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심(李士深) : 이후원(李厚源, 1598~166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晉)ㆍ사심, 호는 우재(迂齋),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며, 김집(金集), 조속(趙涑),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인조반정 후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예조 판서 등을 지냈고, 효종의 북벌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궂은비가 재앙을 일으키고 사람도 병이 들었습니다. 이때 대감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사모하여 달려가는 마음 구구합니다. 저의 우려하는 마음으로 초동(草洞)의 불안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한 운수이고 끝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영남의 유생이 노옥계(盧玉溪)를 위하여 서원의 액호를 청하려고 상소문의 초고를 가져와서 저에게 고쳐 줄 것을 청했습니다. 모르겠지만 노옥계는 평생토록 잘못이 없었는데 그에 관한 문장을 윤색해도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상공이 그의 시장(諡狀)을 찬술하며 극진하게 그를 찬양했는데, 과연 시장의 내용과 같다면 다시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도하여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 상소문의 초고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후손 정광연(鄭光淵)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정광연은 을해년(1635, 인조13)에 관소(館疏)에 참여하여 영남으로 쫓겨난 자입니다. 그렇다면 노옥계의 본말이 양현(兩賢 이이와 성혼)과 서로 불과 물의 관계에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주-D001] 노옥계(盧玉溪) : 노진(盧禛, 1518~1578)으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이다.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관소(館疏) :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한 소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정기 (역)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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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집(玉溪集) 노진(盧禛)생년1518년(중종 13)몰년1578년(선조 11)자자응(子膺)호옥계(玉溪), 우재(迂齋)본관풍천(豐川)시호문효(文孝)특기사항김인후(金麟厚), 조식(曺植), 임훈(林薰) 등과 교유
인조실록31권, 인조 13년 5월 11일 경신 1/2 기사 / 1635년 명 숭정(崇禎) 8년
관학 유생 송시형 등 2백 70여 명이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다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백 70여 명이 상소하기를,
"도학(道學)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선유(先儒)는 백대의 종사(宗師)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제왕 가운데 사문(斯文)에 뜻을 둔 사람치고 선유를 숭장(崇奬)하여 도학을 흥기시킬 바탕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문묘에 봉향하고부터 후세의 선비로서 사문에 공이 있는 자는 으레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신라에서는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 고려에서는 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 본조에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다섯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사람입니다. 명종·선조의 시대에 와서는 이황을 뒤이어 유림의 종사(宗師)가 된 이가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문성공(文成公)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성혼(成渾)입니다.
이이는 천품이 매우 뛰어나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도(道)를 구할 뜻을 품고 비루한 속학(俗學)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이교(異敎)를 드나들었으나, 이윽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반성을 하였으니, 단 한 번의 변화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 그의 도학은 지(知)와 행(行)이 겸비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도학으로 꽉 찼었습니다. 따라서 정미한 도체(道體)를 진작 의심없이 환히 꿰뚫어 보았음은 물론, 또한 그 규모가 굉원(宏遠)하고 체용(體用)이 완비되어, 임금을 선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전성(前聖)을 이어받아 후학을 계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 성인의 경지에 도달을 못할지언정 소성(小成)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정(程)·주(朱)의 진맥(眞脈)을 깊이 체득한 데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저술에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배우는 자의 일용 공부에 더없이 절실하거니와, 《성학집람(聖學輯覽)》은 제왕이 닦아야 할 학문의 요점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또 《동호문답(東湖問答)》은 분명한 체(體)와 적절한 용(用)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에 대한 여러 글들은 여러 선유(先儒)들이 아직 확정하지 못한 논리를 단정하기에 족합니다. 이러한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이를 상고하여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 좀처럼 나오지 않고 늘 물러나 있기만 하다가 늦게서야 선조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서 계미년012) 변란 때 병조 판서를 위임받았습니다. 굉원한 계책이 치밀하고 동작마다 기의(機宜)에 들어맞아서 선조께서 거는 기대가 갈수록 커지니, 소인배들의 시기가 더욱 가중되어 보이지 않는 모함과 드러난 배척으로 기어코 헤아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명의 통철한 지감을 힘입어 사(邪)와 정(正)은 저절로 판명되었으나, 불행히도 복이 없어서 배운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뜻있는 선비들은 오늘날까지도 통한스러워하는 바입니다.
신(臣) 성혼은 천품이 돈후하고 장중하여 독실히 배우고 힘써 실행하여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가례(家禮)》로 준칙을 삼았으며, 소신의 엄정함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고 효제의 품행은 신명과도 통할 만하였으며, 덕기(德器)가 성취됨에 따라 표리가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신 이이가 그의 독실한 면은 미칠 수 없다고 매번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이와 사귀며 절차 탁마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고 도가 통하였습니다. 그 뒤 이이는 벼슬에 진출하여 세도(世道)를 담당했고, 성혼은 시골에 묻혀 살면서 비록 은지(恩旨)에 쫓겨서 이따금 연하(輦下)에 나아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속마음은 늘 산야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계미년에 이이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았을 당시 성혼은 서울에 와 있으면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호했다가 드디어 한쪽편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를 입었고 나중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추악한 비난을 받아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선왕의 거룩한 마음으로도 끝내 보존해 주지 못하여, 황천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지가 벌써 수십 년째입니다. 우리 성명께서 등극하시어 비로소 신원되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이 흥성하느냐, 침체되느냐 하는 일대 기회로써 그 사이에 어찌 가로 막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 두 사람은 오현(五賢)을 뒤이어 태어나서 도학을 강명(講明)하여 오묘한 이치를 발휘하였습니다. 무릇 이기 이합(理氣離合)·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의 학설은 여러 선유들의 논리와 서로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하여 분석해 보면 귀추에 가서는 가려진 것을 밝히고 빠진 것을 보완하여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을 확충하고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을 바로잡았으므로 동방 이학(理學)의 근원이 여기에서 자못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거룩하다 할 만합니다.
대저 두 신이 우리 도학에 있어 그 공덕이 이와 같은데도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은 여태 소식이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들의 죄이자 또한 성세(盛世)의 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금 성화(聖化)가 다시 새로워지고 있음을 만물이 다 함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참으로 사풍(士風)을 고무시켜서 도맥(道脈)을 배양할 일대 기회이기에, 신들이 감히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문(斯文)의 지중함을 깊이 생각하고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두 유신의 문묘 종사를 의정케 하신다면 그 다행스러움 이루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성공이이, 문간공성혼은 비록 착한 사람이기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으니, 막중한 문묘 종사의 예전을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이는 도학이 고명하고 성혼은 품행이 독실하여 참으로 백대의 유종(儒宗)이라 할 만하니, 문묘 종사의 논의는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으로 한번 알력이 생긴 뒤부터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고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속속 일어나서 왕왕 유언 비어를 지어 내어 비방, 중상할 계책으로 삼았다. 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도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말도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시형 등은 시세도 헤아려 보지 않고 노유(老儒)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부질없이 소회를 개진하였다가, 선대의 대현으로 하여금 도리어 소인배들의 추악한 헐뜯음을 받게 하였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정일(挺一), 자는 두원(斗元), 성은 오씨(吳氏)이다. 고려 때에 시중(侍中) 대승(大陞)이 있었는데, 동복현(同福縣) 사람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분은 자신이 사는 곳에 48개의 석등(石燈)을 만들어 놓고 밤마다 등불을 피우고 하늘에 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자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고 번창하여 시중 대승에서부터 참의 정(侹)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 7대나 계속해서 나왔다. 그리고 또 5대를 지나 이조 참판 백령(百齡)이 나왔는데 그분 또한 이름난 관리였다. 이분이 황해도 관찰사 단(端)을 낳으니, 공의 부친이 된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심씨(沈氏)는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이조 판서 의헌공(懿憲公) 액(詻)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5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6, 7세에 이미 운(韻)에 따라 시를 지어 남들을 놀라게 했다. 서경(西坰)과 일송(一松) 두 분이 운을 불러 준 뒤 공이 지은 시를 보고는 기재(奇才)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13세에 〈하청절(河淸節)에 눈을 읊다〔河淸詠雪〕〉라는 장구(長句)의 시를 지었는데, 소암(疎庵) 임 학사(任學士)가 절작(絶作)이라고 칭찬하였다.
18세에 박사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었다.인조 13년(1635)에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국학(國學)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논의가 처음으로 제기되어 성균관 유생들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건의하게 하였는데, 공이 그들 속에서 뛰쳐나와 상사생(上舍生) 채진후(蔡振後) 등과 상소를 올려 두 사람을 종사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말하였다.그런데 이것이 시의(時議)에 거슬려 상소의 주동자 몇 명이 태학(太學)에서 삭명(削名)을 당하였고, 공은 이로 인해 마침내 태학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였다.