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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근친결혼
“유전질환이 유럽 최고 가문의 종말을 초래”
피렌체를 다스렸던 메디치 가문과 함께 유럽 최대 가문으로 손꼽히는 합스부르크 왕조.
이 왕조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제국 등 중앙유럽을 비롯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이르기까지 힘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가문을 지탱할 손(孫)이 끊기면서 부르봉 왕조에 바통을 넘겨주고 몰락하고 만다.
전쟁이나 반란이 아니라 대(代)가 끊겨 몰락한 보기 드문 왕조다.
최근 스페인의 한 과학자가 합스부르크가의 혈통을 유심히 조사한 끝에 이 왕가의 몰락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가 최근 보도한 내용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와 함께 정리해서 싣는다.
“Let others wage wars, but you, happy Austria, shall marry”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게 만들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
이는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전쟁이 아닌 결혼정책으로 외교에 성공했다는 말을 의미한다.
짓궂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전쟁 같은 힘들고 피 흘리는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결혼으로 당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접수하고, 승리의 영광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결혼정책은 대단히 성공했다. 무려 600년이나 그 힘을 발휘했다.
신성로마황제 직위를 싹쓸이 했는가 하면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며 자주 마찰을 빚었던 프랑스의 프랑코 왕국을 제외하고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다시 말해서 전 지역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이 계속 나왔다.
그들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기에 앞서 위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가문에 순종하여 충성할 수밖에 없다.
면밀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결혼정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 나오지 않은 세력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왕을 배출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전역을 가문의 지배하에 두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가문의 딸들을 프랑스의 왕들과 결혼시켰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왕비 엘레오노레를 비롯해 6명이 합스부르크 출신이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사치와 허영의 극치를 대표하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그에 대한 편견도 사실은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녀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남편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의 대를 이을 둘째 아들 루이 17세조차 굶어 죽는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를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혁명의 불길은 어떻게 끌 수가 없었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두 번이나 왕궁을 떠나야 했다.
그러면서 결코 나폴레옹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폴레옹을 미워했다.
1821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음을 앞둔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이런 유서를 보냈다.
“사랑하는 마리 루이즈, 나의 심장을 꼭 보관해 주길 바라오. 나의 진정한 소원이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귀양을 갔을 때
다른 백작과 바람이 나 아들까지 낳은 루이즈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나의 소원은 당신의 심장이 당신과 함께 당신 무덤에 묻히는 것이오.”
이에 앞서 루이 14세 왕비로서 ‘추녀’로,
그리고 ‘주걱턱’으로 소문난 마리아 테레사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한심할 정도로 멍청했다고 전해진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멀리 떨어진 강력한 스페인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근친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혼인으로 혈통은 계속 꼬여만 갔다. 유전자는 더욱 병들어만 갔다.
마리아 테레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모의 아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그녀는 주걱턱 왕비로도 불렸다.
주걱턱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물림을 통한 유전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어쨌든 얽히고 설키는 결혼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6세기 동안이나 유럽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근친결혼 정책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유전인자가 병들어 가면서 유전질환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알바레스 교수 “근친혼에 따른 유전질환으로 代 끊겨”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을 근친혼 탓이라고 밝혀낸 학자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교수다.
그는 16세기부터 무려 200여 년간 대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이
친척들과 근친결혼을 고집했기 때문에
결국 유전질환으로 혈통이 끊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앙유럽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알바레스 교수는 1700년 혈통이 끊겨, 결국 브르봉 왕조에 바통을 넘겨준
스페인 왕조에 초점을 맞춰 연구했다.
한 왕조의 힘을 굳건히 지탱하기 위해 정치에서 결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과 제후, 또는 영주나 신하는 결혼을 통해 서로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할 수 있다.
서로 간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지방영주는 중앙정부로부터 안전을, 왕이 통제하는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란이나 호족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려를 세운 왕건도 사실 호족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무려 60명이 넘는 부인을 거느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결혼정책으로 초창기에 권력을 유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좀 달랐다.
권력 초창기뿐만 아니라 최고로 번창했을 때도 계속 결혼정책을 밀고 나갔다.
합스부르르크 가문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결국 결혼은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혈통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그러한 가운데서
‘친족’이라는 구실을 이용해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은 하나’에서 출발해 오늘날 유럽연합 EU가 탄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럽을 지배한 고대 로마제국을 든다.
그리고 기독교를 든다.
로마와 기독교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자면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커다란 영토를 하나의 왕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구나 왕실 간의 결혼으로 소위 ‘이질적인 민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 친척이라는 개념이 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인 카를로스는
1519년에 신성 로마 황제가 되어
이탈리아 영토와 식민지를 물려받음으로써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정치적주역이 되었다.
카를로스 1세를 계승한 펠리페 2세에서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관료조직을 완비하여 국가질서의 수립에 정진하는 한편,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이루어
식민지 정책에서 스페인의 주도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모직물에 상권을 영국과 네델란드 빼앗기면서 국내 산업은 침체하여
스페인의 쇠퇴는 더 한층 두드러졌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 때는
중상주의 정책의 채택으로 경제도 느리게나마 회복되어갔다.
카푸치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하여
세계2차대전이 끝난 후 에스프레소 머신의 발달과 더불어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 카푸치노를 만들어 먹을 때에는 계핏가루나 초콜릿 가루를 뿌려먹지 않았으나
현재는 카푸치노 위에 기호에 따라 계핏가루나 초콜릿 가루를 뿌려 먹거나 레몬이나 오렌지의 껍질을 갈아서 얹기도 한다.
카푸치노라는 명칭은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회에 카푸친 수도회 수도사들에 의해 유래되었다.
카푸친 수도회의 수사들은 청빈의 상징으로 모자가 달린 원피스 모양의 옷을 입는데,
진한 갈색의 거품 위에 우유거품을 얹은 모습이 카푸친 수도회 수도사들이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와 닮았다고 하여 카푸치노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카푸친 수도회 수도사들이 입던 옷의 색깔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가문은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이다.
1438년부터 1740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연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죽은 뒤 스페인 왕위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의 아들 펠리페 1세와 가톨릭 부부 왕의 딸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로스 1세(1516~56 재위)가 계승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이기도 한 카를로스는 1519년에카를 5세로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가 두 왕가로부터 오스트리아·카스티야·아라곤을 비롯해 이탈리아 영토와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식민지 등을 물려받음으로써 카를로스
1세의 집권기에 스페인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정치적 주역이 되었다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두 제국을 정복하고 동아시아에도 식민지를 만들었다. 한편 스페인은 당시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와는 달리 정복한 나라의
개종이나 통치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가 언제나 식민지 개척에 동행했다. 또 국왕은 식민지와의 모든 무역이 세비야를 경유하도록 해 카스티야의 독점 사업이 되도록 노력했다.
멕시코와 페루로부터는 다량의 은이 유입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경제적인 생산에 사용하지 않고 수입품과 해외파견군, 외국채권자에게 지불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신대륙의 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나라였다카를로스 1세가 퇴위하자 독일(오스트리아 포함)을 제외한 스페인의 전영토를펠리페 2세(1556~98 재위)가 계승함으로써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즉위와 동시에 관료조직을 완비하고 해이한 국가질서의 수립에 정진하는 한편,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를 국가의 행정기관으로 개편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스페인 침투 방지에
주력했다.>
1580년 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성취했다. 그결과 브라질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소유해 스페인의 주도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무역의 기초가 되는 모직물이 네덜란드산·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되어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와 징세를 강화했으나 이는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했으며,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한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했다.
1588년 펠리페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파견한 무적함대</A>'의 참패는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상승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아들 펠리페
3세</A>(1598~1621 재위) 때는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국내적으로는 30만 명의 이슬람교도 추방으로 중산층의 재정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결국 스페인 경제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다펠리페 3세의 맏아들펠리페 4세</A>(1621~65 재위) 치하에서 스페인의 쇠퇴는 더 한층
두드러졌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1665~1700 재위) 때는 파멸적이었던 물가앙등도 다소 진정되었고, 중상주의 정책의 채택으로 경제도 느리게나마 회복되어갔다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을 통해 아메리카 정복까지 하게 되는데
크게 에스퍄냐왕가와 오스트리아왕가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연방형태일 뿐이었고,
근친혼으로 질병을 가진 왕들이 많아서 점차 힘을 잃었습니다
결국은
18C 초에 에스퍄냐왕가의 대가 끊기고
18C 중엽에 오스트리아왕가의 대마저 끊겨서
정통 합스부르크 왕가는 소멸합니다.
다행히
사위가 제위를 이어받은 후
그 자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지만
그마저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퇴위되었으며
21C초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족이 사망하였습니다
동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은 완전 별개입니다.
다음 지도를 보세요. 검은 선 안쪽이 신성로마제국입니다.
동쪽이 폴란드(Poland), 서쪽이 프랑스(France), 서북쪽 섬이 영국(England) 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제국이므로 원어(독일어)로 Heiliges Römisches Reich (하일리게스 뢰미쉐스 라이히) 라 하고, 이를 영어로는 Holy Roman Empire 라 부릅니다.
로마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이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지역에 걸쳐 존재.
이 프랑크 왕국이 분열한 뒤,
동프랑크 왕국 지역에서 새로이 광범위한 통합국가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신성로마제국>.
대략 범위는
현재의 독일 + 체코 + 오스트리아 + 스위스 + 프랑스 동쪽 일부(알사스, 로렌 등) + 베네룩스 3국 정도 될 것입니다.
보다 자세히 본다면,
독일 지역(동프랑크 지역)에서 프랑크 왕실의 맥이 끊기자 제후들이 모여 왕을 선출하였는데 이 때 작센의 오토가 뽑힙니다.
이 자는 독일 전 지역의 맹주로 떠오른 뒤 이탈리아를 정벌한 뒤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게 됩니다.
이 황제의 관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마제국의 황제의 관' 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된 뒤, 동로마제국은 그리스 지역에서 명목을 유지하였으므로 당대에 동로마 황제는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고,
로마 교황은 서로마제국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독일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관을 대대로 쓰게 되는데
이 독일 제국을 '신성로마제국' 이라 부릅니다.
이후 유럽사에서 '황제와 교황의 대립' 어쩌구 할 때의 황제는
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칭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목상의 황제로 물러서고 독일 지역은 점차로 분열됩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은 그 지역 내 최대 강국인 오스트리아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 전에 스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역시 황제의 제후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데, 그에 관한 한 이야기가 바로 '빌헬름 텔' 이야기입니다. ^^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독일 정벌을 하였을 때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하던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 지역은
나폴레옹의 민족주의에 자극받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북부 독일만을 통일하자는
'소독일주의'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전 영토를 확보하아 신성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대독일주의' 가 나타나게 됩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오스트리아라는 남부 지역을 배제한 것으로서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후 히틀러가 '제 3제국' 을 운운하는데,
제 1제국은 신성로마제국,
제 2제국은 통일 후 독일제국을 지칭합니다.
이처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민족주의가 팽창주의적으로 나타날 때
'과거의 영광' 차원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도이칠란드 즉 독일의 예전 국가
1대왕은 오토대왕
카톨릭 교회를 보호하자....
로마의 교황은 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바쳤다고 하네요.....
이로써 오토 대왕은 도이치 민족으로써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이름을 신성 로마제국 라고 하였다.
이것이 도이칠란드 역사의 제 1제국이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1254년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1034년부터 콘라트 2세가 통치하는 영토를 가리켜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1157년부터는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로마 황제'라는 이름은 오토 2세(983 죽음) 때부터 유래한 것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보다 유서가 깊다. 하지만샤를마뉴 대제에서 오토 1세 때까지는 황제이며 존엄한 자'
(imperator augustus)라는 표현을 특정 영토와 연결짓지 않고 썼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에 관해서는 정치체제의 한 사례로 고찰할 수도 있고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또는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역사와 관련지어 다룰 수도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을 구성한 독일·이탈리아의 여러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제국 구성국들의 역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제국을 구성한 각 영역은 각기 자국의 본체를 유지했고 역대 황제는 대관식 때 각기 자기가 속한 나라의 왕관을 썼다.
오토 1세 이전의 황제는
실제로 로마에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는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당연히 대관식을 치른 것처럼 예외없이 황제의 권위를 주장했다.
후자의 경우는 로마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황제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런 변칙이 있었음에도 적어도 중세 때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교황제)
여러 시대의 신학자·법률가·군주·반역자·문학가·귀족 등은 제국에 관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려 제국의 기원·기능·정당성에 대해 제각기 다른 관념을 가졌다.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되는 이들 견해 중에는 다음 3가지가 유력하다.
① 교황은 교황 나름의 고유한 의도로 제국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제국은 교황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세속적 부분이므로
궁극적으로 교황의 자유재량 아래 있다고 보는 교황측의 이론,
②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정복과 패권에 중점을 두고 황제가 직접 신에게
책임진다는 제국 또는 프랑크의 이론,
③ 로마 법의 전통에 따라 제국은 로마 인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라는 로마인(여기서는 로마 귀족)의 이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 3가지 이론 중에는 그 중요성에서 3번째 설이 가장 낮았다.
교황의 본질적인 역할을 넌지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반교황을 의도한 것이었다
1장 루돌프 1세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2장 왕조의 탄생
1. 루돌프 1세와 게르트루트 폰 호엔베르크
2. 알프레히트 1세와 엘리자베트 폰 티롤
3장 결혼정책
1. 알프레히트 2세와 요한나 폰 피르트
2.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3. 루돌프 4세와 카타리나 폰 보헤미아
4. 알프레히트 5세와 엘리자베트 폰 보헤미아
5. 프리드리히 3세와 엘레오노레 폰 모르투갈
6.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아 폰 부르군트
4장 스페인과 헝가리 유산
1. 스페인 유산
1) 필립대공과 후아나 폰 스페인
2) 카를 5세와 이사벨라 폰 포르투갈
2. 헝가리 유산
1) 페르디난트 1세와 안나 폰 헝가리
5장 근친결혼
1.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
2.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6장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탄생
1. 카를 세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
2.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스테판 폰 로트링겐
7장 부르봉가와의 결혼
1. 요제프 2세와 이사벨라 폰 부르봉-파르마
2. 레오폴트 2세와 마리아 루도비카 폰 부르봉-스페인
3.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폰 부르봉-나폴리
8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들
1. 페르디난트 1세와 마리아 안나 폰 사보이
2. 프란츠 카를 대공과 소피 폰 바이에른
9장 형제 황제
1.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
2. 막시밀리안 폰 멕시코와 샤를롯데 폰 벨기에
10장 제국의 종말
1. 황태자 루돌프와 스테파니 폰 벨기에
2. 왕이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 폰 초테크
3.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와 치타 폰 부르봉-파르마
부록
1. 연대기
2. 왕조의 가계표
합스부르크는
'매의 성'이란 뜻으로 원래 스위스에 있던 성입니다.
스위스와 남독일, 라인강 일대에 누더기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진 영지를 가지고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뒤 세력을 넓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최고 명문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이 가문의 전략은 '적과 혼인하라.'였으며 (정복도 했지만) 혼인으로 인해 영지를 넓힌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와 관계를 맺었으며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에 딸(마리 앙뚜와네뜨)을 시집보냈다가 목이 잘리고는 그 다음에 들어선 보나파르트 가문에 다시 딸(루이 마리즈)을 시집보냈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관이라 할 수 있는 스위스는 지역민들의 반란으로 독립하였고요.
(빌헬름 텔 이야기 아시죠?)
스위스는 산골 마을들의 연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산악지형이라 창을 든 스위스 보병들이 귀족 기마병들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죠.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위스의 반란이나 오스트리아의 반란이나 동일한 성격일 것입니다. 스위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부터 독립을 쟁취했다는 식의 민족주의적 서술은 좀 맞지 않는 거 같고요. 계급적으로 접근하는게 타당하겠죠.
(스위스 연방은 알프스에 있기에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지역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웃 국가인 마자르(헝가리)와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마자르 왕이 투르크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혼인관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자르 왕까지 겸하게 됩니다. 마자르는 오늘날의 마자르 뿐만 아니라 남쪽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벤스코(슬로바키아) 등을 포함한 거대 국가였죠. 오랫동안 마자르 평원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만 제국의 전장이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부르고뉴 공과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아라곤(까딸루냐)과 까스띠야가 혼인해서 탄생한 국가인 에스빠냐의 왕위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에스빠냐계 합스부르크라고 부릅니다.
에스빠냐는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로 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군사력으로 서유럽 곳곳에 임팩트를 가했으며 주변국들의 절대주의 확립을 촉진하게 됩니다. (동유럽에서는 스웨덴이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은 세계 제국이 되었죠.
아라곤은 지중해 세력이라 남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도 소유하고 있었기에 남 이탈리아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됩니다. 북부의 토스카나 대공국 역시 메디치 가문 소유였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토스카나가 대공국이라니 좀 그렇군요. 리투아니아나 모스크바 정도는 돼야 大라고 할만한데 ㅎ)
종교 전쟁의 결과로 북독일과 발트해 연안이 프로테스탄트 지역임을 인정받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의 손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감소된 것이죠.
오스트리아계만 타격을 입은 게 아니라 저지대 국가들 중 네덜란드가 독립하게 되면서 에스빠냐계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세가 감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왕위 계승 전쟁으로 에스빠냐 왕관은 부르봉 가문에게 넘어가고 저지대와 이탈리아 등 에스빠냐 동쪽의 영토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귀속됩니다. 물론 서쪽의 신대륙 영토는 에스빠냐의 부르봉 가문이 유지했고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의 세력은 축출되었고 나폴레옹이 교황을 불러 대관식을 거행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를 자처하다가 훗날 마자르인이 오스트리아의 게르만 귀족들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되죠.
물론 나폴레옹 전쟁 후 빈 체제하에서 이탈리아에서의 권리를 다시 되찾았고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통일할 때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상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형성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팽창은 군사 행동으로 인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혼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혼인하며 결혼 지참금으로 영토를 들고오는 경우도 있었고 혼인관계를 맺어놓으면 나중에 대가 끊겼을 때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영토가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죠.
중세에서 근대에 걸친 이 긴 왕조의 이야기를 왜 근대가 아닌 중세 시리즈에 넣었냐하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체가 지극히 중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는 민족국가의 형태가 갖춰졌던 것에 반해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 지참금으로 영지를 들고갈 수도 있는) 귀족 개인의 영지 소유 개념으로 이루어졌으며 거대 제국이 단일한 시스템하에 놓이지 않고 각지의 귀족들의 발언권이 상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한 뒤에는 마자르 등의 여러 지역으로 가서 다시 대관식을 하며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야했습니다. 로마 황제이자 마자르 왕이었으니까요.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루는 각 지역의 백성들은 서로 각기 다른 언어와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황제에 대해 충성을 바쳤다는 것 뿐이었죠. 근대 속의 중세 국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의 환자'라고 칭했지만 의외로 더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1차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왕조의 역사가 끝이 납니다. 제국이 붕괴하고 중부유럽에 수많은 국가들이 탄생했죠.
중세 동안 서유럽은 각 지역의 방언과 문화가 하나로 통합되어 민족국가가 형성되어갔습니다. 오늘날의 국경선을 이루는 국가들이 이미 중세에 존재했죠. 하지만 중부유럽와 동유럽은 거대 제국 안에서 여러 민족이 공존해 살았기 때문에 민족국가의 형성이 더뎠고 이러한 상황은 민족 갈등을 초래해 2차 대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퍼온 합스부르크의 작위입니다.
합스부르크 백작
독일 왕
로마 왕
신성로마황제
오스트리아 공작
헝가리 왕
카스티야와 레온 왕
아라곤 왕
에스파냐 왕
바르셀로나 백작
부르고뉴 대공작
나폴리 왕
시칠리아 왕
샤르데냐 왕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 대공작
포르투갈 왕
플랑드르 백작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왕
달마티아 왕
토스카나 대공작
모데나 공작
오스트리아 황제
독일연방 수장
ps1-이 밖에도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이 메히코 황제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메히코에 군대를 파병해 괴뢰(꼭두각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하지만 민중 혁명에 의해 막시밀리안은 총살당하고 맙니다.
ps2-첨부된 지도 첫번째 것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이며
두번째 것은 에스빠냐계 합스부르크 제국을 포함한 지도입니다.
합스부르크 최초의 왕인 루돌프(1273~1291)는 남서부 지방 대부호의 후손이었다.
그는 왕이 된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했으며, 그러던 중 보헤미아가 큰 희생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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