인문학 푸대접론은 사실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인문학의 기본은 인간을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을 빼버리고 퇴계의 ‘이기이원론’만 말한다거나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의 삶을 빼놓고 생경한 사물로서 미술작품만 언급한다면 현실감도 떨어지고 올바로 이해하는 길도 아니어서 일반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최고 관심은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화인열전’을 쓰면서 연담 김명국부터 시작한 것은 17세기가 됐을 때 비로소 전기로 쓸 만한 작가들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 시대 안견의 경우, ‘몽유도원도’를 그렸다는 사실 외에 전기로 쓸만한 삶 등이 알려진 게 거의 없어요.
17세기(조선중기)에 들어오면 고려대에 소장된 학림정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등에서 볼 수 있듯, 절파화풍의 개성적인 산수인물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농담의 처리와 강약의 대비, 몇 가닥으로 표현한 옷주름 등 필묵을 구사한 솜씨가 돋보이며 선비가 냇가에서 발을 닦는 여유와 한가로움 그리고 고결함을 지키려는 의지를 이 그림을 통해 볼 수 있지요.
이 그림의 도상 자체가 ‘선비가 발 닦는 것은 이렇게 그려라’는 중국 화본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이를 결점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를 흠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것을 개성적인 작가라고 하지만 당시(16세기말~17세기초) 화가들은 ‘고사탁족도’와 같이 누구나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이상인 그림(도상)을 누가 어떻게 더 잘 묘사하느냐를 기준으로 화가의 재능을 평가하던 시대였어요.
동양사상을 흔히 주소(注疏)철학이라 얘기하지만 주희가 집주를 한 사서를 읽어보면 공자·맹자의 말이라기보다 이들을 빌려 주희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았지만 공자와 정이천, 주희가 단 주만 인정받듯이 ‘탁족도’도 조선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렸지만 이경윤의 그림을 능가하지 못해요.
따라서 그의 그림을 가지고 개성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굳이 한계를 지적한다면 이경윤 개인보다는 당시 시대·문화적 환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거나 많은 동자를 데리고 폭포를 보는 그의 산수인물도를 보면 인간의 삶이 주제로 올라가기는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은 고고한 선비 또는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양반계층일 수밖에 없어요.
왕손으로 뛰어난 기량과 고고한 인품을 갖고 있지만 화가로서 얘기할 수 있는 대작이 없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나이 서른도 못돼 요절한 나옹 이정도 천재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으로 유명한데,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지은 ‘나옹애사’란 애절한 추도사가 전하고 있지요.
17세기 들어오면 조선 문인사회에서 ‘일인일기주의’라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주특기를 갖는 것을 멋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회화적 환경이 생겨납니다.
호가 탄은으로 종실인 석양정 이정은 대나무 그림의 대가이며 휴휴당 이계호와 홍수주는 포도에 능했지요. 삼학사 중의 한 명인 오달재와 어몽룡은 매화를 잘그렸고 양송당 김시의 손자인 퇴촌 김식은 죽으나 사나 소만 그렸습니다. 창강 조속은 까치 등 새그림으로 유명해요.
이러한 풍조는 조만간 개성이 강조되는 사회로 가는 준비기로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시기 연담 김명국과 허주 이징이라는 산수화 대가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17세기 그러한 시기에 두 사람의 산수화 대가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연담 김명국이고 한 사람이 허주 이징입니다.
허주 이정
허주 이징은 인조대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분이 비단에 금물로 그린 이금산수에는 궁중화가가 보여줄 수 있는 궁중적 취미가 반영이 되어서 산수인물도가 유행하던 시절이지만 그런 개별적인 개성보다는 대관적인 구도의 안견파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던 것처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다 쥐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풍을 그리고, 그리고 스케일도 크고, 그리고 왕가가 지닐 수 있는 존엄성 같은 것을 담습니다.
이것이 궁중화가의 특징이었던 거죠. 때문에 이 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성이 아니고 기량일 뿐인 거죠. 그리고 그 기량은 무척 출중한 화가였습니다.
연담 김명국
바로 동시대에 정반대되는 사람이 연담 김명국이었습니다. 이 분의 그림은 이렇게 괴발개발 필씨로 해서 그림을 그린 거예요. 얼마나 힘차게 그렸으면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나무줄기를 이렇게까지 그릴 수 있고 옷주름 하나도 고고하게 그리는 것이 없어요. 신선을 그리면서도. 마구 그리죠. 정말로 마구 그리죠. 그런데 그것이 그의 진정한 개성이었던 것입니다.
남태웅이 쓴 청주화사 쪽에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의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면서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 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냥 스스럼없이 그렇게 했다 이것입니다.
비유하건데 허공으로 하늘나라에 꽃이 날리는 듯 눈부시고 황홀해서 형상을 잡아내기 힘들고 바다에서 용이 일어나듯 변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그 변화에 무궁함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오묘하고 크면 클수록 더욱 기발하여 그림에 살이 있으면서도 뼈가 있고 형상을 그리면서도 의식까지 그려냈다.
그 영향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었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를 이룬 바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고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남태웅이 김명국에 대해서 보낸 최고의 찬사입니다. 내가 저것을 흉내 내서 에밀레종은 에밀레종 앞 시대에도 없고 에밀레종 뒤에도 없고 오직 에밀레종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 문장은 저 문장을 그대로 벤치마크해서 집어넣은 것이었습니다.
모름지기 평론은 이 정도 했을 때에 그것은 미술평론이고 미술사였다라고 얘기할 만하죠. 이 분이 몇 년에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1600년 무렵이라고 하는데 그랬다면 30대 중반에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조선통신사를 따라서 가게 됩니다.
조선통신사가 열 두 차례 가는 것은 우리 문화를 일본에 알려주는 것이었고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조선통신사가 올 때 그냥 외교적인 것만 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시 잘 짓는 사람도 가고 글씨 잘 쓰는 사람,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이렇게 동행해서 수행해서 갑니다. 그때 연담 김명국이 거기에서 그린 유명한 달마도라고 하는 그림이 우리에게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연담 김명국이 일본에 갔을 때에 그때 일본에서는 선승화가 대 유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담 김명국이 왔다고 하니까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에 사람들이 그림 받으려고 줄을 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일필 위주로 그려주는데 통신사가 쓴 통신사 일기에 보면 너무 힘들어서 연담 김명국이 울려고 그랬다.
그래서 그로부터 10년 후에 다시 조선통신사가 갈 때 일본 정부에서는 ‘이번에 올 때에는, 이번에 통신사가 올 때 다른 것은 몰라도 화가는 연담 김명국 같은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해서 그 두 번째 갈 때에는 연담 김명국하고 한시각하고 둘이 갑니다.
일본, "조선통신사 올때 김명국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
나는 이것에 대한 해석이 본래 화가가 갔을 때 그 화가의 임무는 민간 외교 차원에서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보는 풍물들을 그림으로 기록화로 그려 주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본업보다도 별도의 업이 훨씬 더 인기를 얻으니까 아예 두 명을 보내주게 됩니다. 조선통신사 12번의 역사 속에서 두 명의 화원이 간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사람은 호생관 최북이 갈 때에 둘이 갔다 하는데 그때 호생관은 관에서 가는 자격으로 간 것이 아니라 거기 가는 수행원의 개인비서 수행원 자격으로 간 것이었지 공식적인 것으로 간 것이 아니었으니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둘을 보낸 것은 이때 였습니다.
이때에 그 일화가 여러 가지 있는 중에 김명국이 워낙에 술을 좋아해서 이 분이 미술사에 나온 사람 중에서 술을 제일 잘 마시는 사람이 연담 김명국 다음에 오원 장승업 그 다음에 호생관 최북입니다. 세 사람 한번 맞추어 놓으면 누가 더 잘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엄청난 술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술에 대해서는 수많은 얘기, 일화를 남겼는데 예술의 촉매제로서의 술이라고 창작의 촉매제로서의 술이라고 그랬어요. 연담 김명국에 대해서 남태웅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직 술에는 취하고 싶으나 아직 덜 취한 상태, 욕취나 미취지간에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이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이 덜 취해서 그린 것이나 아주 취해서 그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서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섞여있는 것과 같았다. 욕취나 미취지간에 잘 그렸다. 참 그게 인간의 심리까지 얼마나 이렇게 멋있게...
영남에 어느 사찰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나도 영남 지역에만 오면 내가 지옥도 혹시 이것이 김명국이 그린 지옥도가 아닐까해서 지장전에 있는 지옥도는 꼭 보는데, 한 스님이 김명국한테 와서 지옥도를 하나 그려달라고 그래놓으니까 술을 가져오라고 그래서 술 마시는 거예요. 비단을 갖다 놓고. 그리고 일주일 있다가 가보면 또 안 그렸어요. 술을 가져와야 그리지 않냐고 그렇게 술을 마셔서 그리는데 나중에는 이번에 딱 한 말만 마시면 내가 그린다고, 그래서 한 말을 가져다 줬더니 진짜 마시고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도를 그렸는데 지옥도라고 하는 것이 염라대왕 밑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고 있는 그림이잖아요. 그것을 그렸는데 스님이 다 그렸다고 해서 와서 보니까 분명히 큰 그림에다 지옥도를 그렸는데 그 주리 틀리고 화탕에 들어가고 하는 벌 받고 있는 사람을 전부 중으로 그려 놓은 거예요.
이 사람이. 그래서 그 영남의 스님이 난리를 치면서 남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냐고 다 물어내라고 그랬더니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하냐고 술만 한 말 사오라고 그래서 술을 한 말 사왔더니 스님의 머리에다 다 머리카락을 그려서 민간으로 환원을 시켜줬다고 지금도 그게 큰 볼 거리였다라고 하는 증언이 남태웅의 글 속에 나옵니다.
이런 분이 다이묘 대명 집에 초대 받아서 일본의 장병화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금물을 가루로 내어서 금물을 그림으로 벽에 도쿠노마 옆에 이쪽에 보면 적산덕산라고 할까 옷이 이렇게 되다가 앞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가서도 버릇이 그대로 되어서 술이 취해야 그린다고 그래서 술을 있는 대로 마시더니 빨리 그리라고 그랬더니 이 분이, 연담이 금물을 탄 이 그릇을 입으로 술 마시듯이 마시더니 양치질을 하듯이 벽에다 뱉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라이가 남을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느냐고 칼을 뽑아서가니까 이렇게 성격이 급하냐고 그리고서는 그 다음에 붓을 채워서 그림을 그리니까 튀어나간 자리는 절벽이 되고 튀어나간 곳은 나뭇가지의 잎이 되고 무엇이 되어서 순식간에 황홀한 산수화가 전개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조선통신사가 가면 그 집에 가서 보는 것이 하나의 큰 볼거리가 되었고, 그 대명의 아들은 소문이 나서 유명해지니까 그 다음부터 입장료를 받아서 원가를 다 뺐다. 그 얘기가 김명국의 그곳에 나옵니다. 바로 그런 기개로 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유행하지 않았던 선승화가 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고, 지금 들어온 연담 그림들은 다 일본에 그려뒀던 것이 전해서 들어온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전해지는 것은 남태웅 얘기대로 용과 지렁이가 섞여있는 속에 용은 몇 개 없고 대개 지렁이 같이 술이 덜 취해서 그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취해서 그린 것 그렇게 나옵니다.
돌아가신 동주 선생이 그 그림 평할 때 연담 그림이라고 봤더니 ‘아직 덜 취했어. 덜 취해서 그린 거야’ 맨 날 평할 때 그렇게 또 연담 그림이라고 와서 그렇게 보니까 ‘연담은 연담인데 아마 대 취해서 그린 것인가 보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 분의 삶의 스토리가 그러니까요.
그릴 때 술 취한 정도에 따라 연담의 그림은 필력 달라져
내가 화인열전을 펴내고 이 그림을 그냥 도사, 지팡이를 짚고 가는 도사의 그림이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이 시도 제대로 번역을 하지 못해서 기존에 있는 그 시를 번역을 한 것을 가지고 따랐는데 내 친구이기도 한 연세 대학교 철학과의 이광호 교수가 이 시를 다시 해석을 하고서 나한테 한밤중에 전화를 했어요. 이것이 연담의 죽음의 자화상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두건을 쓰고 그리고 지팡이 짚고서 황천길로 가는 그 모습을 그린 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화상을 그렸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유명하지만 자기가 죽음의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은 몇 사람 있었을까? 또 그것도 지금 난 딱 둘 봐요. 죽음의 자화상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구름 위에 연꽃에 앉아서 멀리 극락세계로 가고 있는 꿈의 자화상 같은 거죠. 그걸 그렸어요.
단원은 그래도 고결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또 그의 마음대로 극락세계에 가는 것을 희망하는 그 구름 속에서 연 봉우리에 앉아가는 모습을 그렸지만 연담 김명국 술꾼이고 천한 인생으로 살았던 이 사람은 내가 가봐야 지옥밖에 더 가겠어? 하는 그런 심정으로 해서 황천길로 가는 이런 그림을 그린 걸 보면 참 그분의 기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얘기하죠.
공재 윤두서
공재 윤두서 이 분이 1668년에 태어나서 17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본래 이 그림이 효수 당한 머리처럼 나온 것이 아니고 여기에 초본으로 옷주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런데 나중에 후대에 보수하면서 그 주름을 빼 버리니까 얼굴만 나왔는데 그 얼굴이 훨씬 더 그림으로서의 효과가 부상이 됐고 우리나라 회화 중에서는 드물게 국보로, 보물을 넘어서 국보로 지정을 하게 됩니다.
이 분의 일생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 이 분이 해남 윤씨 집안의 사람으로 다른 것은 모든 걸 떠나서 한 마디로 얘기하면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 되는 분입니다. 이 집안의 혈통이 어디인지 알겠죠. 그런데 고산 윤선도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이제 노론전권시대로 들어간 다음에는 남인 쪽은 출세를 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20살 때까지 지내는 동안에 진사까지는 들어가죠. 하고 나는데 고시 1차 고시 합격하면 뭐해요? 보직을 안 주는데. 거기에다가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집안에서 윤선도 집안에서 대가 끊기니까 집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구를 양자로 들일까 하는 것을 전부다 주역으로 점을 쳤더니 공재 윤두서가 제일 나을 것 같다 그래서 공재로 해서 자기 양가집으로 들어갔는데 이 분이 계속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파란만장한 것이 아니고 그냥 인생을 살다가 지치는 거예요.
이 분이 성호 이익의 선배였는데 성호가 공재가 죽고 난 다음에 공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어디 가서 물어볼 곳이 없었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하고 굉장히 친했습니다. 아주 제일 친한 친구를 꼽으라면 옥동 이서였어요.
그리고 녹우당이라고 해남에 있는 해남 윤씨 집안에 있는 녹우당에 가면 거기의 녹우당이라는 것도 옥동 이서가 써 준 것인데 이 분이 실학적인 그런 입장이 있어서 지금도 동국여지지도라고 하는 동국여지지도 채색 본으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이 공재 윤두서가 그 집안에 전해지는 공재가 그린 지도입니다.
이것하고 아울러서 일본 지도도 그린 것이 있어요. 또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전부 불타서 없어진 것 중에 ‘기졸’이라는 책 하나가 남았는데 거기에 보면 병법에 관한 것에서부터 천문으로 해서 모든 아주 백과사전적인 그런 실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는 전부 성호 이익의 저서 속에서 많은 양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실학의 줄기가 반계 유형원에서 성호 이익으로 해서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데 반계 유형원에서부터 성호 이익 사이가 굉장히 멀어요. 80년 이상 돼요. 그 공백은 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공재 윤두서였다고 하는 것을 공재의 글로 알 수가 있습니다.
녹우당에 있는 동국여지지도 채색본이 윤두서 그림
해남 윤씨 종갓집에 가면 공재가 그린 것 중에 목기 깎는 기계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새로운 기계가 들어와서 나무를 여기에 대고 피대를 발로 돌려서 이렇게 그릇을 깎는 발로 돌리는데 이다음에 볼 관아재 조영석 때는 이렇게 팔로 돌리는 것으로 그리더라고요. 선거라고 하는 공재가 선거도를 갖다가 그냥 재미삼아 그렸다라고 하는데 이런 실학적인 관심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 분이 또 팔주마도를 그리는데 남태웅의 증언에 의하면 공재는 그림을 누구한테 배운 바 없고 당시화보, 고시화보 중국에서 나오는 그림 목판본의 그림책을 보고서 스스로 그림을 익혀 가는데 그것만 익힌 것이 아니고 마구간에서 하루 종일 말을 보고 그것을 스케치하고 나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땅바닥을 쫓아 그리면서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의 평면이 될 때는 어떻게 되는가를 탐구하고, 그리고 머슴아를 보고 손 들어봐라 하고 모델을 서게 해서 그것을 스케치하면서 미세한 것을 다 그리게 해서 아주 조금만 것 세필까지 무척 차별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중국의 조그만 세필로 그리는 인물화들도 그렇게 연습을 해서 자기 기량을 닦습니다.
군마도
그랬던 공재 윤두서가 나이 50 못돼서 세상을 떠났는데 45살 되어서 해남 녹우당으로 낙향을 해버리게 됩니다. 서울에서 사직동하고 종로사이의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던 것을 다 청산하고 녹우당이라고 해남의 이 집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 녹우당에 내려와서 이 분이 그림을 그리는데 이와 같이 짚신 삼는 노인을 그립니다.
짚신삼기
이 짚신 삼는 노인. 이제까지 한국 미술사에서 서민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탄생하는 첫 번째 그림입니다. 이것이 그림 속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유럽의 역사 속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브리겔 같은 사람이 있을 때 나오고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르낭 같은 사람이 감자를 굽는 가족들이 먹는 그림 이런 것을 그린 것은 17세기 와서 그린 것이고 프랑스 혁명 다 됐을 때의 그림입니다. 민중에 대한 시각과 애정을 갖지 않은 상태 속에서는 절대로 서민이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술병을 차고 졸고 있는 노인네를 그리는 것이 선비를 그리는 것이 고사가 발 닦는 그림이라든지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죠. 선비가 졸고 있어요. 그러던 것을 바로 저 자리에 선비가 졸고 있던 것을 빼 버리고 짚신 삼는 영감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 한순간을 벗어난다는 게 힘들어요. 그것을 벗기려면 고사 선비만 빼 낼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나무도 빼 버려야죠. 그래서 동네 풍경을 그리던지 아예 그리지 말아야지. 그러니까 내가 공재에 대해서 그린 것은 현실을 그렸다기보다는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화가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배경 없애 서민적인 분위기를 낸 것은 단원 김홍도
그러니까 상황 설정이 맞지 않는 것은 그림 속에 현실을 넣으니까 이와 같은 일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얘기로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리는데 뒤에 있는 관념적인 산수화 이 새는 또 왜 그려서 갑자기 졸린 그림으로 전환을 하게 만듭니까? 바로 이와 같은 서민의 모습을 그리면서 배경을 전부 없애면서 서민적인 분위기를 낸 것은 단원 김홍도였습니다.
단원 김홍도까지 가는데 우리는 또 다른 60년 7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단원 김홍도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김홍도가 태어나기 위한 그 많은 준비가 공재 윤두서에서 관아재 조영석을 거쳐서 그렇게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태웅의 청죽화사 중에는 세 화가를 비유해서 평함이라고 하는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지금 봤던 김명국, 이징, 윤두서 세 사람을 비교해서 평을 해요. 자기가 청죽화사, 청죽은 이 사람 호에요. 이 사람이 쓰는 미술사라는 뜻입니다. 회화사라는 뜻이에요. 청죽이 쓰는 회화사. 그 마지막에 그동안에 자기가 미술사에서 봤던 지식들을 다 쓰고 그 다음에 이 논문을 쓰고 그 뒤에는 이제까지 있었던 미술평론에 관해서 중요한 것을 베껴 썼어요.
그런데 그곳에 이 문장이 이렇게 나옵니다. 문장가의 삼품이 있는데 신품, 법품, 묘품이 그것이다. 아주 귀신 신자, 신들린 듯이 그리는 것이 있고, 법대로 그리는 것이 있고, 절묘하게 그리는 것이 있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해서 말하면 김명국은 신품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에 가깝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 사람이 절대 신품이다라고 안 하잖아요. 신품에 가깝고 법품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에 가깝다. 그래야지 빠져나갈 구멍이 확실하게 있고 단정적으로... 이것을 학문에 비유하자면 김명국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 생이지지자고,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자 학이지지자고,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자 곤이지지자다.
이것은 공자님 말씀에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공자님 말씀보다 남태웅의 말씀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 다음 문장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며 매한가지다. 천재만이 최고가 아닌 거예요. 그래야 인생이 살만 하지, 천재만이 최고라 그러면 우리 같은 인생들은 어떻게 하라는 얘기에요. 생이지지든 학이지지든 곤이지지든 이루어주면 마찬가지죠.
그것은. 이것을 또한 우리나라 서예가에 비유해서 말하면 김명국은 봉래 양사언 같이 막 휘둘러서 금강산에 가서 글을 써댄 봉래 양사언. 이징은 한석봉, 떡장수 아들 글 쓸 때 떡 또박또박 써는 것하고 그것이잖아요. 윤두서의 그림은 안평대군 이용의 그림처럼 아주 고아하고 선명하고 절묘함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김명국의 폐단은 거칠음에 있고 이징의 폐단은 좀 속된 데가 있고 윤두서의 폐단은 작은 데 있다. 그런데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가 없다. 이징의 경우에는 그것이 한계다. 이런 얘기입니다.
김명국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윤두서는 배울 수는 있으나 그렇게 이루기가 힘들고 이징은 배울 수 있는 또한 가능하다. 그러니까 신품, 묘품, 법품의 그 경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명국은 혜성의 신기루처럼 결구가 아득하고 기틀이 공교롭고 아주 신통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 제작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다. 떠도는 것이 일정치 않고 보이고 사라지는 것이 무상하여 그 방향을 가리킬 수 없다. 바라보면 있으나 다가가면 없어지니 그 멀고 가까움은 측량할 수가 없다. 이처럼 찾아서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고 황홀해서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것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김명국의 그림을 보면 그렇게 아주 황홀한 그런 경지로 간다는 거예요.
윤두서는 마치 노나라 때 아주 명장인 공수반이 끌을 가지고 사람 상을 만드는 것 같아서 이 사람이 아주 조각을 잘해서 이 사람이 만든 조각은 막 살아서 움직인대요. 그런 경지를 얘기하는 거예요. 먼저 몸체와 손발을 만들고 다음에 이목구비를 새기는데 아주 공교롭게 하고 극히 교묘하게 본떠서 터럭하나 사람과 다르지 않게 하면서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껴 그 가운데 엔진을 설치해서 스스로 발동하게끔 함으로써 손은 쥘 수 있고 발은 걷고 달릴 수 있고 눈은 꿈쩍거릴 수 있고 입은 열고 벌릴 수 있게 한 다음에야 참 모습과 가상이 서로 뒤엉키는 조화로움까지 얻어낸 것 같다. 그러니까 엔진이 발동하기 이전까지는 아직 배울 수 있으나 그 이후는 보통 사람은 불가능 할 것이다. 알겠죠?
이징은 마치 대 목수가 방을 만들고 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짜임새가 법도의 틀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고 컴퍼스와 자로 네모와 원을 만들고 먹줄로 수평과 수직을 맞추어 대단한 설계와 대단한 기교를 쓰지 않고도 작업을 마치고 보면 그 규모가 가지런하고 어디 한 군데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것은 모두가 인공이 미칠 수 있는 바이다. 그래서 배울 수 있고 또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뒤에도 글이 쭉 많습니다만 그것은 내 책을 사서 보십시오.
한 가지 말씀드리면 이것이 18세기 진짜 우리의 회화의 전성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모든 준비 작업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워밍업이 여기에서 끝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재 윤두서를 평할 때 어떤 사람은 중기의 작가로 넣고 어떤 사람은 후기의 첫 머리에 넣습니다.
그 분의 그림으로 보면 아직 중기적 요소가 남아 있고 또 후기를 시작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 분을 중기로 넣을 것이냐 후기로 넣을 것이냐하는 것에서 학자마다 견해를 달리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당연히 그것은 후기 그림의 선구자로 넣어야 된다고 그러니까 구시대의 막내이자 새시대의 형님인 분이 공재 윤두서였습니다.
허주 이징
학림정 이경윤의 서자인 허주 이징은 아버지와 함께 인조의 총애를 받아 궁중에 불려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비단에 금물로 그린 그의 ‘이금산수도’를 보면 개별적인 개성보다는 대관적(大觀的)인 구도의 안견파 그림이 보여주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담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풍을, 또 스케일도 크고 왕가가 지닐 수 있는 존엄성 같은 것을 담고 있지요. 이는 궁중화가의 특징으로 이징에게 있어 중요했던 것은 개성이 아니고 기량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기량은 매우 출중한 화가였습니다.
연담 김명국
바로 동시대에 정반대되는 사람이 연담 김명국입니다. 그는 나무줄기나 옷주름, 신선 등 할것 없이 괴발개발로 마구 그렸는데, 바로 이 점이 그의 진정한 개성이었어요. 우리나라 미술평론 중 최초의 글다운 글이 남태응(1687~1740)이 쓴 ‘청죽화사(聽竹畵史)’입니다.
바로 여기에 김명국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 아님이 없었다. (…)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一家)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남태응이 김명국에 대해서 보낸 최고의 찬사입니다. 모름지기 평론은 이 정도 했을 때에 그것이 미술평론이고 미술사였다 얘기할 만한 것이지요.
1600년 무렵 태어난 김명국은 1636년 30대 중반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당시 그가 그린 ‘달마도’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선승화(禪僧畵)가 대유행이던 당시 일본에서 김명국은 통신사 숙소에 사람들이 그림을 받기 위해 줄을 설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괴로움으로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예요. 1643년 다시 통신사를 파견할 때도 일본측의 요청으로 김명국과 한시각 등 두 명의 화원이 가게 되는데 12번의 조선통신사 행차에서 화원이 두 명 간 예와 한 화원이 두 번 간 예는 김명국밖에 없습니다.
김명국은 우리 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술을 잘 마신 화가 중의 한명답게 ‘명사도(冥司圖·지옥도)’와 일본 대갓집의 벽화 이야기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요. 남태응은 “김명국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는 평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김명국의 선승화는 일본에서 그렸던 게 전해져 들어온 게 대부분이고 국내에 전하는 그림들은 남태응의 말대로 용은 몇 개 없어요. 이 중 제가 ‘화인열전’을 처음 쓸 때 지팡이를 짚고 가는 도사를 그린 것으로 이해한 그림의 시를 연세대 철학과의 이광호 교수가 다시 해석한 결과 연담 자신의 ‘죽음의 자화상’으로 밝혀졌습니다. 술꾼으로 천한 인생을 살았던 김명국이 “내가 가봐야 지옥밖에 더 가겠느냐”는 심정으로 그린 것으로 그의 기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지요.
윤두서
1668년 태어나 1715년 세상을 떠난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후대 보수하는 과정에서 옷주름을 빼버려 얼굴만 남게 됐는데, 그림으로서의 효과가 더 크게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초상화 중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지요. 해남 윤씨인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노론 전권시대로 들어가 남인의 출사가 배제되면서 진사로 일생을 마치는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매우 친해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 현판도 이서가 써 준 것이지요. 공재가 그린 ‘동국여지지도’나 두 권 중 한 권만 전하는 그의 저서 ‘기졸(記拙)’을 보면 병법·천문 등 백과전서적인 실학의 학풍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가 가지고 있던 관심사가 성호 이익의 저서 속에 많은 양으로 나오게 되지요. 반계 유형원에서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실학의 줄기 중 반계와 성호 사이에 공재 윤두서가 있었던 거예요. 해남 윤씨 종갓집에 있는 목기 깎는 기계를 그린 그림에서도 실학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군마도’ 등 말의 갖가지 형태도 즐겨 그렸지요.
남태응의 증언에 따르면 공재는 그림을 누구한테 배운 바 없고 ‘고씨화보’ ‘당시화보’ 등 중국에서 나온 남종문인화의 성과를 담은 목판본의 그림책을 보고 스스로 익혔어요. 또 마구간에서 하루종일 말을 보면서 스케치하고 나무 그림자의 변화를 탐구하며 머슴을 모델로 세워 미세한 것 까지 스케치하고 중국의 세필로 그린 인물화를 연습하면서 자기 기량을 닦았습니다.
45세에 해남 녹우당으로 낙향한 뒤 그린 짚신 삼는 노인 그림은 한국미술사에서 서민이 주인공으로 탄생한 첫번째 그림이지요. 다만 노인 뒤에 ‘고사탁족도’에 보이는 나무가 그대로 있는 점을 볼 때 공재는 현실을 그렸다기보다는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엄청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서민의 모습을 그리되 상황설정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산수화의 배경까지 전부 없애 서민적인 분위기를 낸 것은 60~70년 뒤인 단원 김홍도에 와서 이뤄져요. 비록 한계는 있지만 저는 윤두서를 18세기 우리 회화의 전성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중기의 작가라기보다는 후기 그림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남태응의 ‘청죽화사’ 중 ‘세 화가를 비유하여 평함’이란 유명한 글이 있지요. “김명국은 신품(神品)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法品)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妙品)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린 뒤 세 화가의 특징을 우리나라 서예가에 비유하고 각각의 폐단과 장점을 말하고 있는데 ‘화인열전’에 전문이 번역돼 있습니다.
[정리〓최영창기자]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8)
겸재 정선 감동 녹아있는 풍경화 ‘진경산수’ 완성
관아재 조영석
조선회화의 전성기인 18세기의 문을 연 것이 공재 윤두서냐 관아재 조영석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저는 윤두서가 문을 열어놓았고 조영석이 그 길을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석(1686~1761)은 함안조씨 집안의 문인으로 겸재 정선보다 10세 연하이면서도 서울 순화동에 함께 살며 서로 존경하는 친구이자 그림과 시의 벗으로 지냈어요.
원래 조영석 자신보다 당대에는 큰형인 조영복이 역사상 훨씬 더 유명했는데 나중에 예술로 이름을 크게 남겨 우리들에게 ‘조영복은 조영석의 형이다’라는 식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조영복이 영춘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1724년 조영석이 찾아 뵙고 형의 초상화를 그렸지요. 선비화가가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평상복에 두 손을 모두 표현해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등 화원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나타나는 공식적인 룰로부터 벗어나 있는 게 특징이에요.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그림을 그려 먹고 사는 것은 환쟁이의 일이었어요. 따라서 지식인들이 시·서·화를 함께 즐기는 교양의 하나로 할 때는 그 그림의 가치가 올라가지만 이것을 쟁이의 것으로 보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확실하게 구별해 놓는 게 당시 조선시대 사회의 분위기였고 딜레마이기도 했습니다.
예술과 기능을 천시한 당시 선비들에게 이쪽에 종사하거나 그러한 재주를 보이는 것은 흠이 되기 때문에 조영석도 그 점에서 상당히 조심했지요. 결국 세조와 숙종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1735년 의령 현감으로 있던 조영석은 영조가 세조 어진 감동(감독관)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지체하며 올라가지 않아 의금부에 하옥됐다 풀려났으며 1748년 숙종의 어진을 모사할 때도 끝까지 붓을 잡는 것을 거부했지요.
당시 조영석의 이런 행동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이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선비로서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며 취미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환쟁이가 하는 일을 하고서 어떻게 사대부들과 이빨을(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해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함안조씨 집안에 조영석이 그린 스케치 14점을 모아 엮은 ‘사제첩(麝臍帖)’이 전합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을 의미하지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배꼽을 물어 뜯는다는 사향노루처럼 이 스케치북이 조영석 자신에게는 향기로운 것일지 몰라도 남에게 책을 잡히게 될 소지가 있다는 뜻에서 썼던 것이에요.
제목 바로 옆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물시인 범자 비오자손·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준엄한 경고를 해놓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스케치 중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새참’이에요.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새참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는 애정이 느껴집니다. 양반들이 작당해 소젖을 짜고 있는 ‘우유짜기’는 모성애를 자극해 어미소의 젖이 나오게 하기 위해 송아지를 붙잡아와 어미 얼굴에 들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요.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중 '선비'부분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115.0×57.0㎝ 개인소장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중 '동자'부분)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115.0×57.0㎝ 개인소장
설중방우도는 원래 송(宋)의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신하 조보(趙普)의 집을 방문하여 나라일을 의논하였다는 일화를 조선화하여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조영석이 말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여 환담을 나누고 있다. 복건을 쓴 주인과 갓을 쓴 손님은 이미 사랑방에 좌정하였고, 시동들은 손님이 타고 온 소를 집 안에 들이기에 바쁘다. 사선 방향의 뒷산과 자유로운 곡선으로 묘사된 소나무 및 매화나무와는 대조적으로 집과 담이 수평 방향으로 배치되어 안정을 꾀하였고, 전경의 시동들의 자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두 선비의 자세는 꼿꼿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구성과 표현은 선비의 고아한 모임을 돋보이게 하는 배려로 생각된다. 인물의 묘법은 강하고 날카로운 선묘로 자세히 묘사되었고, 마당의 나무는 입체감이 강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에 채색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사실적이고 견고한 양감을 느끼게 한다. 조영석은 사인풍속의 사의적인 화풍에서 점차 사실성이 강하고 조형성이 풍부한 화풍으로 바꾸어 나간 것이다.
조영석의 명작 중 ‘설중방우도’는 눈 덮인 겨울날 방한모를 쓰고 찾아온 친구와 서재에서 고담준론을 하고 있는 선비들의 품위있는 모습과 머슴들끼리 반가워하며 손님이 타고 온 소를 끌고 가는 서민들의 풍경이 조화를 이룬 그림입니다. 환쟁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법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고아한 품격이 함께 담겨 있지요.
겸재 정선
이규상이 지은 18세기 인물지 ‘일몽고(一夢稿)’에서 화가를 원법(院法·화원의 화법)과 유법(儒法·선비들의 화법)을 구사하는 두 파로 나눈 뒤 “조영석은 원법을 갖고 유화(儒畵)의 정채함을 제대로 펼쳐내고 있다”며 “우리나라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지요.
금강산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지만 실제 금강산을 모티브로 조선 산수화를 정형화한 것은 시작도 끝도 겸재 정선(1676~1759)의 몫이었습니다. 그가 1711년 처음 금강산에 갔다 온 뒤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의 그림들은 헬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본 것 같은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로봉·혈망봉·월출봉 하는 식으로 봉우리마다 이름도 써놨지요. 그러다가 이것을 더욱 세련되게 하고 중국의 화법들을 자기화해 59세때(1734년) ‘금강전도’를 그리는데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동주 이용희 선생이 진경산수와 실경산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실경은 있는 것을 사진 찍듯이 그린 거라면 진경산수는 그 산에서 봤던 감동까지 회화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가들은 실경에 얽매여 정작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선과 금강산에 동행했던 시인 사천 이병연의 얘기를 들으면 그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갔으면서도 붓은 하나도 안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가슴 속에 진경을 담아서 화폭에 펼쳐낸 것, 아마 이 점이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는 요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락한 양반출신의 선비화가인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우위를 비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60세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와 달리 정선은 60세가 될 때 비로소 진경산수의 경지에 오른 뒤 이후 84세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노필(老筆)로 무르익은 그림들을 그리는 게 특징이에요.
낙관 자체를 겸재 노인이란 뜻으로 겸로(謙老)라고 한 ‘정양사도’를 보면 근경의 정양사와 원경의 일만이천 봉우리가 대비되면서 사실상 ‘금강전도’가 됐습니다. 섬세하고 치밀힌 필치를 보여주는 중년과 달리 노년으로 갈수록 정수만 묘사하고 색채도 밝은 것 몇가지만 사용하지만 원숙한 경지와 함께 중년의 작품을 능가하는 감동을 주지요.
사실 저는 정선이 젊은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김홍도처럼 타고난 화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고 닦고 훈련하고 자기의 혼을 집어넣어 환갑이 됐을 때 자기 형식을 만들어낸 뒤 다시 2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원숙한 그림을 그려낸 대기만성의 모습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 낳게 하는 것이지요.
먹의 번지기 등이 막 그린 것처럼 보여도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정선 그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부친 발문에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해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라고 평한 조영석의 찬사가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산수를 그리는데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무색케 하는 ‘노백도’‘함흥본궁도’등의 소나무 그림과 70대 중반에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정선의 원숙한 기량이 십분 발휘된 대표작입니다.
현재 심사정
현재 심사정(1707~1769)은 정선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를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개척한 분인데 참 불우했어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만사 심지원의 증손으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부정 사건과 왕세제였던 연잉군(후에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에서 하루 아침에 패륜가에 대역죄인의 집안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할 길은 막혔지만 그림 재주가 있어 이로 이름을 남겼는데 자신의 처지처럼 어두운 분위기에 애잔한 그림을 많이 남겼지요. ‘강상야박도’ 같은 산수화나 ‘파초와 잠자리’ ‘딱따구리’ 등의 화조·조충도 등이 모두 이런 분위기를 전합니다.
심사정의 그림을 모화사상에 젖어 있다고 하며 폄하한 때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에서 봤을 때 심사정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18세기 우리 조선 화단이 갖고 있었던 건강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능호관 이인상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인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조부인 이경여가 노론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지요.
43세때 음죽 현감을 그만둔 뒤 단양에 은거하려다 노친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장호원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덮인 낙랑장송을 그린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만 아니라 기교는 조금도 강조되지 않는 묘한 인상을 풍깁니다.
선비 그림의 본도(本道)는 그림에 기량·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림에 능하면서도 절대 기교가 능하지 않은 인상을 줘야 하는 것이지요. 문인화가 화풍이 아니면서 문인화의 경지를 완전히 자기 삶 속에서 녹여서 만들어낸 것이 이인상이었다고 보입니다. 최고의 높은 경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호생관 최북
호생관 최북(1712~1786)은 당대의 기인으로 ‘공산무인도’와 ‘풍설야귀인’처럼 기이하고 개성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중인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인 북녘 북(北)자를 둘로 쪼개서 칠칠(七七)을 자로 삼아 스스로 ‘칠칠’이라고 했던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성격이 모질어 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 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스스로 지은 그는 말 그대로 그림을 팔아먹고 사느라 작품을 남발했어요. 그러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사러오면 팔지 않는 등 그의 비위를 맞추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한 귀인(貴人)이 부탁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다고 최북을 협박하자 자기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돋보기 안경도 한 알만 사서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여행하고 만주벌 너머 흑룡강까지 들어갔다 오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적을 보인 그는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서 잠들었다가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죽고 말았어요. 도저히 세상이 갖고 있는 룰 속에 못들어간 것이 그의 인생이었지만, 미술사에서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고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출처] : <문화유산을 보는 눈> 겸재 정선 감동 녹아있는 풍경화 ‘진경산수’ 완성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