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다
이 홍사
1. 아버지다.
요즘 세상에 아버지는 없다.
다들 아빠뿐이다.
그러나 나는 아빠이기를 거부한다. 아버지로서 군림하는 게 아니라 위엄과 존엄성을 유지하고 싶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Dad가 아니라 Father이고 싶은 것이다.
아빠와 아버지가 뭐가 다른가?
아빠와 아버지의 차이점을 부득이 구분하자면 수평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사이라는 호칭의 이미지 차이라고 하겠다.
삼지례三枝禮라고 했던가?
비둘기는 어미가 앉은 가지에서 세 가지 아래 앉는다는 말인데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쓰는 성어다. 비둘기도 어미를 공경할 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부모를 공경할 줄 몰라서야........ 이렇게 서두를 꺼내며 쓰는 말인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새끼비둘기가 어미를 공경해서가 아니라 어미가 천적으로부터의 망을 보기위해, 새끼들은 보호하기 위하여 세 가지 높은 곳에 앉는 것인데 우리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어미를 공경해서 아래 앉는다고 비약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리라. 어미를 공경하고 보호하자면 현실적으로 새끼비둘기가 세 가지 위에 앉아 망을 보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튼, 삼지례를 따라 같은 가지에 앉는 아빠가 아니라 세 가지 위에 앉는, 아니 자식들을 세 가지 아래에 앉히는 아버지이고 싶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고라고 할지는 모르나 분명히 아버지이고 싶다. 내 외사촌 동생, 광기는 외숙부를 두고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어릴 적에 아빠라고 부르다가 언제부터인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아마도 녀석이 결혼을 하면서부터이지 싶다. 몇 번 주의를 주었다. 아버님이란 호칭은 춘부장이나 시어른을 부르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호칭이고 아버지란 호칭에 충분한 친근감과 존대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그러나 아버님이란 호칭이 입에 배어서 이젠 그게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젠 주의를 줄 나이도 지났다. 나이는 나만 먹는 게 아니다. 그 녀석도 아들이 곧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귀에는 껄끄럽지만 이젠 그 호칭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기가 좀 뭣하다. 그래도 그 나이에 아빠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 마흔이 넘도록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철딱서니 없는 인간도 이 땅에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이 호칭에 민감한가를 들추면 아마도 십오 년이 넘었을 것이다. 지난달에 전역한 준이 녀석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친하게 지내는 시인인 후배 경무 녀석과 김천 지례에 흑돼지 숯불구이를 먹으러 갔다. 그곳은 흑돼지로 유명한 곳이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토요일이었지 싶다. 빈사무실에서 둘이 바둑을 두다가 바람 쐬는 것처럼 가볍게 나가서 그쪽의 유서 깊은 고찰의 복원이 완공되었다는 석탑을 둘러보고 흑돼지를 먹고 오자고 했다. 바둑을 지는 사람이 사기로 했다. 누가 졌는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경무의 차를 이용했다. 지금은 산업도로가 났지만 국도로 가니 사무실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아무튼, 드라이브삼아서 느긋하게 가서 석탑을 둘러보고 지례로 가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흑돼지 숯불구이로 소문이 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맛있는 집에 몇 번 방영되고 나니 흑돼지를 요리하는 식당이 빼곡하게 들어선 시골의 시장 골목이었다. 손님이 북적이지 않는 식당을 골라서 들어가 둘이 마주앉아 노릇하게 굽히는 고기를 뒤적이며 소주를 곁들여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식당에 딸린 안방의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잘 다듬어진 근육질의 병장 계급장을 단 군인이 나오는 게 보였다. 안방에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휴가 나온 식당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그 육군병장이 신발을 신으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아빠는?
그 외침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씹고 있던 고기를 울컥, 뱉을 뻔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닌 모양이다. 마주앉은 경무, 돼지고기를 신이 내려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며 정신없이 먹던 녀석도 고기 씹기를 멈추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 육군병장을 돌아보았다. 휴가 나온 아들이 생식적으로 제 아비가 되는 작자를 찾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 호칭이 엄청 귀에 거슬렸다.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껄끄러웠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무와 아버지의 호칭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부권 상실시대의 단면을 본 것이라며, 그건 객관적이 시각으로 어느 쪽으로 보아도 예쁘게 봐 줄 수 없는 경우라는데 뜻을 모았고 경무의 표현대로 가정교육을 말아먹은 집구석, 곧 말아먹을 집의 가풍이라고 했다. 경무의 험담은 끝이 없었으나 남의 일이니 이쯤하자하고 하고 집 앞에서 내렸다.
적당한 취기를 느끼며 집에 닿아 초인종을 누르니 준이 녀석이 쪼르르 달려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뭐야? 에이씨~ 오라는 통닭은 안 오고.......
녀석은 초인종을 누른 이의 존재를 파악하고 실망했다. 통닭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분명, 아버지란 존재는 기다리던 통닭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었다.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여태 남의 자식 흉만 보고 왔는데 그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통닭을 놓고 부권회복을 위해서 시위를 시작했다. 따끈한 통닭이 든 종이상자를 냉장고 위에 얹어놓고 아이를 거실에 꿇어 앉혔다.
-따라해! 저는 통닭보다 아버지가 좋습니다. 아빠가 아니라 분명 아버지다.
-저는 통닭보다 아빠, 아니 아버지가 좋습니다.
녀석은 냉장고 위를 쳐다보며 복창을 했다. 복창이 끝나면 냉장고 위의 프라이드 한 조각을 꺼내주고 콜라를 조금 부어주었다. 그걸 다 먹고 또 냉장고를 쳐다보면 복창을 시켰다.
-저는 통닭보다 아버지가 좋습니다.
그렇게 복창을 하면 또 한 조각을 꺼내 주었다. 치졸한 시위를 보다 못한 아내가 안방으로 사라졌다.
한 조각을 다 먹고 나서 시키지도 않았지만 순전히 통닭을 먹기 위해 꿇어앉아 복창을 했다.
-저는 통닭보다 아버지가 좋습니다.
그러면 또 한 조각을 꺼내주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 복창을 하고난 아이는 통닭이 시들해졌는지 졸리는 눈을 부비며 말했다.
-아빠! 이제 그만 먹을래.
그 말을 뱉어놓고 발딱 일어나 제 엄마가 있는 안방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부권회복을 위해 치졸한 시위를 하던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통닭보다 못한 아버지였다. 통닭에게 밀리는 아버지라는 자괴감을 품고 내 방으로 건너가 잠이 들었다. 헌데 그 효과는 다음날 아침에 나타났다. 일요일이라 일어나지 않고 늦장을 부리고 누워있는데 거실에서 놀던 준이 녀석이 배꼼이 문을 열어보고는 들어왔다. 녀석이 들어오는 걸 보고 눈을 감고 자는 척 누워있었다. 녀석은 살금살금 다가와 고사리 손으로 내 목덜미를 살살 간질이며 장난을 걸었다.
-준이냐? 왜에?
-아버지! 엄마가 밥 먹으래.
녀석이 부르는 호칭은 놀랍게도 아빠에서 아버지로 격상되어 있었다. 짐짓 모른 척하고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준아! 통닭이 더 좋으냐? 아버지가 더 좋으냐?
그 물음에 아이는 내 얼굴에 침을 튀기며 지난밤처럼 큰소리로 복창을 했다.
-저는 통닭보다 아버지가 더 좋습니다.
그렇게 고함치는 녀석을 안고 이불 위를 한 바퀴 뒹굴었다.
-준아! 계집애들은 아빠라고 하고 고추달린 사나이는 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아버지! 밥이나 먹어!
그날부터 나는 녀석에게 아빠가 아니라 완벽하게 아버지가 되었다. 그날이후로 전역을 한 지금까지 아빠란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귀한 아들이다. 딸 셋을 낳고 계획생산에 의해 낳은 아들이다. 녀석이 아버지라고 부르자 제 누나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는 분명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다.
2. 덤
인구정책에서 우리나라는 실패했다.
적어도 일억은 넘어야 할 나라인데 고작 오천 만에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머지않아 국민의 칠 할이 노인이 된단다. 처량한 정도가 아니라 침통한 실정이다. 그러나 나는 인구정책에 실패하는데 동조하지 않았다. 아이를 넷을 낳았으니까.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예비군 훈련 가서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빼준다는 유혹을 뿌리쳤다.
우리나라 정책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불과 십 몇 년 전까지 산아제한을 운운했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거기서 더 넘어서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그 따위 구호를 외치던 시절이 고작 십 몇 년 전이다. 지금 와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출산 장려책을 쓰고 있지만 모두 교육비를 생각해서 외면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은 정부의 정책을 역행하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 당시에 정책에 충실히 따른다고 아이를 하나만 낳고 문을 닫은 친구들이 더러 있다. 그 친구들 내가 셋째를 낳을 적에 원시인이냐고 빈정거리며 물었다.
-우째 키울라카노?
그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보고 키워달란 소리 하지 않을 터이니까 신경 붙들어 매! 내가 했던 말이다. 그런 녀석들은 지금 시대가 바뀌어 손가락을 빨고 있다. 사실이지 나도 딸 둘을 낳고 그만 낳으려고 했다. 워낙 어릴 적에 불장난으로 아이를 가졌으니 군에 입대할 적에 큰아이가 백일쯤 되었다. 조용한 시골마을 집성촌에 선례 없는 일로 사고를 친 것이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 도망가듯 군에 입대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제대를 하고 오니 연년생으로 딸이 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대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아이를 낳기에 집안에 눈치가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 지금이야 아들 셋이지만 당시에 형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무슨 이유인지 자연유산이 되곤 했다. 그 형을 보기가 면구스러워 아내와 합의해서 아이를 지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짓이지만 당시에 아이를 지우고 자궁을 막는 일은 병원비도 받지 않고 정부에서 지원해주었는데 아이를 지우며 무료시술을 받은 것이다.
딸 둘을 유치원 보내고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별 생각 없이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환갑을 못 넘기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삼우제를 마치고 허탈한 마음으로 선산에서 내려오는데 아무래도 아들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몰랐지만 큰일을 치러보니 아들의 존재가 부각된 것이다. 딸은 그런 일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걸 본 것이다. 우연스럽게도 아내가 바로 내 뒤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아내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들은 하나 있어야겠지?
-그런 것 같네요.
아내도 그 길을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내는 난관 폐쇄수술을 하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내가 다른 데 가서 하나 낳아 올까?
-그러시던지.
상복을 입은 아내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 사실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 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갔다. 그 일상에 적응하여 바로 묻혔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밥상을 받았다.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이야기를 했다. 어느 병원의 어느 박사가 복원수술로 유명하다고 했다. 복원수술? 그게 뭔데? 밥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내의 설명에 의하면 난관 폐쇄수술을 한 걸 다시 복원시킨다는 말이었는데 어느 대학병원 어느 박사가 성공률 80%를 자랑하고 있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말을 했다. 그 말을 하는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가타부타 얘기 없이 밥을 먹었다. 아내도 더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 서너 달이 지났다.
타고 다니던 중고 승용차가 고장이 났다. 봉곡득타, 울고 싶은데 때려주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유행하던 르망 스포츠카, 지금은 자동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모델명도 잊지 않고 있다. 펜터파이브로 바꾸고 싶었는데 타던 차 미션에 중대결함이 생겼으니 그 차로 바꿀 명목이 생긴 것이다. 문짝이 두 개이고 차체가 낮은 게 잘 빠진 스포츠카였다. 당시에 꽤나 비쌌지만 그 차의 중고라면 현금으로 살 여유가 있었다. 포클레인 기사를 거쳐 내 소유로 포클레인 한 대를 자가운전하며 영업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카센터에 맡겨놓은 차를 수리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라하고 서대구 중고시장에 차를 보러 가는데 아내가 대동했던 것이다.
중고시장에 도착해서 차를 둘러보는데 아내는 말했다.
-대구에 온 김에 병원에 가서 그 박사를 만나볼까요?
-무슨 박사?
-복원수술로 유명하다는 그 박사.
아내는 그때까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복원수술을 한다면 차를 바꾸지 못한다. 잠시 갈등이 생겼다. 복원수술 성공률도 80%밖에 되지 않는다. 괜히 헛돈을 날리는 게 아닌가?
-일단 가서 한번 물어나 보지.
아내를 병원으로 보내고 나는 중고시장을 돌아다니며 찻값을 알아보고 차 구경을 했다. 탐이 나는 차가 엄청 많았다. 거의 두 시간 만에 돌아온 아내는 그 박사가 한 달 후에 미국 교환교수로 나간다며 학교발전기금을 요구한다고 했다. 키우던 아이가 잘못되어 복원수술을 하면 수술비용만 받고 그냥 해주는데 마음이 바뀌어 복원수술을 하는 경우는 학교발전기금을 요구하는 게 관례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삼십 만원을 아내에게 주면서 말했다. 삼십 만원이면 당시 포클레인 기사의 반달 월급이다.
-이걸로 된다면 하고 안 된다면 포기하자. 점이나 쳐보는 거지 뭐.
아내는 그 돈을 받아 다시 병원으로 가고 나는 주사위를 던져놓은 심정으로 중고시장에 머물렀다. 아내가 말한 대학병원은 중고시장에서 버스로 서너 코스쯤의 거리에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내는 희색이 만연해서 돌아왔다. 일주일 후로 수술날짜가 잡혔다는 것이었다. 아내야 희색이 만연했지만 나는 스포츠카를 포기해야 했다. 수술비가 그 스포츠카 가격과 거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통장과 도장을 아내에게 맡기고 그냥 올라와서 카센터에 맡겨놓은 차를 수리했다. 수리한 차를 탈 때마다 그 모델의 스포츠카가 눈에 어른거렸다.
아내의 수술은 일주일 후에 예정대로 했다. 그냥 정관수술을 하는 것처럼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틀을 입원했다가 돌아온 아내의 수술부위를 보고 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하고 놀랐다. 배꼽아래 가로로 한 뼘 정도를 찢어서 한 대수술이었다. 그 수술을 한 박사는 예정대로 교환교수로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서너 달 후에 태기가 있었다. 성공이었다. 스포츠카를 산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수시로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했는데 태아가 정상대로 잘 자라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은 아들이냐 하는 문제인데 모두들 아들이라고 했다. 해가 바뀌어 봄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낳아보니 고추가 아니라 조개였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산부인과에서 바뀌지나 않은 것인가 의심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산부인과가 아니라 조산소였고 그 조산소 원장은 나의 외가 오촌이 되는 아주머니였고 그날 그 조산소에서 낳은 아이는 딸랑 하나였다. 바뀔 리가 없었다. 다들 아들이라고 했는데? 갓난아이의 아랫도리를 한 번 보고 창밖 하늘을 한 번 보곤 했다. 말문이 막혀 할 말은 없는데 비는 엄청 내렸고 마음마저도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너무 실망스럽고 우울해서 스포츠카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아들이라고 이름까지 지어놓았는데.
모든 꿈이 깨어졌다. 위에 둘을 워낙 어린나이에 낳았으니 출가시키고 마흔 중반부터 여행만 다니자던 아내와의 약속도 깨어졌고 딱 둘째딸을 시집보내는 마흔 중반까지만 일을 하겠다는 꿈도 물 건너갔다. 아내는 완전히 나에게 죄인이 되어 있었고 당시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들도 갓난아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내 눈치를 은연중에 보았다.
덤. 완전히 덤이었다. 매일 아침 자고 나서 들추어 보아도 고추는 돋아나지 않았다. 너무 서운했다. 너무 서운해서 이름도 짖지 않고 서운이라고 부르며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아들만 둘인 형님에게 양녀로 보내자고 했다. 그러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언니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래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딸 셋을 키울 자신이 없으니 형수님이 맡아달라고 형수님께 부탁을 했다. 형수님은 지금은 너무 어리니까 딱 일 년만 키워서 데리고 오라고 거절을 했다.
출생신고를 미루다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이름을 대충 지어서 서너 달 후에 출생신고를 하니 과태료가 나왔다. 덤으로 낳은 아이를 과태료까지 내고 출생신고를 해야만 했다. 법적으로 한 달 이내로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생년월일을 틀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로 더 약이 올랐다. 그때만 해도 둘 이상 낳으면 출생신고를 해야만 의료보험이 적용되던 시절이었다. 아! 조국이여!
3. 아들 만들기
어느 날 저녁, 술을 한잔하고 들어오니 아내는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그때까지 고추가 돋아나지 않았다.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뜬금없이 말했다.
-야! 이왕 조진 거, 우리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자. 딸이 열이면 어때? 딸부자! 듣기 좋잖아?
-조지긴 뭘 조져? 이런 애가 나중에 효도한다고 했어요. 그건 그렇고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평생소원 하나는 들어준다던데 한번 가보실래요? 대를 이으려면 그런 공은 들여야죠.
기저귀 갈기를 마친 아내는 돌돌 말은 축축한 기저귀를 느닷없이 내 얼굴에 들이대며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냄새나는 걸. 어디서 들었는지 갓바위 부처님의 효험을 들먹이며 기도를 가자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당일치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거 뭐 어려운 일도 아니네.
술기운에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며칠 후, 일요일 날 새벽 아내가 김밥을 싸는 걸 보고 누구 소풍가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오늘 갓바위 가기로 했잖아요, 김밥을 싸면서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랬던가? 아무튼, 갓난아기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들에게 맡겨놓고 고물차를 끌고 팔공산으로 향했다. 가면서 차라리 차나 바꿀 걸! 아내가 들으라고 그 소리를 두 번이나 했다. 그 말에 아내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다 팔자에 있어서 난 거예요. 라고 핀잔을 주었다. 구미에서 갓바위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오랜만에 아내와 산길을 오르니 소풍 나온 것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펴지는 것 같았다.
이야! 이래 좋은 걸, 다 물 건너갔네, 서운이 땜에.
서운이 덕에 이 좋은 곳에 오는 줄 알아요.
뒤따라 오르는 아내도 지지 않았다.
갓바위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인파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았다. 부처는 일단 위엄이 있고 영험이 있어보였다. 분명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아내와 땡볕에 나란히 앉아 기도를 하고 부처님 앞에 절을 했다. 아내를 따라하는 것이었지만 부처님 앞에 절은 난생처음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더 이상 딸을 낳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셋째 딸을 낳았다는 소문이 돌아 아는 이들은 만나면 다들 한마디씩 입맛을 다셨다. 그때마다 적절한 대꾸를 하려니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더 이상 그 조롱이 살짝 가미된 인사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갓바위에는 그늘이 한 점도 없다. 모두들 땡볕,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기도를 한다. 그런 고행을 해야 효험이 있는지 모르지만 한참 기도를 하다가 아내를 보니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있었다. 염주를 돌리며 절을 하는 아내의 모습에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때 아내에 대한 연민이 살짝 일며 아들을 꼭 낳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간절한 심정으로 절을 하는 아내의 목덜미를 보며 생각하니 갓바위 부처님도 어지간히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매일 몰려들어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각양각색인 소원을 다 들어주려면. 부처님이야 머리가 아프든 말든 일단 내 소원은 분명히 들어달라는 심정으로 아내를 따라서 절을 했다.
아마도 그때가 초여름이었는데 한낮쯤 되니 무릎이 까지고 수시로 물을 마셨지만 갈증은 여전하고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지쳐갈 즈음 아내는 절을 마쳤다. 백팔 배 열 번을 했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이젠 아들을 낳을 수 있겠어? 하고 농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아내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땀을 흘리는 아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일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로 집으로 오지 않았다. 갓바위에서 내려와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 구불구불한 농로로 차를 몰아넣었다. 지금 생각하니 갓바위 뒤에 있는 능선 골짜기 어디쯤 될 것이다.
-어데 가는데?
-터 좋은 데 가서 팔공산 정기를 받은 아들 하나 만들어서 가자.
아내는 무슨 뜻인지 냉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골짜기 끝까지 올라가 차를 세우고 산을 올랐다. 돗자리만 챙겨들고 길이 없는 곳의 잡목을 헤치고 내가 앞장을 섰다. 아내도 군소리 없이 따라 왔다. 한참 올라가니 준령하게 잘 뻗은 능선의 평평한 솔숲이 나왔다.
-이곳이 명당이네.
말을 하고 보니 조용하고 아카시아 향기가 감미롭고 청명한 하늘이 보이며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그야말로 명당중의 명당이었다.
손나발을 만들어 산정을 향해 나는 외쳤다.
-산신령님! 저희 여기서 아들 하나 만들겠습니다. 굽어 살펴주십시오.
신고식을 하고 평평한 솔숲 그늘에 돗자리를 정성스레 깔았다.
단순한 부부관계가 아니라 팔공산의 정기를 받는 성스런 의식이었다.
성스럽게, 그리고 거룩하게 거사를 치루고 집으로 돌아오니 난리가 났다. 갓난아기가 종일토록 울었다는 것이었다. 울다가 지쳐 축 늘어져있었다. 아이가 그 모양이니 초등학교에 다니던 제 언니들도 감당이 안 되어 거실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이 아니라 불덩이였다. 아침부터 먹인 우유는 다 토했다고 큰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내는 아이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내달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큰 병이 아니라 장염이었다고 했다. 일주일을 입원했는데 아이만 입원한 게 아니라 아내까지도 일주일간 집에 오지 않고 병원에 머물렀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둘째 딸과 서운이가 띠 동갑이었으니 큰아이들이 아마도 초등학교 사오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일주일을 생활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덤이 사람을 이래 불편하게 만드네, 그런 소리를 하며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면 아이들이 어설프게 식은 밥을 차렸다. 그 밥을 먹고 아이들보고 문단속을 하고 학교가라고 하고 출근했다. 퇴근하고 오면 집안은 엉망이었고 일주일간 밥보다 라면을 먹은 날이 더 많았다. 서운이는 안중에도 없고 아내가 절실했다.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고 괜히 덤을 낳아서 이래 불편 하구나 생각했다.
일주일 후 아내가 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다음날 퇴원하기로 되어 있는데 저녁 무렵에 아이를 안고 거실로 들어선 것이다. 아내보다 아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그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한 게 어지간히 예뻐 보였다.
-어이구! 내 딸이 왔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딸로 인정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큰 아이들이 시샘할 정도로 서운이를 싸고돌았다. 뜯어보니 모든 구석이 예뻤다. 손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발가락은 빨고 싶은 기분이었다. 위에 둘은 내가 군에 있을 적에 다 컸다. 워낙 어린나이에 낳았고 아이 커는 걸 못 보아서 아이가 예쁜 줄을 몰랐지만 서운이는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집의 모든 일은 서운이 위주로 룰이 정해졌다. 내가 말은 안했지만 그렇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끔 퇴근 후에 한잔하는 날도 그 서운이가 눈에 어른거려 일찍 자리를 털곤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자신이 희한하게 변했다. 일 년을 키워 큰집으로 보낸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변했다. 내가 돌변하자 아내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고 심지어 덤이 아니라 복덩이라며, 간덩이가 살짝 부은 소리를 내 앞에서 거침없이 했다.
3. 서서 오줌 누는 놈
덤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무렵, 아내에게 태기가 나타났다. 그때 내 나이가 겨우 서른셋이었다. 아이를 낳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라 큰아이들을 워낙 어린 나이에 낳았으니 늦둥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젊었으니 태기가 빨리 나타난 것이다. 갓바위에서 돌아오며 만든 것인지 집에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신 삼 개월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빨리 병원에 가서 초음파검사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고 성별은 오 개월이 넘어야 식별이 가능하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조급증이 나서 두 달을 더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싫다는 아내를 이끌고 서운이를 낳은 외가의 아주머니가 하는 조산소를 찾아갔다. 거기가 제일 만만했다.
그때만 해도 무슨 이유인지 태아의 성별 판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아들이면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 딸이면 예쁘게 크고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슬쩍 알려주던 시절이었다.
조산소는 금남의 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먼저 들어섰다. 아주머니는 예상보다 애가 빨리 들어서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옆방에는 딸 다섯을 낳고 여섯 번째 아이를 낳으려는 마흔이 넘은 산모가 누워있는데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또 딸이라고 하며 산모보기가 민망해서 애를 어떻게 받을지 모르겠다고 난감해했다.
딸 다섯에 하나 더?
끔찍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보다 더 처참한 타인의 불행을 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초음파를 해서 딸이라고 해도 견딜 자신이 생겼다. 딸이 넷이면 어때? 자신감과 더불어 덤덤해졌다.
옆방에서 숨넘어가는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양수 터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어지간히 난리를 부리는구먼. 좀 참지. 한둘 낳아본 것도 아니면서.
아주머니는 옆방에 대고 투덜거렸다.
-아지매! 그건 남의 일이고 빨리 우리나 검사해주세요.
-초음파 검사를 하더라도 속단하기는 아직 일러. 넌 뭐가 그리 급하니?
한 번 오판의 경험이 있는 아주머니는 자신 없어 했다. 그러면서 아내를 초음파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나도 따라서 들어갔다. 아내의 배를 걷어 올리고 젤같이 끈적끈적해 보이는 액체를 바른 후에 초음파를 하면서 나에게 모니터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머리고 이건 다리고, 이건 팔인데 까딱 잘못 보면 팔을 고추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 여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아직 일러.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기다려.
아주머니가 설명을 했지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고개만 주억였다. 그냥 희미한 모니터에 비치는 흐릿한 물체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두어 달 있다가 대구로 가라고 했다. 대구의 어느 조산소를 알려주면서 독일 파견 간호사로 같이 나갔던 친구인데 성별판독에 전문가라고 하며 아무나 봐주는 게 아니라 아주머니의 이름을 대면 봐줄 거라고 갈 적에 전화를 해 줄 터이니 연락을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내의 뱃속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달 후를 달력에 동그라미로 표시를 해두고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니 두어 달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달력에 표시된 날이 되었다. 그날 예약된 일을 일찌감치 다음날로 미루어 두었고 대구에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내가 조산소에 전화를 해서 아주머니에게 대구에 간다고 전화를 넣어달라고 했다. 내가 부산을 떨자 아내가 상당히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당신! 그 들뜬 기분으로 갔다가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괜찮아! 어차피 딸부자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긴장이 되었다.
아주머니가 말한 그 조산소는 찾기가 쉬웠다. 내가 초음파 모니터를 볼 줄 알았는데 그건 지나친 기대였다. 그날 산모가 많아 나는 금남의 집인 조산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에서 기다려야 했다. 결과는 아내의 입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보내고 일이나 하러 갈 걸! 심드렁한 심정으로 차에서 지루하게 기다렸다. 거의 한 시간이 넘어서 아내가 나왔다.
-또 딸이라네요.
아내의 표정을 보고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말을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할 수가 없었다.
-진짜야?
-아들이에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조수석에 앉은 아내를 힘껏 껴안았다. 감개무량! 그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감개무량했다. 그날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서대구 중고차 시장에 들렀다. 타고 간 차를 헐값에 처분하고 새로 나온 프라이드를 기분 좋게 샀다. 스포츠카는 이미 유행이 지났고 내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신형으로 나온 프라이드, 그것도 신차가 아니라 남이 석 달을 탄 중고를 사서 타고 올라오는데 가슴이 푸근한 게 천하가 손 안에 든 것만 같았다. 올라와서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조산소에 들렀다. 재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조산소에서 또 아내는 아랫배에 젤을 발랐다. 이번에는 내가 보는 앞에서였다.
-여기를 봐라. 있지? 서서 오줌 누는 놈 맞네.
뭔지 모르지만 아주머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네가 만든 아들인데 내가 왜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니?
-그런가요? 누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셋째 딸에게 고맙다고 해라. 그 애가 불러서 온 거야.
-서운이가요?
-서운이라고 이름 지었니?
하도 서운해서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했다. 꼭지, 말숙이, 말년이, 말자, 그런 이름들은 딸이 많은 집에서 고추달린 동생을 불러오라고 지은 이름이라고 아주머니는 말하며 서운이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며 웃었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사실 남동생을 부른 게 큰애들이었다. 애들 방에는 항상 촛불을 켜두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이 제 방에 촛불을 켜 두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남동생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매일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 내가 아이들 보는 앞에서 아들, 아들을 너무 남발한 게 아닌가? 헤아리며 너희들도 소중한 내 딸들이라고 하며 애써 웃어주었다.
그 후부터 아내는 매달 조산소를 찾았다. 초음파로 태아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보이던 고추가 행여 사라졌을까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조산소에 갔다가 온 날이면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고추가 보이더냐고. 아내는 염려마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운이 때도 여덟 달이 지나서야 딸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고 실토했다. 내가 너무 확신과 기대에 차있어서 차마 말을 못했다면서 형수를 비롯한 여동생들, 온 집안 식구들은 다 알고 나에게만 쉬쉬 했었노라 했다. 지나간 일이고 뱃속에 있는 놈이 서서 오줌 누는 놈이라니 용서가 되었다.
예정일을 보름정도 앞둔 어느 날 새벽 아내는 자다가 아랫배 통증을 호소했다. 창밖에는 드문드문 눈발이 날리는 겨울의 새벽이었다. 뭐가 잘못 되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정일은 보름이나 남았는데........ 조산소로 전화를 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는 그럴 수도 있다며 와보라고 했다. 방학이라 느긋하게 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서운이를 맡기고 아내를 싣고 조산소로 내달았다. 서운이를 낳고부터 말은 안했지만 큰애들이 내 눈치를 보며 철이 들었는지 시키는 모든 일에 고분고분했다. 잠이 덜 깬 아이들에게 아기를 맡기고 조산소로 향하면서 초조한 심정으로 태아가 무탈하기를 빌고 있었으니 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4. 아이고, 어머니
조산소에 진찰한 결과 태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 분만에서 오는 산통이라고 했다.
-예정일이 보름이나 남았는데요?
의아해 하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곗돈 부은 것도 아니고 예정일에 딱 들어맞는 애가 어디 있니?
그런가? 오늘부터 서서 오줌 누는 놈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간에겐 오늘보다 내일이 중요하다. 오늘 샴페인을 터트리면 내일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오늘보다 내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점이다. 보름 일찍 서서 오줌 누는 놈의 아빠가 된다? 오늘 샴페인을 터트린다? 정말이지 실감나지 않았고 몸 둘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했다. 그렇게 안절부절 하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적에 분만실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별 산고 없이 아이를 순산했다. 아들이라는 통보를 받고 내가 분만실로 들어갔다. 얼굴은 이미 닦았고 조산소 아주머니는 갓난아기의 불알을 들추어가며 보드라운 가재로 양수를 닦고 있었다.
-봐라! 고추.
갓난아기의 얼굴보다 아랫도리에 모두 관심을 가졌다. 불알망태가 양수에 불어 더 크게 보였다. 듬직한 불알을 지닌 놈이었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추를 한번 내려다보고 열어둔 분만실 문밖 벽에 걸린 달마의 그림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떠오른 말이, 엉뚱하게 달마야 소주 한잔 하자였다. 달마와 대작을 하고 싶은 지극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소감을 말하라면 이 기쁜 소식을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이렇게 서두를 꺼내야 마땅하지만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 애석했고 가슴이 울컥했다. 정말이지 가장 먼저 고추를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언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그 호칭이 가장 완벽한 언어라는 걸 몰랐다. 돌아가시고 불러보니 애절하고 절실한 호칭이었다.
마흔여섯, 돌아가시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층층시하, 시부모와 시조부모를 모시며 가난한 종갓집의 사대봉제사를 도맡고 틈틈이 농사일을 도우며 자식 다섯을 낳아 키우던 어머니는 어느 가을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가 철이 들기 전, 군에 있을 적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받기만 했지 드린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갓난아이의 불알을 보며 속으로 아이고, 어머니를 연발했다. 그 불알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자 아들을 낳은 기쁨보다 보여드릴 수 없음이 더 슬펐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군에 있었으니 당연한지 모른다. 사고를 쳐서 어린나이에 딸을 하나 낳고 도망치듯 군에 입대를 한 것이다. 어머니가 나서서 당신의 손녀가 되는 아이와 당신의 며느리가 되는 남의 집 처녀, 미혼모인 아내를 집으로 거두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 두어 달을 외가에 숨겨두었다가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 집으로 들인 것이었다. 그런 일은 당시 집성촌에 선례가 없었고 종갓집의 체면이 달린 문제였다. 어머니는 오로지 자식을 위해서 체면이고 남의 빈축이고 모든 것을 감수하셨다. 어머니가 하신 말을 사내야 헌 갓을 쓰고 똥 누기지, 남의 빈축을 그런 말로 이겨내셨다. 사내야 헌 갓을 쓰고 똥 누기지만 남의 집 귀한 딸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이를 어쩌나? 어머니는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분이셨고 아내를 딸처럼 거두었다.
내가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부산의 어느 바닷가 해안경계병으로 배속이 되었다. 후방으로 배속이 되고 서너 달 지나자 어머니가 연락도 없이 아내와 아이를 대동하고 면회를 오셨다. 내가 근무하는 초소까지 바로 찾아오셨다. 아들도 볼 겸 며느리에게 바람을 쐬어주는 입장에서 왔노라고 했다.
당시에 내가 근무하는 초소부근, 감천동에는 할머니의 친정이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외갓집이지만 그 쪽 집안이 단출해서 왕래가 잦았다. 그 집에도 인사차 들릴 겸 겸사겸사 왔노라고 했다. 늦은 봄이었거나 초여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묻고 물어서 분초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입대 육 개월 미만의 신병이라 외박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소대장은 아이와 아내를 보더니 위수지역을 이탈하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가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자고 오라고 했다. 소대장의 배려로 외박증도 없이 분초를 나왔다. 분초를 나오자 어머니는 소임을 마쳤다는 듯이 너희들 둘이 알아서 어디 가서 저녁 먹고 자고 내일 오전에 감천동으로 오라고 명령을 하달하시고는 아내가 업고 있던 아기를 빼앗아 업고 감천동으로 가셨다. 육군 이등병에게는 꿈같은 명령이었다. 어머니의 명령대로 아내를 데리고 어시장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가까운 여관을 잡았다.
다음날 오전에 감천동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거기서 점심을 먹고 감천 삼거리에서 식구들을 보내는데 왜 그런지 울컥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날이 되었다. 당시 시내버스에는 차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시내버스 유리에 부산역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도 차를 타기 전에 차장에게 대구역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차장은 웃으면서 대구역이 아니라 부산역으로 간다며 타라고 하며 애기를 업은 어머니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아이고, 어머니!
갓난아기의 고추를 보니 불현듯 빛바랜 기억이 떠오르고 고추를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애절합니다. 아이고, 어머니!
그날 나는 아이의 고추를 보고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애절하고 비통한 심정이었다.
5. 벗이여!
벗이여! 나도 서서 오줌 누는 놈의 아비가 되었다.
벗이여! 그대의 예리하면서 각박한 현실적 논리의 잣대로 가늠하지 말라. 왜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느냐고? 그 물음에는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감성의 잣대를 들이대라. 이 세상에 내가 왔던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유행가 가사 같지만 비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살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동물의 가장 기본 본능이 종족번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째 키울라카노? 제발 그 말을 좀 그만해라. 밭이 다른 곳에서 낳은 아이들이 아니다. 이 자식들아! 내가 알아서 키운다.
서서 오줌 누는 놈을 낳으니 아이가 넷이다. 어깨가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사셨던 할머니는 준이 녀석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증손자의 고추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귀한 것이 어디 숨었다가 이제 나왔노? 제 먹을 것은 다 타고 난다. 키우는 걱정은 하지마라.
지금 와서 돌이키니 할머니의 말씀이 맞다. 아이를 낳기가 힘들었지 키우는 건 별 것 아니다. 지금도 벗들은 술자리에서 얘기 한다. 어떻게 다 키웠냐고? 내 대답은 한결같다.
-내가 키운 게 아니야. 낳아놓으니 저절로 커던데?
사실이다. 아이가 많다고 저희들이 절약해서 컸다. 위에 큰 아이들 사설학원 한번 보내지 않아도 국립대학 장학생으로 다녔고 시키지는 않았지만 저희들이 알아서 옷도 물려가며 입었다. 셋째는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제 언니들이 틈틈이 가르쳐서 장학생에다 도서구입비를 받아가며 대학을 다녔고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두 학기나 다녀왔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힐난이 날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엄청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공부는 어디다 쓸려고? 하는 나만은 개똥철학을 지녔다. 자고로 공부로 성공하는 사람은 10%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 나머지 90%는 10%를 빛내주기 위한 엑스트라로 존재할 뿐이다. 수학은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순전히 시험 치기 위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미적분을 한 번도 거론한 적이 없다. 학창시절에 왜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나 싶다. 그저 물건 값 주고 거스름돈 잘 챙겨서 받을 수 있을 정도, 장사를 한다면 부가세 챙겨서 낼 정도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공부?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제 언니에게 달려들거나 제 누나에게 하극상을 보이면 체벌을 가했다. 요즘은 하나나 둘을 낳아서 집에서는 모두가 왕자고 공주다.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인데 우리 집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없다. 말을 안했지만 서로 양보하고 나보다 형제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로 자랐다.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했으면 싶은 공부를 했다. 딸 하나는 국가공무원으로 검찰공무원, 하나는 광역시의 행정직공무원으로 있으니 자식농사에서 작황이 비교적 나쁜 편은 아니다. 사교육비에 돈을 들이지 않은 것 치고는 작황이 괜찮은 편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 꿈을 키워주지 못해서, 제대로 밀어주지 못해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니까 내색을 하지 못한다.
작금은 시대가 변하고 대학이 늘어나서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고 묻는 게 실례가 된다. 그냥 대학 몇 학년이냐? 정도만 묻는 게 예의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다. 지난달인가 고향의 중학 동기가 모친상을 당해서 문상을 갔다. 문상을 마치고 한잔하는 좌석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하나가 물었다.
-자네? 늦둥이 아들 고등학교 들어갔지?
-야! 이 사람아! 무슨 소리 하노? 따라지 대학 졸업하고 군에 갔다 와서 지금 포클레인 일머리를 배우고 있다. 군에서 포클레인 운전병으로 이 년을 근무해서 베테랑이다.
-벌써? 남의 아들이라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겠군.
그 친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제 자식보다 남의 아이는 더 빨리 커는 법이다. 그건 단언컨대,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중학쯤 들어갔겠나 싶어 물어보면 대학생이란다. 그런 일은 허다하다.
-야! 이 사람아, 내 서른셋에 낳았어. 늦둥이가 아니야. 지금 서른셋에 장가 못가는 놈도 수두룩하다. N4세대라고 하지 않나?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오는 그 다음은 뻔하다. 경제 이야기로 돌아간다. 국가경쟁력 상실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 날도 그랬다. 국가경쟁력은 중국에게 다 빼앗기고 미래가 암울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이야기가 인구정책의 실패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인구정책 실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딸 하나 낳고 그만둔 놈이 더 열을 올린다. 자고로 아이는 많이 낳아야 한다고, 많이 낳는 놈이 애국자라고, 그렇게 열을 올리는 놈에게 은근슬쩍 묻는다.
벗이여! 그대는 아빠인가, 아버지인가?
시대는 변해서 그런 물음에는 모두가 더듬거리는 현실이다. 그런 벗에게 바로 말한다. 나는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